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자오광(葛兆光), 오만종 등 옮김, «중국사상사», 일빛.

** 요약

제1편

도론: 사상사의 서술 방법

1절. 일반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세계의 역사

콜링우드는 사상사야말로 진정한 역사라고 간주했다. 역사는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지식과 기술을 일컫는데, 사상사는 수천 년 동안 반복적으로 사유해 온 문제를 다룬다. 사유 대상이나 방식, 해석과 실천 방식은 세대가 이어지며 중복, 변화, 순환되며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 서양의 기성 관념이나 술어로 중국의 학술 발전 과정을 종합하고자 하거나 서양과 같은 지식이 존재했다는 것을 ‘철학사’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사상사로서 미흡하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중국인에게 철학 개념에 부합하는 지식이나 사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둘을 구별하기보다는 더 포용성이 풍부한 ‘사상사’로서 중국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더 적절한 듯하다. 물론 사상사는 철학사 서술 방식을 병행할 수 있다. 사상사에서 천재적 인물이나 경전에 큰 비중을 할애하는 방식은 지양돼야 한다. 이런 엘리트 사상과 경전은 당시의 평균 수준과 어긋나기 마련이라서, 인류 보편을 생활을 반영해야 할 사상사의 역할과 괴리된다. 따라서 후대의 기준으로 높이 평가된 그 사상이 당시에도 그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예컨대 명말 청초 사상에서 큰 위상을 차지하는 왕부지는, 훌륭한 저작물을 쓴 사실과 별개로 당대의 보편적 삶과 무관했으며 그 저작을 읽은 당대 사람들도 거의 없다. 엘리트 사상가와 경전에 대해 기술하는 사상사는 사상의 표면에 붕 떠 있는 역사일 따름이다. 따라서 기존의 ‘위대한 사상가의 사상사’가 아닌 새로운 방식의 사상사가 필요하다.

‘일반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의 역사’라는 장절에서 기술하고자 하는 것은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보편적인 지식과 사상을 가리킨다.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형성하는 문화적 토대를 일컫는다. 고명한 유학자가 <중용>에 관해 심도 있게 해석하고 설명할지라도 대부분 문화인들에게 ‘중용’이란 그저 어디에도 편중되지 않는 태도 정도로 이해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상 생활에서 실제로 운용된 지식과 기술이 사상사의 주된 배경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여긴다. 프랑스 아날학파는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 지속’을 역사 서술의 기준으로 삼았다. 오래도록 지속된 구조와 물질적 배경에서 생활 양식의 변화를 밝히고자 하는 태도다. 사상사 기술은 이런 방식이 마땅하다. 전통적인 사상사가 근거로 삼았던 문헌이나 자료의 범위를 재검토해야 한다. 예컨대 각종 문학부산품, 신문 평론, 대중적 인기 작품 등을 분석해야 하며 사람들이 익히 아는 모든 사상에 주목해야 한다. 즉, 역사학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들에 주목해 봄직하다. 형이상학적 논의보다 여러 가지 개인적 바람 속에 일반 사람들의 신앙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최근에 여러 지역의 사찰을 돌아본 적 있는데, 어디서든 휴대하기 편한 보급형 불교 소책자를 팔고 있었다. 이런 자료가 경전보다 사상사에는 더 적절한 연구 자료다. 엘리트 사상은 직접적으로 일반 사상 세계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통속화하는 선전물을 찾을 필요가 있다.

2절. 지식사와 사상사

고대에 지식과 사상은 뚜렷이 구별되지 않았다. 공자는 스스로 무격과 길이 다르면서도 추구하는 바는 같다고 말했다. 내가 말하는 ‘지식’은 문자적 지식뿐 아니라 의식 활동과 생활 방식에 대한 이해, 기술 전수, 사물 명칭 등을 두루 포괄한다. 사상이 몇몇 천재들의 사치품이 될지 몰라도 지식은 교육을 받는 모든 이들의 필수품이다. 사상은 이와 같은 일반 상식에서 생성된 것이니, 일반 상식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인 사상의 배경이 될 것이다. 당대의 지식이 사상을 만든다. 사상은 대중에게 지식을 통일적으로 설명한다. 지식이 경전을 낳고 경전은 사상을 만든다. 유가가 사상이 되자 의례와 예약은 사상인 것처럼 변질됐다. 그러나 지식과 사상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둘을 떼어놓는 것은 사상의 오만이다. 사상가는 지식으로 자신을 단련한 뒤 자신을 키운 지적 배경을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하여 감추고자 한다. 사상은 자기 권위를 입증하려고 항시 역사적 증거를 찾고자 골몰한다. 사상사와 지식사는 분리돼선 안 된다.

3절. ‘도’ 또는 ‘궁극적인 의거’

콜링우드는 자서전에서 역사학자들이 대전제의 합리성과 필연성을 역설하면서 그 대전제는 논증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상사는 사상의 궁극적 의거를 캐물어야 한다. 제자백가 시대는 공통 지식에서 자원을 얻어 온갖 식물이 자라났다. 그 공통 지식을 ‘도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유가, 묵가, 명가, 도가, 법가, 음양가 모두 공통 지식 배경에서 나왔다. 우리가 합리적이라 여겨온 많은 것들이 실은 대다수가 동의한 지식을 가리킨다. 도는 천과 관련되었다. 지식과 문화를 처음 장악한 이들은 무격인데, 지식을 천상(天象)이나 지형(地形)과 관련을 지었기에 사람들은 반박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무수한 하위 개념이 생겼고 신체의 생리 구조 역시 천으로 해명됐다. 천인합일 사상이 그것이다. 훗날 서양 지식이 이 ‘천’을 건드리자 궁극적일 것 같았던 의거는 동요했고 그 결과 ‘천일합일’은 녹색 운동 구호로 전락했다.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의거를 찾게 되었다.

4절. 연속성 – 사로, 장절 및 그 밖의 문제

사상사가는 안내도를 그리는 여행가다. 따라서 자신이 생각하는 연속성의 맥락을 설명에 넣는다. 실제 존재하는 사상 역정을 ‘사상사’라 일컬어 보자. 사상사는 이 ‘사상사’에 연속성의 맥락을 넣은 것이다. 사상사를 찬술하는 세 방법은

1. 사실 확립(상세 지도)
2. 진리 평가(안내자 견해, 가치 판단)
3. 역사를 따라가며 선택하기(1번과 2번을 섞음) 들이다.

역사학은 역사의 비연속성과 단열 현상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면 역사학자는 문헌 정리자와 구별이 안 된다. 더구나 사상사가 연속성을 찾는다면 있는 그대로인 ‘사상사’에도 그 연속성이 원래부터 있어야 할 것이다.

인물의 시대 선후로 사상사의 장과 절을 분배하고 포장하는 시도 탓에 실제 존재했을 연속성은 없어져버리고 만다. 이런 시도는 사상사라기보다 교과서 지식이다. 이 지식 역시 실용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지만 이런 익숙한 사상사 서술에서 탈피해볼 필요가 있다. 사상사가는 공적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상사의 연속성이란 다음 세 가지 맥락에서 생긴다.

