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한] Leo Huberman, Man’s Worldly Goods
Leo Huberman, Man’s Worldly Goods
리오 휴버먼, 인간의 재화
The Church taught that there was a right and wrong in all man’s activities. The standard of right and wrong for man’s religious activities was no different from the standard for his social activities or, more important still, from the standard for his economic activities. The Church rules for right and wrong went for all of these in the same way.
교회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옳고그름이 있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종교적 행위에 대한 옳고그름의 기준은 사회적 행위의 기준과 다르지 않았고, 한층 중요한 경제 활동에 대한 기준과도 다르지 않았다. 옳고그름에 대한 교회의 규범은 같은 방식으로 모든 곳에 적용되었다.
Nowadays a person might do something to a stranger in a business deal which he would not do to a friend or neighbour. We have different standards for business from what we have for our other activities. Thus a manufacturer will do everything in his power to squeeze out his competitor. He will undersell, engage in a trade war, get special rebates for his concern, try every way possible to force his rivals into a tight corner. These activities will ruin the other fellow. The manufacturer knows that, but goes ahead nevertheless, because “business is business.” Yet this same person would not for a minute allow a friend or neighbour to starve. This having one standard for economic actions and another for non-economic actions was contrary to Church teaching in the Middle Ages.
요즘 사람들은 친구나 이웃이라면 하지 않을 짓을 사업상 만난 이들에게 하려고 한다. 우리는 사업을 할 때는 평소 행위에 대한 기준과 다른 것을 적용한다. 그래서 제조업자는 자기 경쟁자를 압박하려고 힘 닿는 데까지 모든 것을 하고자 한다. 헐값에라도 상품을 팔고, 무역 전쟁에 뛰어들고, 판매 수익을 돌려주기도 하며, 경쟁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만 있다면 모든 수단을 강구하려 한다. 이런 행위들은 다른 제조업자를 파멸시킬 것이다. 제조업자는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업은 사업’이므로 그 짓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 하여 그 자가 친구나 이웃까지 굶주리게 놔둔다는 건 전혀 아니다. 이렇게 경제 행위와 비경제 행위에 다른 기준을 갖는 건 중세 교회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일이다.
Where did the money come from?
돈은 어디서 생기나?
Two men wait in line for tickets to the show. Each pays $9.90 for three $3.30 orchestra seats. As one of them leaves the box-office window he is joined by two of his friends. They enter the theatre, sit down, and wait for the curtain to rise. The other one leaves the box-office window, walks to the pavement in front of the theatre, and, holding the tickets in his hand approaches the passers-by. “Wanna buy three in the centre for tonight?” he asks. Maybe eventually he succeeds in selling them (for $4.40 each), maybe he doesn’t. It doesn’t matter.
두 사람이 공연 표를 사려고 줄을 선다. 두 사람은 각각 3.3달러짜리 오케스트라 공연 좌석표를 3장씩 산다. 둘 중 한 사람은 매표소 창구를 벗어나 친구 두 명과 합류한다. 그들은 극장에 들어가 좌석을 찾고 공연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린다. 표를 샀던 다른 한 사람은 매표소 창구에서 나와 극장 앞을 서성거리며, 손에 표를 쥔 채 행인들에게 접근한다. “오늘 밤 공연 중앙렬 세 장 있는데 사실래요?”라고 묻는다. 마침내 (장당 4.4달러에) 그는 표를 파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못 팔 수도 있다. 그렇지만 판매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Is there any difference between his $9.90 and the first man’s? Yes. Mr. Speculator’s money is capital, Mr. Theatre-goer’s money is not. Wherein lies the difference? Money becomes capital only when it is used to purchase goods or labour in order to sell again at a profit. Mr. Speculator didn’t want to see the show. He paid out $9.90 with the hope of getting it back—plus some more. Therefore his money was acting as capital. Mr. Theatre-goer, on the other hand, paid out his $9.90 with never a thought of getting it back—he simply wanted to see the show. His money was not acting as capital.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 돈은 이윤을 목적으로 되팔기 위해 재화나 노동력을 구매하려고 사용될 때만 자본이 된다. ‘투기꾼’ 씨는 공연을 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약간 웃돈이 얹어져 돌아오기를 바라는 요량으로 9.9달러를 지불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돈은 자본으로 작동했다. 반면에 ‘관람객’ 씨는 돈을 그렇게 회수할 생각은 전혀 없고, 그저 공연을 보고싶었을 뿐이다. 그의 돈은 자본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Similarly, when the shepherd sold his wool for money in order to buy bread to eat, he wasn’t using that money as capital. But when the merchant paid out the money for the wool hoping to sell the wool again at a higher price, he was using his money as capital.
비슷한 사례로, 양치기가 양모를 팔아 빵 살 돈을 마련했다면, 그는 돈을 자본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인이 더 나은 값에 되팔려고 양치기에게서 양모를 샀다면, 상인은 자기 돈을 자본으로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