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공리주의: 고통의 양과 쾌락의 양을 비교하여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사상.

* 참조: 소광희·이석윤·김정선, “제20장: 공리와 유용”, «철학의 제문제», 벽호, 1999.

자연적 내지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거기에서 도덕의 원리를 이끌어 내려고 하는 입장을 자연주의적 윤리설이라고 한다. 사실의 어떠한 측면을 도덕적 가치의 근거로 보느냐에 따라 다시 여러 입장으로 구별된다. 자연주의적 윤리설의 가장 소박한 형태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윤리설이다. 사람은 누구나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므로 인생의 목적은 각자 자기의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감소하는 데 있다고 본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무절제한 쾌락의 추구를 단념하고 지속성이 있고 고상한 쾌락인 마음의 평정한 쾌락(ataraxia)를 찾아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쾌락주의가 아닌 금욕주의인 셈이다. 따라서 쾌락이 곧 선이요, 따라서 쾌락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믿는 주장은, 무어가 지적하듯이 가치어를 비가치어에 의해서 정의하고 가치판단을 사실판단으로 번역하려고 하는 데서 빚어진 자연주의적 오류인 것이다. 공리(功利)주의는 소박한 쾌락주의를 넘어서서 사회 전체에 쾌락 내지 행복을 도모하려는 사회적 쾌락주의다. 공리주의가 표방하는 윤리적 원리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다. 일찌기 프리스틀리의 <정치론>(Essay on Government, 1768)에 명확히 나타난 것이나, 이것을 계승, 체계화하여 입법과 도덕의 여러 방면에 널리 적용한 것은 벤담이었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 하에 두었다”라고 하며, 이것이 선악의 기준일 뿐 아니라 우리 행위의 원리라고 말한다.

* 벤담의 공리주의

- 최소 비용으로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
- 도덕은 도덕가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돼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객관적 법칙 위에 수립돼야 한다.
- 쾌락과 고통의 양은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측정 표준이 필요하다.
- 개인의 쾌고의 감수능력은 평등하므로, 공익을 계산할 때는 누구나 한 사람으로 계산돼야 한다.
- 입법과 통치 원리도 이런 도덕 원리와 같다.

벤담은 쾌락 측정을 위한 표준으로서 강도, 지속성, 정확성, 원근성, 다산성, 순수성, 범위 등 일곱 가지를 들었다. 도덕을 과학 법칙으로 간주하는 벤담의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쾌락에는 양적 쾌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적 대소로 환원할 수 없는 질적 우열도 있다. J. S. 밀은 “만족한 돼지이기보다는 불만을 품은 인간인 편이 낫고, 만족한 바보이기보다는 불만을 품은 소크라테스인 편이 더 낫다”라고 하는 말로 쾌락의 질적 우열을 인정한다. 쾌락의 질적 우열을 평가할 때 표준이 되는 것은 품위감(sense of dignity)이다. 밀의 주장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한 일대 전환이다. 밀은 인간 본성을 이기적으로 보지 않았다. 인간에겐 동정(sympathy)이 있어 선의에 따른 내적 제재(internal sanction of good)가 작용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한 몸의 행복뿐 아니라 사회적 행복까지 도모하려 한다.

공리주의가 인식론적 근거가 빈약한 윤리설이었던 데 비해, 공리주의와 마찬가지로 행위 결과에 주목하되 인식론적 관점을 강화한 견해가 실용주의다. 존 듀이의 도구주의에 의하면 우리의 관념이나 지식은 우리가 환경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한 적극적 행위의 지침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언제나 행위의 결과에 의해 검증되고 수정돼야 한다. 선의 관념 역시 다른 관념과 마찬가지로 검증될 수 있는 가설이요, 가치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행위를 지도하기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듀이는 고정된 모든 가치를 부정했다. 인간에겐 그때그때 특수한 목적과 다양성, 경험의 진보만 있다.

* 참조: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서병훈 옮김,《공리주의》, 책세상, 2010.