1. 전통 사상을 재해석 – 다른 지식으로 옮겨가게 하거나 다른 사상을 발휘할 공간을 마련해줌.
2.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드러남 – 이단 요소가 퇴출되면서 제도 안으로 수용됨.
3. 외래 지식의 충격을 흡수하여 기존 것과 융합함.

연속성 맥락을 찾으려면 연대나 인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개인에 귀속되지 않는 사상의 역사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자 한다.

5절. 그리지 않은 곳도 모두 그림이다

사상사는 정체된 듯하거나 지극히 평범한 시대를 서술하지 않고 공백으로 둔다. 그러나 여백도 그림의 일부다. 전통적인 기술 방식에는 ‘사상사는 사상가의 사상사’라는 관념이 깃들어 있다. 즉, 1류 사상과 2류 사상을 나누려 한다. 예컨대 수대에서 중당에 이르는 시기를 사상사는 공백기로 치부한다. 그러면 이 시기는 아무 의의도 없다는 말인가? ‘성당’ 시대는 중국인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이면서도 사상은 아니다. 이 시대의 사상을 보아야 한다. 문화대혁명 10년 시기에는 ‘모택동’이라는 한 가지 사상만 기술됐다. 이데올로기가 사상을 잠식했다. 잠식된 사상을 봐야 한다. 대제국이 서고 종족 간의 교류가 잦았던 원나라와 명나라 사이 시기를 다시 살펴야 하듯, 사상사를 서술하려면 사상사가는 매번 새로운 가치 표준을 세워야 한다.

6절. 역사 기억, 사상 자원과 새로운 해석

‘영향’은 사상의 연속성을 논할 때 등장하는 애매한 용어다. 영향이라는 말을 쓰면 시여(시혜)만 부각되고 접수(수용)은 소홀해진다. ‘역사 만들기’의 우려가 생긴다. 현재는 촉매 같다. 역사 기억을 억압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상 자원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르네상스 역사는 중세사 억압사였다. 사상사가는 변화하는 연속성을 갖춘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 외래의 지식이나 사상은 기존의 자원과 만나 비교, 번역, 이해를 일으킨다. 가령 민주(democracy)는 맹자의 ‘민위귀’(백성이 귀하다)를 떠올리게 한다. 역사 기억은 다른 두 경향을 지닌다. 첫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찾기로서 왜곡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둘째, 뿌리 없애기로서 만청 시대에 공자 학설은 제거해야 할 ‘역사의 꼬리’로 간주되었다. 역사 기억을 발굴하고, 사상 지원을 충당하며, 새롭게 해석하는 것. 이 과정이 사상의 종합을 가능케 한다. 만청 시기부터 전해진 서학은 전 분야에 영향을 끼쳤지만 들어온 그대로 수용된 것은 없다. 낡은 것은 새로운 것과 함께 층층이 쌓인다.

7절. 사상사 연구에서 고고학과 문물

금세기 초 갑골문, 돈황 문서, 유사타간 같은 고고학 발굴은 역사 연구 방법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많은 사상이 공통 지식 원천과 자료 원천을 지녔음을 설명해주었다. ‘형이하학적’ 고고학 발굴이 없으면 ‘형이상학적’ 사상도 진정 이해하기 어렵다. 푸코가 의료, 감옥, 정신 병원 등 개별 연구 성과를 지식사에 투시한 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고학적 발굴과 수집 범위는 더 확대돼야 한다. 이는 ‘오래되고 낡은’ 유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비교적 근래의 자료까지 해당한다. 최근의 대학입시 답안 역시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중요 자료가 된다. 문자 없는 문물, 즉 그림이나 지도 등에 담긴 생각도 놓쳐선 안 된다. 그런데 그런 유물들 역시 역사적 서술이라는 체를 거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카시러는 “역사란 흩어져 있는 것들, 과거의 조리 없고 사소하며 지엽적인 것들을 애써 종합하여 새로운 형태로 빚어내는 일이다”라고 적었다.

8절. ‘육경은 모두 역사이다’에서 ‘역사는 모두 문학이다’까지

포스트모던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관념은 “역사란 일종의 언어적 허구이자 서사 산문체의 논술”이라는 점이다. 역사를 대중적 문학으로 간주하면 ‘경’의 위상과 권위는 떨어진다. 해석의 여지는 다양해지며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진실 여부를 대중들이 되묻게 된다. 역사를 문학으로 서술하면 사실을 넘는 풍부함이 생긴다. 가짜 역사로 빠지는 것에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역사 서술에는 진위가 공존하므로, 오히려 인위가 들어간 ‘위사’의 의도성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 제1편

서언

역사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인류의 양심과 존엄을 찾고, 자신의 전통과 연원을 밝히는 학문이다. 고대 사상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사상의 세 기본 조건을 따져야 한다. 1)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비실용적 의식 활동 여부, 2) 공통으로 인정되는 관념 형성 여부, 3) 사상의 유통을 가능케 한 부호나 도상 유무.

1절. 상고시대 사상 세계의 재구성: 전통 문헌, 현대 이론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

한비자는 고대를 이상향으로 설정했다. 이상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고대를 혼돈스러웠지만 순박했던 시대로 서술하는 경향이 많다. 그렇지만 대부분 기록은 후세 사람들의 상상과 바람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 해도 고대를 추정할 수 있는 참고 자료인 것은 분명하다. 미개했던 시대에서 문명 시대로 발전했다고 보는 진보주의는 대부분 문화상대주의나 다원론으로 대체되었다. 인류학은 인류의 공통 기원과 보편 법칙을 밝히고자 한다. 생명의 근원에 대한 호기심, 사후 세계에 대한 경외심, 미적 감각 추구와 기호를 활용한 사유 등은 보편적이므로 중국사상사 역시 고고학적 발견에서 말미암아야 할 것이다. 고대에는 사방과 사계가 서로 짝지워졌다. 천지와 우주의 사극팔방에 대한 이해는 ‘무술’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중국 고대 사상 세계는 ‘천’과 연관을 맺고, 여기서 중심과 주변 인식이 싹텄다. 이것이 중국 고대 사상의 원초적 기점으로 이후 중국인의 각종 추상 관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

2절. 복사에 나타난 은인의 관념 체계

갑골 복사(점치는 일에 쓴 문자)는 ‘무’와 ‘사’에 관련된 사람들의 지식과 사상이다. 이들은 문자 형성 후 최초의 사상가로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정신 활동에 종사했던 이들이다. 사방에 신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제사를 탄생시켰다. 갑골 복사를 통해 우리는 은상 시대에 이미 잘 짜인 공간 질서 관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를 중시하고 자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중국인에게 극히 중요한 전통적 관념이며 가치 판단에서 사상의 근원이 된다.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고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관념이 생겼다. 종묘나 사당은 생명의 연속성과 문화 전승 관념이 결합된 곳으로, 이 제사와 종법의 사슬 속에서 생존하면 그는 ‘중국인’이 된다.

