[이야기] 너절함에 관대해지지 말자

“통역도 그래, 잘 모르면 설명이 길어지지. 모르는 걸 감춰야 하니까.” 통역사 친구가 그랬다. 잘 모른다고 하면 한번 창피하고 말 일인데 그게 참 어렵다. 아는 척하며 헛소리를 지껄이다 보면 인간은 참 너절해진다. 영화 <라쇼몽>의 대사처럼, 도적보다 전염병보다 기근보다 화재보다 전란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을 향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한 인간에 대한 믿음을 떨어뜨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너절함을 발견하는 일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너절한 사건들, 그것을 너절하게 포장해서 보여주는 언론, 그것에 대응하는 너절한 독자들의 태도, 이렇게 너절함은 도처에 깔려있다. 장마철, 울고 있는 벽지에 퍼지는 지저분한 얼룩처럼 너절함은 점층적이다. 습기가 차면 벽지는 끝장난다. 너절함은 해충처럼 증식한다. 너절함은 잉여의 산물이며, 잉여는 대개 탐욕에서 온다. 순식간에 소비되어 사라져야 할 그런 대상이 된다. 소박하고 단정한 삶에는 너절함이 없다. 누추함은 너절함과는 전연 다른데, 너절하지 않은 누추한 삶이 어떤 면에서 가장 좋다.

수다쟁이가 종종 사기꾼이나 아첨꾼으로 전락하는 것은, 너절함의 수사법이 인류 역사를 거쳐 검증된 처세술이라 그렇다. 적법하게 남을 등처먹거나 무엇이든 단박에 ‘쇼부’를 내는 알량한 비법을 담은 종이 뭉치, 즉 너절하게 살라고 종용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상위를 독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광고기획사들의 각종 세대 타령도 너절하다. 너절함은 어디에 있는가? 신문이 찌라시가 되고, 화장이 떡칠이 되고, 비판이 비아냥이 되고, 장식이 키치가 되고, 칭찬이 아첨이 되는 그러한 곳에 있다. 성형 전후 사진을 비교하는 신문 광고를 볼 때처럼, 이러한 변화의 사태를 목격하면 상대에게 한마디 건네기 바란다. 저런, 자네 참 너절해졌구먼.

강의실에서 혹은 영화관에서 스스럼없이 전화 통화를 하는 광경이 익숙해진 것은 그만큼 우리가 서로에 대한 너절함에 관대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 너절함에 대해 결코 관대해지지 말자. 너절함이라는 오수에 발을 담그면 썩은 내가 몸에 순식간에 스며들 것이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며 그러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과 같다. “어찌해야 너절해지지 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