선악의 절대적 기준은 없으나 보편적 기준은 있다.
경험에 근거한 공리(功利, utility)가 그것이다.
공리에 기여하는 것, 즉 행복을 증진하는 건 옳고(선) 고통을 증진하는 건 나쁘다(악).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는 것이 공리주의의 이상이다.
공리주의를 실현하려면 전체 이익에 부합하는 제도(법률)를 찾아야 한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될 수 있는 근거는 사회적 감정이다.
사회적 감정이란, 타고나진 않았어도 자연스레 체득하는 본성 같은 것이다.
빈곤과 질병 같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공리의 증진에 매우 중요하며, 이는 사회적 합의로 개선 가능하다.
질 높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공리 증진에 유익하다.
질 낮은 쾌락과 질 높은 쾌락은 둘 다 경험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대체로 구별 가능하다. (이성의 객관성)
[이런 원리에 따라] 효용을 비교 측정할 수 있다.
이기심과 교양부족이 저급한 만족의 원인인데, 공리주의의 목표가 달성되려면 사람들의 인격이 전반적으로 도야돼야 한다.
질 높은 쾌락을 향유할 장치가 없다면 사람들은 질 낮은 쾌락에 빠지기 쉽다.
모든 행동 규칙엔 예외가 있는데, 공리주의는 99%의 대다수를 위한 가치 체계다.
공리주의의 구속력은 경험에서 나온다.
공리주의를 가장 반대하는 입장은 정의가 경험과 무관하게 실재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정의 역시 개인의 효용에서 비롯하여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또한 장기적으로 보면, 사회적 효용을 높인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에 부합한다.

* J. S. 밀은 <공리주의>에서 소크라테스 역시 공리주의자라고 주장한다. 플라톤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공리주의적 태도를 취하나 <고르기아스> 편에서 해명된다. 밀처럼 해석하자면 공리주의자 아닌 사람이 없다.

* 벤담 vs. 밀

벤담: 개인은 같다. 소수자의 이익보다 다수자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 고통과 쾌락은 양으로 환산 가능하다.
밀: 개인은 다르다. 소수자의 이익을 침해하며 다수자의 이익을 추구할 순 없다. 고통과 쾌락은 측정 불가능하다.

* 바람직한 공리주의자의 태도:

- 쓸데없을 거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혹시 어떤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접근함.
- 사회적 쾌락 증진보다는 사회적 고통 감소 방법을 먼저 궁리함.
- 선의에서 시작한 일들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면 제도를 개선하고자 함.

* 존 듀이(John Dewey),〈도덕관념의 재구성〉

과학적 사고방식은 도덕 관념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스인은 습관이 아닌 합리적 기초에서 윤리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 이래 도덕의 궁극 법칙을 찾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달라보이는 여러 학설들은 고정된 최종선이 있다는 걸 전제하며, 법칙의 최종 근원을 찾는다는 점에선 같다. 이 공통 요소를 의심해 보자. ‘다수의 변하고 운동하는 개별적 선과 목적이 있진 않을까?’, ‘법칙이란 개별 상황을 분석하는 지적 도구가 아닐까?’ 이런 의심은 도덕에 대한 중압과 부담을 지성에 전가하는 시도다. 책임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책임의 소재를 면밀히 살펴보자는 것이다. 도덕적 상황에는 판단과 선택이 요구된다. 이를 가설적이며 시험적인 것으로 간주해 보자. 자연 연구 태도를 갖춰보자는 말이다. 행위에 관한 판단은 특수적이다. 건강·부·학식·정의·친절 등이 중요하다 해도 그건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른 문제다. 도덕적 선과 목적은 해야 할 일이 먼저 있어야 뒤따라 존재한다. 상황의 선은 시정돼야 할 결점과 폐단이 있어야 생긴다. 인간의 악을 총괄하여 그에 대응하는 선을 총괄해야 분류(통찰의 도구)가 가능하다. 이것이 지성의 역할이다.

도덕에서 필요한 것은 특정한 연구·고찰 방법이다. 일반 개념에 몰두하지 말고 효과적인 탐구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고정된 가치에 대한 신념은 관념적 선(고상한 것이라 여겼으나 쓸모없고 사치스러운 것이 돼버림)과 물질적 선(저급한 것이라 여겨왔으나 일상 생활에 필수인)을 확고부동하게 구별하는 원인이 되었다. 관념적 목적은 경제적 목적과 결합해야 일상으로 들어올 수 있다. 실험적 논리를 도덕에 적용하자. 현존하는 악을 개선하면 그건 선이라 인정할 수 있다. 인류를 압박해온 이원론인 물질과 관념의 분열을 해소할 수 있다. 목적은 특수한 필요와 기회에 따라 개별화한 것이다. 도덕의 초점을 지성에 집중하면, 지적인 것은 곧 도덕이 된다. 자연과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탐구나 발견은 도덕에서도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이성은 지적 개선을 기획하는 도구다. 도덕적 목표는 가설에 불과하다. 인간의 과오는 도덕의 실패와 죄악이 아니라, 교훈이자 더 나은 것을 위한 계기가 된다. 지금까지 악했다 해도 현재부터 선해질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 매 상황에 신중하고 엄격한 판단이 요구된다. 인간의 오만은 배제된다. 도덕의 목표는 유연하고 생기있게 성장한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목적이 되며, 개선과 진보 과정이 중요하다. 성장 그 자체가 유일한 도덕적 ‘목적’이다.