제사가 규격화된다는 것은 지식의 질서화를 가리킨다. 대제사, 중제사, 소제사로 세분화되고 ‘축’이나 ‘무’는 제사를 주재했다. 신을 섬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이들은 당시 가장 많은 지식과 기술을 갖춘 이들이었다. 무는 신의 언어를 전달했으며, 사는 인간의 바람과 행위를 기록했다. 무당이 담당한 일은 세 가지로 1) 외부 세계를 파악하는 점성술과 역법, 2) 인간의 질서를 정리하는 제사 의례, 3) 인류를 통찰하는 의학과 약학 등이다. 이러한 것들이 당시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 세계의 주요 내용이다.

3절. 주나라 시대의 잔존 문헌과 청동기 명문에 보이는 사상의 발전

은인이 귀신을 숭배했다면 주나라 사람들은 하늘을 공경하고 인간을 중시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후대의 추측이다. 그렇지만 주는 은의 제사 의식을 대체로 계승하였으며,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미신적이고 잔인한 희생 의식도 치르었다. 즉, 조상 신령의 음덕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예’는 사회가 인정하는 상징성의 규칙이 되었고 이 규칙으로 세계는 질서를 확립했다. 진정 성숙한 예제는 서주 성왕과 주공 시대에야 성립되었을 것이다. 주나라 예제의 핵심은 혈연과 신분의 높고 낮음에 동일한 규칙과 질서가 부여되게끔 하는 것이었다.

가(家)는 축소된 국(國)이고, 국은 확대된 가다. 가(家), 족(族), 방(邦), 국(國)의 체제에서 혈연의 맥을 확정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선조에 대한 제사와 친소 관계 배열은 곧 신분과 권력을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사가 점점 복잡해지며 축, 사, 종, 무의 일과 직책도 점차 분화되었다. 제사 의식과 종법 제도는 일반 민중에 의해 확인된 이후 점차 정치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의식과 제도 안에 포함된 기술은 실용적 생활 방식으로 간주되어 보편적으로 활용되었고, 이면에 내재한 관념은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진리에 대한 여러 다른 해석들은 사상사의 자원이 되었을 것이다.

4절. 사상사로서의 한자

한자는 상형 문자 중에 유일하게 현재까지 사용되는 문자다. 상형을 토대로 한 한자가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고대 중국인의 사상 세계는 실제 세계의 구체적 형상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문자에 대해 거의 신비적이고 숭배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한자의 파생과 분류는 고대 중국인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자(字, 글자)가 나타내는 현상이나 사물은 실제 세계의 한 ‘류’다. 형성(음+뜻)이란 글자 구성 방법은 진한 시기에 이르러 중국 한자의 주체가 되었다. 고대 중국인의 분류 관념은 서양의 근대적 분류 관념과 다소 다르다. 감지할 수 있는 표상에서 늘 출발하여 연상을 거쳐 은유로 이어진다. ‘목’(木)이 들어간 글자는 나무류에만 한정되지 않고 성질(枯)이나 방향(東)을 가리키는 뜻으로 확장된다. 문자의 형성과 발전은 외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사유방식과 일치되기 마련이다. 한자가 은연중 사상을 환기하는 연상 부호가 되면서 문자는 인간의 의식을 제약하고 규범화하였다. 제사와 가장 밀접한 글자는 ‘시’(示)다. ‘시’가 부수인 글자들은 그 자체가 또한 고대 중국인들이 미지의 세계와 신비, 귀신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준다.

5절. 후세 사상사의 배경 – 의식, 상징과 숫자화한 세계 질서

서주의 제사 의례는 은상과 유사하지만 더 합리적이고 질서 있게 발전했다. 신과 소통하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을 무격(巫-여자, 覡-남자)이라 한다. 무격 가운데 각종 지식을 갖춘 자를 ‘축’(祝)이라 하고 의식 규범을 잘 아는 자를 ‘종’(宗)이라 했다. 일반 백성들은 이들이 전하는 신의 뜻을 따르는 쪽으로 길들여졌다. 제사를 통한 신과의 소통, 즉 ‘예’는 당시 사상 세계의 중심으로 정신의 전 분야를 망라했다. 질서의 상징인 예의를 뒷받침하는 심후한 배경은 우주다. 하늘과 땅은 서로 상대적이지만 대칭과 조화를 이루며 중앙과 사방으로 구성돼 있다. 천지에 질서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인간 세상의 의식에도 이에 상응하는 질서가 존재한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별들이 에워싸듯 중국 주변을 제후국이 둘러싼다.

은주 사람들은 우주의 구조에서 행위 근거를 찾았다. “만물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사람은 선조에 근본을 두기 때문에 이것이 조상의 신으로서 상제에 배향하는 까닭”이다. 가족, 사회, 국가의 모든 질서는 개인의 정과 지에 바탕을 둔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족 감정이 질서를 마련한다. 감정의 자연스러운 차이가 의식의 차등을 이루듯, 천도에서 말미암은 합리적인 차등 개념도 형성되었다. 의식은 천도와 인심을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틀로 확인하고 표출한다. 의식은 체계화된 상징이다. 상징의 붕괴는 곧 질서의 붕괴를 뜻한다. 제사의 제물, 춤, 복식, 대상 등은 인간 세상의 질서를 상징한다. 장엄한 의식에는 권력의 의미를 지닌 상징적 물건이 등장한다. 상징은 세월이 거듭되며 현실 세계 그 자체가 되었다. 의식을 주관하는 이들이 상징을 장악하고 의식의 양극을 이어주는 권력을 장악하면서, ‘사상’은 ‘상징의 세계’를 통해 ‘현실 세계’를 이용하고 설명해주는 것이 되었다.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추상화된 일부 상징들은 점차 고정되면서 신비화되고 숫자화된 개념이 되었다. 서구에 비해 중국의 숫자는 줄곧 구체적인 사물과 연관을 맺고 있었기에 단순히 추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즉 ‘1′은 왕이요, ‘5′는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는 숫자다. 홀수와 짝수는 하늘과 땅, 달과 별, 남자와 여자 등 자연계의 현상을 상징한다. 음양 사상도 거기서 움텄다.

제2편

기원전 9세기에서 8세기에 주왕실이 쇠퇴하고 771년에는 드디어 서주가 패망하고 동주 시대가 시작됐다. 세상의 조화와 정돈된 질서가 붕괴하자 사상 세계도 방치되었다. 지식과 사상은 새로운 분화를 시작했다. <장자>에는 “도술이 천하에 의해 분열되고 말 것이다”라고 쓰였는데, 이것은 오히려 휘황찬란한 시작이었다. 춘추 말년에서 전국시대까지(기원전 6세기~3세기) 온갖 사상이 출현하는 ‘축심 시대’가 열렸다.

