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그라네(Marcel Granet), 유병태 옮김, «중국사유», 한길사, 2012(2011).
** 요약
중국인의 사유는 한마디로 ‘효능성’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효능성이란 실용성의 다른 이름이다. 효능성이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관통하는 중국인의 사유 태도이자 생활 태도다. 중국인은 지식(철학)보다는 지혜(실용)를 도모했다. 중국인에게 언어 기호는 개념 자체의 뜻보다는 행동을 일으키는 도구다. 즉 정연한 추론과 무관하다. 단순히 사물과 대응하는 기호 역할만 하는 언어 기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예컨대 노(老)는 ‘늙다’ 또는 ‘늙었다’라는 뜻에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행동을 유발하는 상징으로 쓰인다. 생명이나 운명을 뜻하는 명(命)과 만물을 지칭할 때 쓰는 명(名)은 효능성에서 유사하게 쓰이며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한자를 해석하면서 ‘부수’를 글자 이해의 열쇠로 쓸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 하여 ‘어근’이라고 단정해버리면 곤란하다.
중국 사유의 최고 범주는 질서, 즉 사회적 위계 질서였기에 그 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구체적 행위를 이끌어낼 만한 상징이 필요하게 되었다. 죽음(死)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이 나오려면 구체적인 삶의 질서가 반영된 붕(崩, 천자의 죽음), 주(走, 평민의 죽음) 같은 말이 먼저 있어야 한다. 서열과 제 역할에 맞게 분배된 구체적 형식은 삶의 예법이 되었으며, 따라서 중국 어휘는 의무를 지칭하는 방대한 가치 판단 모음집이 된다. 장기간에 걸쳐 체험되고 입증된 예법의 권위는 더 높아진다. 가치가 행동을 유발하므로 가치들이 잘 반영된 관용구를 탁월하게 해석하는 공자나 사마천 같은 대가들이 명망을 얻었다.
수, 공간, 시간 개념 역시 서구에서처럼 추상적 학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고 생활에 머물러 정치 질서를 유지하는 효능성으로 작용했다. 사물과 현상에 구체적인 이름(名)을 의무(命)에 맞게 올바로(正) 부여하는 것, 즉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 통치자의 과제다. 공간은 정방형으로 안배되어 역할과 의미를 부여받는다. 시간도 사계절로 분배되고 세분화된다. 공간(장소)과 시간을 일치시키는 일도 군주의 역할이다. 자연이 신호를 보내면 인간 사회는 그 신호를 감지하여 기회를 포착하며 스스로 세계를 해석하고 재창조한다.
도가와 유가는 상반되는 사상이 아니다. ‘보편주의’와 ‘인문주의’라는 공통 성향에 뿌리를 둔다. 도(道)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며 효능성에 맞게 매우 다양한 맥락에서 쓰인다. 음양 역시 특정한 실체로 이해해선 안 되고, 그저 번갈아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의 구체적인 양상들이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역경>의 64괘 역시 시공간의 안배를 가리킨다. 중국인들이 기수(양)와 서수(순서)를 구별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치와 제 역할이 중요하지 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수/화/목/금/토는 상하 관계나 선후 관계가 아니라 각기 다른 역할이자 효능이다. 중국 사유는 인과 관계와는 별 관계가 없으며 유동적인 조응 관계에 달려있다. 구체적인 현상과 조응하는 행위와 결과가 관습화된 목록들이 예법이며, 이 목록을 잘 알아야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 군주는 이 모든 질서를 관장하고 안배하는 현인이자 성인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