* 참조: 피터 싱어(Peter Singer), 노승영 옮김,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시대의창, 2014.

공리주의의 본질은 개인의 쾌락 증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 감소에 마음을 여는 것에 있다. 피터 싱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윤리가 절대적일 필요는 없다. 그래도 우리는 더 보편적인 것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 공리주의 시대의 국가: “이기심이라는 약한 끈으로 묶인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연합”(존 로크)
- 장 자크 루소: “인류의 비극을 초래한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
- 애덤 스미스: “개인의 욕망은 사회의 이익과 자연스럽게 타협하고 조화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개념: “덕을 행하면서 덕을 갖춘 사람이 된다.”
- 헨리 시지윅의 공리주의: “가족을 먼저 챙기고, 친지를 보살핀 다음, 이웃까지 돌보자.”
- 죄수의 딜레마: 개인 간의 신뢰가 희박할 때 일어나는 최악인 선택 상황.

A와 B가 억울한 혐의를 쓰고 다른 방에서 각기 심문을 받고 있다.
두 검사가 A와 B에게 동시에 제안하다.
A나 B 둘 중 하나가 거짓으로 자백을 하면 상대방은 징역 10년형을 살지만 본인은 즉시 석방된다.
A와 B가 모두 자백하면 둘 다 징역 8년형을 산다.
A와 B 모두 침묵하면 6개월 뒤에 둘 다 석방된다.

개인 간 신뢰가 끈끈한 사회에서는 둘 다 침묵할 확률이 높지만 불신이 기본으로 깔린 사회에서는 둘 다 8년형을 살게 될 확률이 높다.

- 게마인샤프트: 유기체처럼 부분(개인)과 전체(집단)의 구별이 모호한 끈끈한 공동체.
- ‘가족’이 선악 판단의 기본 단위가 되면 곤란하다. 그건 보편적이지 않다. 윤리는 그것이 절대적이진 않더라도 보편적이어야 하며, 그 보편성을 조리에 맞게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류 생명을 연장하려고 행하는 동물 실험은 비윤리적이다. 현실적 이익이 보이지 않는데도 비싸고 거품도 안 나는 친환경 세제를 쓰는 일은 윤리적이다. 낙태는 비윤리적인가? 여성의 현실적 이익이 태아의 잠재적 이익에 앞서야 하지 않을까? 어느 쪽이 더 보편적인가?

“소말리아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에 비하면, 프랑스의 일류 포도원에서 생산한 포도주를 맛보겠다는 욕망은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오래된 숲을 보전하려는 욕망은 일회용 키친타월을 쓰려는 욕망보다 중요합니다. 인생을 즐기거나 포도주를 음미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바꾸라는 뜻입니다 ··· 윤리적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온갖 고통에 연민을 느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애쓴 위대한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니까요.”

** 메모 **

- 벤담이 평생 법률 연구에 매진한 까닭은 무엇인가?
- “현재 목격되는 바와 같은 잘못된 교육과 왜곡된 사회 제도만 아니라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수준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가?)
- ‘사회적 감정’이 대립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효용을 높이므로 정의가 공리주의에 부합할지 모르나 그것이 정의의 실재 여부를 타당하게 반박하는 건 아니다.
- 밀은 직관과 경험 사이의 딜레마에 빠졌다. 양적 공리와 질적 공리를 구별하고 후자가 더 가치있는 것이라 설정하기 위해 품위감과 공공선을 강조하는데 이는 애초 공리주의가 배격한 것이다. 벤담은 모든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여 거대한 체계를 완성했는데, 밀은 공리주의를 옹호하려다가 공리주의가 배격한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 양심을 되살린 셈이다.
- 벤담의 공리를 밀이 재정의(공리 : 인류에게 항구적 이익을 주는 것)하면서 공리의 외연이 모호해졌다. 경험을 강조하지 않는 윤리설을 쾌락(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모두 포섭한다.
- 쾌락과 고통은 대개 비슷하긴 하지만 어떤 이에게 쾌락은 어떤 이에게 고통이 되는 경우도 많다. 사회적 감정이 충돌하면 공리주의의 판단근거가 흔들릴 수 있다.
-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하는 희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공리적 발상이다. 그런데 쾌락의 질적 차이나 품위감을 인정하면서 쾌락을 추구하는 동기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순 아닌가.
- 밀이 바탕에 깔고 있는 품위감은 승계호 교수가 주장한 ‘암반’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