1절. 춘추전국 시대의 일반 지식과 사상

사상은 그 시대의 일반 지식 수준에 제약을 받는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관념에 의해 지지되고, 사람들이 외재의 변화에 대응하는 일반적인 지식에 의해 표현되며, 이러한 지식을 이행하는 기술의 현시를 거쳐 보편적인 교육으로 전해져 온다. 사상사의 진정한 배경은 일반 지식의 토양 위에 존재한다. 이 시기의 제후와 대부와 평민 생활 속에는 ‘육예’(禮, 樂, 射, 御, 數, 書)라는 것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정신적 지식은 역산과 점성이 주가 되는 천상지학(天象之學)으로 재난과 길조와 길흉에 대한 지식이다. 천자에게는 일관, 제후에게는 일어 같은 문화인이 그 지식을 담당했다. 이들은 천상에 대한 관측과 인사에 대한 분석을 항상 연관시켰다. 예컨대 화성(火星) 출현과 인간 화재(火災)는 일대일 대응한다. 크게는 전쟁의 승패나 천도 여부에 이르기까지, 작게는 사람의 생사나 아내 맞이하는 문제까지 모두 점복으로 예측했다.

주나라 왕실이 사상적 권위를 상실하자 제후국에서는 독자적인 지식을 만들고 운용했다. 예컨대 노나라는 천자만 사용할 수 있었던 대사제를 사용했다. 천, 지, 인이 상호 관통하고 서로 감응한다는 관념은 춘추전국시대에도 지속됐다. 이는 증명이 필요치 않은 전제로 간주되었다.

음과 양의 관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홀수와 짝수 숫자와 관련을 맺게 되었을 것이며, 이원대립 사상이 자리잡혔을 것이다. 음양 개념은 구체적인 사물과 현상에만 머물지 않고, 근접한 현상과 사물을 쉽게 꿰뚫을 수 있게끔 해주었으며 우주의 양대 기본 요소가 되었다. 일반 학술계에서는 오행 사상의 원천은 추연으로 본다. 오행 역시 처음에는 지리와 관련이 있었고 은상 사람들의 공간 관념에 근원이 있다고 추정된다. 우주와 사회와 인류와의 일체 의식과 음양오행 사상은 사람들에게 천, 지, 인 사이에서 서로 대칭되는 부분은 모두 일종의 신비한 연관이 있다는 보편적 인식을 갖게 했다.

2절. ‘사’(士)의 굴기와 사상적 변이

중국 초기 사상 세계에서 축, 복, 사, 종 같은 이들이 독점하던 사상 권력은 차츰 분산되어 제후국으로 옮겨갔다. 이 시기에 하층 귀족과 서민 계급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지식 창출에 종사했던 사의 굴기를 주목해야 한다. 사의 등장에는 두 유형이 있다.

1) 춘추 시기에 왕실 관학에 속해있다가 제후의 봉지로 유입되거나, 귀족 가문이 ‘사’로 몰락한 경우. 2) 후기, 즉 춘추 말 전국 시기에 이르러 하층 평민 가운데 대량의 교육을 받아 제후나 대부의 조직에 들어오거나, 정치 권력은 없으나 독자적인 문화 권력을 지닌 지식인 계층으로 형성된 경우.

전기의 지식인들이 정치 권력에 의존해야 했다면, 후기의 지식인들은 ‘사상’에 독립적인 발전 공간을 만들었다. 이는 교육 보급과 관련이 있는데, 사상 담론의 담당자와 정치 권력의 소유자가 이 시기에 분리되었고, 사상 담론과 실용 지식도 이때 분리되었다. 사상이 실용성에 구애받지 않고 합리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게 되자 스스로 다채로운 내용을 빚어낼 수 있었다. ‘사’ 사상의 흥기와 독립은 눈부신 백가쟁명을 연출해냈다. 과거 지극히 당연하다 보았던 천상, 역산, 별점 등의 절대성이 흔들렸다. ‘예악의 붕괴’라 불리는 일련의 국면에 직면하여 사상 역시 극렬한 혼란이 일어났다. 이성적 사고가 그 균열 속에서 시작됐다. 회의가 대두되고, 그 회의가 사색을 이끌며, 그 사색이 사람들에게 문제를 가져다주었다. 가치의 연원은 무엇인가? 이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무엇을 근거로 사람들에게 사상과 지식을 믿게 할 것인가?

상징적인 예의 제도 자체와 그것이 상징하는 의의가 분리되었다. 사람들이 예의 합리성과 근거를 살피기 시작했다. 천지의 도는 이성과 도덕과 더불어 함께 존재해야 하지만 반드시 의식에 의존할 필요가 있을까? 이 시기 문화인들은 ‘의’가 질서의 상징이라고 여기긴 했으나, 그러한 질서를 실현케 하는 것은 ‘예’라는 점을 의식했다. 천도와 인심은 의례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근거이자 의례의 가치 근원이다. 질서가 이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이성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질서의 합리성 여부는 인간 도덕의 합당 여부에 달렸기에 ‘덕’이 점차 중요 관념으로 변화했으며, 선왕의 덕을 회고하는 역사 소급도 아울러 이루어졌다.

3절. 사상 전통의 연속과 갱신 (1): 유가

‘유’(儒)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유’는 고문자에서 수(需)로 쓰였으며 기우(祈雨)하는 무격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상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보면 ‘유’는 은주 시대에 의례를 주관하던 무, 축, 사, 종 등 문화인들에게서 유래할 것이다. 즉, 유사를 무축의 후인들로 간주해도 된다. 공자는 자신이 그들과 동일한 기원을 지니면서도 ‘덕’을 추구하기에 그들과 다르다고 말했다.

유는 복식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고대의 복식은 착용자의 지향을 표시한다. 신분, 수양, 상태까지 상징하며 상징은 반대로 사람의 신분, 수양, 상태를 제약한다. 유자들은 복식 이외에도 방위 규칙이나 의식 시간, 공간 규칙, 행위, 자세 등 여러 가지를 중시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의식과 상징을 중시하였으니, 이는 의식의 질서가 곧 사회 질서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공자와 제자들의 시대에 이르러 의식의 배후에 있는 관념적 내용의 변화가 분명해졌다.

1. 의례의 규칙에서 인간의 질서에 이르기까지 ‘예’를 더욱 중시했다.
2. 상징적 의미에서 ‘명’ 사상을 발전시켰다.
3. 질서를 준수하고 규칙을 존중하는 심리적, 정감적 토대로서 ‘인’을 찾아냈다.

의(儀)의 본래 뜻은 의(義)로서 외재적 형식상의 의식, 법도, 자태를 의미했다. 예는 제사에 쓰이던 악무의 뜻인데, 의례는 의식뿐 아니라 의식에 포함된 윤리 제도이기도 했으니 순수한 관념 형태의 것들 역시 의식과 관련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계층과 개인들이 모두 이러한 예의에 따라 행동거지를 규범화하는 것이 바로 질서였다.

명(名)을 중시하는 태도는 의식의 상징을 중시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명과 실에 대한 규범과 정돈 작용을 믿으면서, 사람들은 상징 부호를 점차 실제 현실과 동일시했다. ‘정명’을 통해 ‘정실’하기를 희망했다.

사람들이 좋고 나쁨을 말하려면 논증이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공통 표준이 있어야 한다. 공자는 ‘인’을 제시했다. 예를 이행하고 명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도 인 때문이다. ‘애인’이란 내심 깊은 곳에서 나오는 평화롭고 겸손하며 친절한 감정이다. 처음에 혈연 관계에서 비롯되어 보편적 감정으로 확산되었다. 외재적인 예절을 넘어서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 인간 존중 관념이 일어날 것이다. 자기 감정에 미루어 타인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이를 사회 윤리의 초석으로 삼게 되었다.

존중과 지애(摯愛, 진정한 사랑)가 후천적으로 배양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과일 뿐 원인은 아니다. 즉, 가치의 근원은 될 수 없다. 공자는 혈연 간의 의심할 여지 없는 사랑에서 그것을 찾고자 했다. 진정한 성정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감정이 ‘효’와 ‘제’다. 자신의 부형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타인을 사랑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근본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의식이나 상징으로 인간 질서를 정돈하고자 했던 이전 사람들과 달랐다. 중국 사상사는 탈피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사상의 맹아가 움터 정감과 인성의 자각에 의존하여 인간 질서를 실현하고자 하는 학설이 등장했다.

유자들은 어느새 당시 사상 세계의 ‘현학’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학풍의 편향과 이해 차이로 몇 유파로 나뉘게 되었다. 자공은 거의 맹목적으로 공자를 따랐고, 자유는 주로 예의 의미에 집착했으며, 자하는 예의 의절과 함의를 중시했다. 그렇다 해도 대체적으로 그들 간에는 공통 추세가 존재했다.

1. 모두 예악의 의식과 상징의 작용을 중시했다.
2. 고대의 전적에 근거하여 사상을 해석하고 이해했다.
3. 비교적 역사의 근거를 중시했다.

비교적 널리 유전되고 영향력이 오래 지속된 유가 문인들 사상 중 대표적인 예는 증자와 자사다. 증자는 <효경>을 지었다고 알려졌듯 효도를 지극히 중시했다. 그는 예 또한 중시했으며 대체로 공자 사상을 계승했다. <대학> 역시 증자와 관련이 깊다. 자사는 <중용>을 지었다. 이들이 다른 유자들과 다른 점은, 첫째 내재적 인성을 궁극 근거로 하는 사상적 추향이 도드라졌다는 것이다. 공자 시대에 선량한 혈연 관계에서 출발했던 것이, 증자와 자사 시대에 오면서 도덕, 윤리 질서의 토대가 보편적인 인성으로 확대됐다. <대학>, <중용>에서 제기한 격물, 치지, 성의, 정심 등 심령상의 자각에서 시작하여 수신, 제가, 치국의 경로를 거쳐 합리적 질서 건립을 위한 사상적 맥락을 모색했다. 이런 바탕에서 인성과 도덕에 관한 맹자의 학설이 탄생하게 된다.

둘째, ‘천’과 소통을 꾀하여 우주 방면에서 궁극적이고 합리적인 추향을 모색했다. 우주의 음양오행으로 유가 사상을 해석했다. 후대에 순자가 잡되고 설명이 안 되는 것을 다루었다며 비난을 했지만, 20세기의 한묘백서 같은 고고학적 발굴이 새로운 해석 실마리를 제공했다. 자사와 맹자가 오행을 이미 도덕화했기에 본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점이다.

이 학설은 자사와 맹자 계통 유자들에 의해 성숙되는데, 우주의 기본 구조인 오행을 유가가 제창한 다섯 가지 품격과 결합하여 하늘과 인간을 상호 소통시켰다. 오행의 조화는 덕으로 하늘의 도다. 사행의 조화는 선으로 사람의 도다. 성인은 천도와 상통하여 오행을 품부받으므로 덕을 지닌다. 일반 사람은 사행밖에 받지 못하여 선을 향한다. 사상적 맥락에 따라 인간의 품격과 하늘의 오행이 서로 통하니 천명의 외부적 형태인 금, 목, 수, 화, 토는 천명의 내적 형태인 인, 의, 예, 지, 성이 상통한다.

4절. 사상 전통의 연속과 갱신 (2): 묵가

묵자는 유가들이 귀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제사를 중시하는 모순적인 면을 지적했고, 과분하게 의례의 형식을 중시하는 점을 비판했다. 죽은 이를 매장한 후에 산 자는 오랫동안 곡을 하지 말고 본래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유자가 믿은 ‘운명’ 관념도 비판했다. 묵자 일파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묵자는 당시 사회에 유용한가 무용한가,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를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다. 생존 걱정이 필요 없었던 귀족 출신 유자들이 추상적이며 정신적인 문제에 골몰한 반면 묵자는 하층 출신으로 현실 삶에 치중했다. 그렇지만 단지 실용과 공리만 추구하면 내심의 정감에 기탁한 의례와 상징은 모두 상실된다. 실용적 색채가 과도하면 사상적인 흥취가 엷어지기 마련이다. 묵자 사상이 점차 소멸하게 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

5절. 사상 전통의 연속과 갱신 (3): 도가

도가의 부류는 대개 사관에서 나왔다. 도자들은 우주의 변화와 불변의 도를 체험하여, 그 도를 사회와 인류의 문제로 확장하고자 한다. 그들의 사상적 맥락의 기점은 ‘천도’에서 시작하여 점차 부연되어 하나의 지식 계통이 되었다. <노자>에서 핵심은 우주의 도에 대한 체험을 통해 천도, 세도, 인도 등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며, <장자>에 이르러 더욱 더 인간의 내재적 정신 초월과 자아 경계에 대한 탐구에 편중되었다.

후세에 ‘황제의 학문’이라고 칭해지던 도가 사상은 천도를 사상 근거로 삼아 일체의 세간사를 우주와 자연에 의거하고자 했다. 유가와 묵가가 도덕, 윤리, 정치에 관심을 표명한 것에 비해 황제의 학문이 지향한 지식은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였다. 황제의 학문은 천원지방의 개천설이다. 우주에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극점을 사람들은 ‘일’ 또는 ‘태일’, ‘태극’이라고 상상했다. 음양, 사시, 오행 등은 천지인의 공통적인 법칙을 구성한다. 천상의 궤적과 역법의 규칙은 숫자로 표시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자연법칙에 가려서 인간의 자유와 노력을 알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개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변혁의 필요를 해소한다는 점에서 전제주의의 토대가 되기 쉽다. 그렇지만 한편 불편부당한 원초적 사유에서 출발하여 평등하게 일체를 다루도록 하기도 한다. 천지의 본원에 대해 노자는 ‘도’를 제시한다. ‘천도’와 ‘세도’ 이외에도 노자 사상은 ‘인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인도’란 개체 생명 존재인 사람이 어떻게 도를 좇아 영원함을 얻을 수 있는가를 가리킨다. 개체의 생명이 지닌 가치에 주목하여 인류가 우주 및 타인들과 화해를 도모하여 소박하고 평안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인류 생존의 영원성을 유지하기를 희구했다. 따라서 도가는 개인을 중심으로 한 반사회적인 경향을 띤다. 또 반이지적인 경향으로 구제적인 유형 세계를 초월하여 신비하고 궁극적인 경계를 직접 탐구한다. <장자>에 이르면 이 경향이 더 뚜렷해진다.

6절. 전국시대의 정영 사상과 일반 지식: 방술 및 그 사상사적 의미

전국시대는 이지가 크게 발달한 시대다. 유자는 인격 수양, 묵자는 실용적 이익 실현, 도자는 정신적 초월과 영원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지적 사조가 모든 사상을 망라하진 못한다. 은주 이래 지속된 예속, 의식 관련 지식과 기술이 윤리를 유지하고 욕구를 실현시켰다. 중국 사상의 대전통에 속한 최고 지식인의 사상이라 해도 반드시 사회 상층이나 정통인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일반 지식과 사상’이라는 개념과 ‘정영과 경전 사상’이라는 개념을 구별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고급 사상과 상층 문화는 오랜 세월 지속하는 일반 사상의 배경에서 나타난다. 후세 사람들이 일반 사상을 알려면 비문자적 의식과 습속 등도 잘 살펴야 한다. 전국시대의 수술이나 방기 등이 그것이다. ‘일반 지식과 기술’은 ‘정영과 경전 사상’의 배경이자 토양이다.

전국시대 대다수 사람들은 신비감 충만한 세상에 살았을 것이며, 사상가의 이지적 사고는 필경 소수 사람들의 사업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음양이라는 개념은 오랜 기간 일반 생활에서 경험한 구체적 지식의 귀납이자 개괄이다. ‘천도’ 역시 순수하고 추상적인 의미의 도가 아니었는데, <노자> 이후 정영과 경전 사상에 속하는 사상가 저술에 포함되면서 구체성을 벗어나 철리적 사변으로 가득 찬 형이상학적 의미로 전화됐다.

실용적인 <주역>이 본래 목적을 초월하여 사상서가 되었다. 별들의 운행과 사시의 순환 등은 모두 음양과 연관되어 형이나 덕에 배분됐다. ‘이’(理)는 인간의 이지가 세계를 정리하고 귀납한 개념이며 관념 속의 세계 질서다. 이 사상이 ‘담론의 권력’을 지니게 되면서 오히려 인간의 경험에 큰 영향을 끼쳤고 ‘정영과 경전 사상’으로 변화하면서 ‘일반 지식과 기술’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

7절. 백가쟁명과 세 종류의 화제 (1): 우주시공

‘우주’라는 개념은 노자가 가장 먼저 제시한 듯하다. 우주라는 개념 속에는 시간은 물론이고 공간도 포함돼 있다. 천지사방을 우(宇)라고 부르고 옛날부터 지금까지를 주(宙)라고 이른다. 은주부터 춘추시기에 음양, 오행, 천지, 인귀 관념은 아직 이론적으로 논구할 수 있는 체계는 없었다.

전국시대 우주관 중 절대적인 것은 ‘개천(蓋天)설’이다. 정북의 축을 중심으로 삿갓처럼 둥근 하늘이 돈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축인 북극은 지고무상한 일(一)의 지위를 갖는다. 북두는 하늘의 뜻을 선포하는 자로서 계절을 조정하고 인간 세상의 시간을 안배한다. 고대인들은 대지가 커다란 정(井)자형이라 상상했다. 천에 관한 관념을 지에 관한 관념에 연관시켰다. 나라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고정된 중심에서 밖으로 퍼져가는 땅의 형상은 거의 일치한다. 이로써 땅과 하늘이 같은 구조와 상통하는 상징으로 상응하게 되었다.

우주와 시공이란 화제는 점차 철리화 과정을 밟았다. 우주의 중심은 신비한 도로 간주됐다. 일 또는 태극이라 불린 그것은 만물이 지니지 못한 절대성을 지닌다. <장자> ‘제물론’에서 ‘도추’라고 언급된 불변축에서 모든 변화가 출발한다. 유가 경전인 <중용>이나 <맹자> 역시 이러한 설법에 동의한다. 천지 중심은 절대적인 도, 궁극적인 극, 무상의 일로 상상되니 모든 것의 근거가 된다. 체험 관측에서 비롯하여 극히 추상적인 철리까지 올라간다.

우주의 시간 역시 한 기점을 가진다. 고대인들은 만물이 하나에서 여럿으로,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자생돼 나갔다고 믿었다. 우주가 아무리 복잡해도 공통 기점은 존재한다. 그 한 기점인 일은 공간의 기점이면서 시간의 기점이기도 하다. 도, 일, 혹은 태일의 절대성이 확인되면서 이것을 경험적 토대나 이성적 근거로 삼아 과거 경험한 시공 현상들을 도 아래에 두었다. <역전>은 천지를 준칙 삼아 천지 간의 모든 도리를 그 안에 포함시켰다. 태극이 양과 음을 낳고 여기서 사상이 생기며 사상에서 팔괘가 생성된다. 우주의 변화 과정은 도의 전개 과정이다. 전국시대 사상가들은 도를 현현하는 법칙으로 간주했다. 도 개념은 광범위하게 사용됐고, 인간 본성과 윤리의 합리적 근거로 활용됐다.

중앙에서 모든 것이 파생된다는 관념은 반 정도는 경험에서, 나머지 반은 상상에서 도출됐다. 신속하게 변하는 시대였기에 검증 가능한 지식보다는 모든 현상을 한꺼번에 설명해주는 학설이 필요했다. 후대 정치 이데올로기에 심히 영향을 끼친 것은 ‘오덕종시’설이다. 공간적 의미의 오행 개념은 전국시대에 보편적이 된다. 이 단순한 오행(금-목-수-화-토)의 배합과 조합으로 복잡한 현상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다양한 현상들은 수로 귀납되었고 수로 여러 영역을 추론했다.

추연은 역사, 특히 정치사를 순환 과정으로 보았다. 권력자는 오행 중 하나와 짝을 이루는 덕을 지녀야 권위를 부여받으므로 이것을 어기는 것은 천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즉 오행이 서로 이기고 지듯(목극토-토극수-수극화-화극금-금극목) 사회 변혁도 필연적이며 합리적이다.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천상을 관찰하고 역률을 제정한 이가 없었는데 오직 추연만이 이 일을 했고 진시황이 그를 채용했다. 주나라의 화(火)덕을 이기고자 자기 왕조를 수(水)덕으로 정하였다.

모든 것의 근거를 천의 질서에 두는 사상과 인간의 감정에 두는 사상은 서로 결합하기 어려웠다. 천도를 중시하면 사회와 우주에서 인간은 피동적 위치로 전락한다. 천도에서 유래된 도의 합리성은 점차 인간으로 옮겨지게 된다. 외재하는 우주 시공이 아닌 인간에게 내재하는 인성 도덕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부상했다. 자사, 맹자 일파의 공통 추향은 인간과 하늘의 관계 중심을 하늘에서 인간으로 옮겼다는 점이다.

8절. 백가쟁명과 세 종류의 화제 (2): 사회질서

전국시대 중기의 현란한 변화가 계속되며 지식계층인 ‘사’(士)의 생존 공간과 활동 공간은 상대적으로 확대되었다. 사회질서는 당시 모든 이들의 관심거리로 부상했다. 질서를 새롭게 세우고 회복하는 사고방식은 사상가들마다 달랐다.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지식이 안정성을 잃게 되자 유자들 역시 자신들이 주장하는 도덕과 가치가 영원한 유효성을 지닌 것임을 증명할 수 없게 되었다.

전국시대 중기에 들어와 맹자가 찾은 유가학설의 토대는 천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었다. 맹자가 볼 때 ‘선’이란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천성이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선천적으로 사람이 구비한 것으로, 심성상 본능에 이지적인 추론이 가미되어 전체 사회로 확대되면 사회 혼란을 바로잡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가의 언어 계통에서 단순한 육체적 생존은 정신적 존재와 구분된다. 맹자는 군자가 천명을 성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을 천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며 생과 성을 같은 뜻으로 보지 않았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다른 본성을 지닌다. 인성은 자연적인 것과 이지적인 자각이 결합한 것으로 마음을 다해(盡心) 그 본성을 제고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백공이 해야 할 일을 다 할 순 없으므로 분업이 필요하고 직업의 차이에 대한 합리성은 계급 차별의 합리성으로 옮겨간다. 인간의 도덕 윤리에 대한 토론은 사회 질서의 정돈 문제로 귀결된다. 맹자는 기하급수적인 서열에 따라 피라미드 형태로 사회 구조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런 질서가 성립하려면 강력한 왕권과 능동적 복종이라는 조건이 선행돼야 한다.

맹자와 달리 묵자처럼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판단한 이들이 있다. 무질서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현실적 이익을 가치 판단의 중심에 놓고 생존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성악 사상은 실제로 조작 가능한 제도를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전국시대 중기로 넘어오며 법제주의로 칭해지던 사상가들이 생겨났다. <묵자> 이후에 등장한 신불해나 신도, 이극 등이 그들이다. 신불해는 “법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 것이며, 술수에 맡기고 언설에 맡기지 말라”라고 주장했다. 인성의 선한 실마리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 이후에 도출된 주장이다. 더욱 극단적인 사상을 제기한 이는 상앙으로, 성인이 나와 ‘분’(分)을 실시하되 법으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가들의 이상에 따르면 사회 질서란 사람 안에 내재하는 도덕이라는 자율 의식과 예의라는 상징 형식으로 유지된다. 자사와 맹자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사상적 맥락이 강화되었으나 상앙과 신불해, 신도 등은 이들과 정반대의 길에 접어들었다.

순자는 극단주의를 거부하고 맹자와 상앙의 주장을 아울러 수용했다. 유자로서 순자는 예악의 상징적 의미로 사회 계율의 의미를 부여하여 이성적인 자아 조절로 인류 행위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한 반면, 현실 세계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공리(상/벌)을 중시하여 자사나 맹자와 다른 길을 택했다. 사상적 맥락의 기점은 인성에 대한 판단이었으나 종점은 실용적으로 사회 질서를 정돈할 수 있는 방법을 도출하는 일이었다. 인간의 이성을 인정하되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과 학습이다. 후천적 훈염으로 사람들이 규칙을 준수하고 질서에 복종하는 습관을 들이면 마침내 빈빈군자가 된다고 생각했다. 순자의 사상은 중국의 이데올로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순자의 사상적 맥락은 상당히 개방적이다. 그의 사상적 맥락은 ‘도’에서 점차 벗어나 ‘술’에 가깝게 되고, ‘예’에서 점차 ‘법’으로 전향한다. 또 사색의 출발점이나 종점 역시 ‘민’에서 점차 ‘군’ 쪽으로 이동하여 점차 이데올로기화 된다.

유가와 법가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예’에서 ‘법’으로 옮겨진 것은 사회 질서를 중건하기 위한 자연적인 일이다. 양자의 사상 맥락은 때로 일치하는데 그들 모두 사회 질서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인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가 인성은 선하다고 출발하는 반면 후자는 인성이 악하다는 입장을 고수할 따름이다. 순자에서 한비자나 이사로 이어진 것은 사상사적 이치의 연속이자 확장이다. 한비자가 볼 때 인성은 악하다. 그는 모든 사회 관계를 이해 관계로 간략화했다.

그렇다 하여 모든 이들이 현실적이고 공리적인 것은 아니다. 환상적인 대동세계를 가장 적합한 사회 질서로 간주한 장자 같은 사상가들도 있다. 그들은 질서란 인위적이며 역사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보다 먼저 존재했던 자연 질서가 파괴된 후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문명 시대로 진입하며 악이 싹텄다. 천하의 어지러움은 지식 증가와 욕망의 팽창에 기인한다. 이 혼란을 제거하려고 법률과 인의가 생겼다고 본다. 이들은 인류의 원초적 본성을 찾고자 이상주의적 상상과 사색에 빠졌다. 이들의 맥락에서 천도는 차별이 없는 상고 시대 질서의 합리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퇴폐적이고 절망적인 소리 속에서 지극히 입세적인 이치가 잠복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전국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도법(道法) 전환’ 현상이 등장한다. 그들이 인성의 추락과 사회 혼란을 강력히 비판한 것은 법도와 형률로 사회를 다스리는 데 가장 좋은 근거가 된다. 법제주의를 비판한 그들의 주장이 오히려 법제의 배경과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도란 법도나 규칙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일체를 통제하고 관할한다. 그것은 즉 ‘세’(勢)와 ‘이’(理)다. 세란 정치 권력이고 이란 담론 권력이다. ‘도’, ‘일’, ‘군’이 하나로 연계되면서 법제주의와 권위주의에 다가서게 된다. <장자>는 무정부주의에 가까우나 백성의 주인으로 임금을 언급한다.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우주 질서를 구현하는 것은 제왕이다. 유자의 학문에도 법제주의로 전화하는 요인들이 포함되었듯 도자의 학문 역시 ‘도법 전환’이라는 사상적 맥락을 따르게 되었다.

9절. 백가쟁명과 세 종류의 화제 (3): 개인 존재

거대한 우주와 복잡한 사회가 토론의 핵심이 되었으나, 한편 개인의 생존에 관한 화제 속에서 ‘인간’이 비로소 진정한 토론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전국시대에 인간 존재에 관한 사상적 맥락의 출발점은 생명의 영원성 추구였으나 유자의 관심은 그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적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순자>에 “삶이란 사람의 시작이고 죽음이란 사람의 끝이다”라고 언급돼듯 삶 이전과 죽음 이후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구는 ‘도’에 대한 사고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 양주의 사상은 이런 관점을 확대 부연하여 ‘귀생’, 즉 개체 생명의 존재에 대해 깊이 관심을 보였다. 양생 방법 등은 전국시대 많은 이들이 공유하던 사상이었는데 이 사상 속에는 두 가지 사고 방식이 잠복해 있다. 하나는 우주 관념과 인생 태도에 속하는 것으로 개체 생명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고로, 여기서 이른바 ‘도가’ 생명 관념이 나왔다.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경험과 실용 기술에 속하는 것들로 <장자>에 나오는 지인(至人)이 그런 경우다. 초기에 철학화한 ‘도가’가 후기에 나온 ‘도교’를 단련시켰다.

사회 질서에 착안한 사상가들은 인간 가치를 판단할 때 그가 지닌 사회적 품덕이나 공적을 기준으로 삼는다. 맹자나 공자의 말을 빌리면, 사람은 용인(庸人, 평범한 사람), 선비(士), 군자, 성인 등의 등급 질서로 나뉘는데, 이는 사회에서 개인 가치를 실현하는 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사회라는 인생 좌표의 참조계가 없다면 개인 또한 위상을 찾을 수 없다.

한편 ‘천도’에 관심을 표명하여 무언의 우주 속에서 더 많은 자연과 자유를 체득했던 이들이 현실 불만과 걱정 속에서 대안으로 인간에 관한 사상적 맥락을 제기하였으니 그 중에서 가장 심각했던 이가 장자다. <장자>에 수록된 ‘달생’이 그의 관점인데, 달생이란 생명의 장수 추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개인적 완성과 생명에 대한 관조까지 추구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일체 허무로 간주함으로써 사람들은 생사를 초월하여 마음속에서 삶에 대한 갈구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거할 수 있다. 이렇게 얻은 정신적 자유와 쾌락을 ‘천락’이라 칭한다. 이는 자연 생명의 흐름을 깨달음으로써 얻는 달관인 셈이다. 그런 상태에는 기회를 보고 움직이는 마음인 기심(機心)이 없다. 사회적 평가를 중시하자면 명예와 모의, 일과 지혜가 중요할 테지만 장자가 보기에 이런 것들은 생명의 존재를 해치는 것에 불과하다. 생명의 의의는 바로 정신의 자유에 있다. 무기(無己), 무공(無功), 무명(無名)의 마음자세로 소유가 전혀 없고 광대무변한 자유의 경계로 들어가게 되면 비로서 천도와 마찬가지로 ‘무’의 상태에 머물 수 있게 된다.

장자 일파의 사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1) 그들이 주장한 인생 관념 역시 우주의 근거를 지니고 있다. 이들의 ‘성’(性)은 마땅히 절로 그러한 천의 소생으로서 유자의 인성과 다르다.
2) 그들은 인간들이 고집하는 시간 개념을 타파하고 무시간의 경계로 진입함으로써 생사의 빠르고 늦음 자체를 소멸시키고 만다. 생사의 한계를 초월하여 달관을 얻을 것을 주장한다.
3) 인생에 관한 사상적 맥락에는 실용적 의의가 존재하여, 인간의 천성은 자연과 자유를 향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유용(有用)만 알지 무용의 쓰임(無用之用)은 알지 못한다. 무용지용이란 생명 존재의 영원과 정신 경계의 자유를 보전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정신적 초월과 생명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색은 전국시대에 그다지 적합하지는 않았다. 새 둥지가 뒤집어졌는데 어찌 새알이 안전하기를 바라겠는가? 사람들의 사상적 맥락은 점차 천상에서 지하로 내려와 가장 실제적인 사상에 접근하고 있었다.

10절: 언어와 세계: 전국시대의 명변지학

사상은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춘추전국 시대로 들어오면서 언어로 사상을 구축하려는 명변(名辯)의 학문이 등장했다. 무축과 사종이 문화 권력을 장악했던 시절, 언어는 신비한 효능을 지닌 것이었다. 공자의 ‘정명’ 사상 속에는 무축과 시종이 상징으로 세계를 조정했다는 의미가 존속한다. 다만 다양한 상징이 공자와 후대로 넘어오면서 가장 중요한 상징인 언어로 단일화됐을 뿐이다.

공자는 언어가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군군신신부부자자’ 같은 ‘명’과 ‘실’의 관계가 당연하며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라 굳게 믿었다. 정명이란 명과 실의 관계를 조정하여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명으로 믿음을 보이고 믿음으로 기(器)를 지키며, 기에 예를 담고 예로 의를 행하며 의를 통해 이로움이 생겨나니, 이로움으로 백성들을 평안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큰 줄기다.

묵자 일파와 공자 일파는 명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묵자는 명이 영원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기에 실제 내용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에는 반드시 근본, 연원, 실용성 등 삼표(三表)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언어의 유효성 여부의 근거는 경험이다.

노자 역시 언어를 믿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언어를 초월한 도에 있었으며 경험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함을 주지시켰다. 지식과 언어에 대한 혜시의 견해는 장자와 매우 비슷하다. 그들은 언어가 만든 구분, 지식이 만든 한계를 초월하여 자유로운 경계에 도달할 것을 바랐다. 다만 장자가 좌망(坐忘, 조용이 앉아서 잠념을 버리고 무아의 경지에 들어감) 후에 심재(心齋, 마음을 재계하여 평형을 유지)하여 적막한 경지에서 자유와 초월을 체험하고자 한 반면, 혜시는 언어 변론으로 언어를 부수고 이지와 언어적 습관에서 벗어나 자유와 초월의 경계를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손룡은 ‘백마론’과 ‘견백론’ 등을 주장하며 더욱 순수한 언어 분석으로 나아갔다.

논변이 순수한 논리와 언어 변론이 되자 그 배우의 사상사적 의미로 변하기 시작하여 현상 세계와 관련이 없는 말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도는 술(術)로 변하고 사상은 기교가 되니 점차 사람들도 흥미를 잃어버렸다. 결국 공자나 묵자, 장자 계열의 모든 사상 유파의 후학들은 언어 관념을 교정하여 도로 통하는 초월적 경지, 인간의 도덕 세계 혹은 지(智)의 경험적 세계로 통하는 도구가 되게끔 했던 것이다. 순자는 명과 실의 혼란을 지적하면서 명칭에 근거해 실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극단적이고 이지적인 현실주의를 펼쳤다. 사회적 관심에 집착하는 중국인들은 순수 언어 사변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유가의 정명에서 시작하여 명변지학은 전국시대의 혜시, 공손룡, 묵자 후학의 손을 거쳐 다시 유학가(순자)의 정명으로 돌아왔다.

제3편

서언: 백가쟁명의 미성(尾聲)과 중국 사상 세계의 형성

춘추전국시대는 절지천통(絶-地天通, 인간과 하늘 간의 통로를 단절)으로 민신이업(民神異業, 사람과 귀신이 서로 다른 일을 함)을 조성한 시대다. 백가쟁명의 미성, 즉 전국시대 말기에서 서한 전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각종 사상은 점차 융합되고 교차했다. 우주, 사회, 그리고 인류에 관한 지식이 이 시대에 이르러 진정으로 종합을 이루며 큰 체계를 형성했다. 진한 대통일 이후 중국 사상 체계는 종합과 겸용 속에 과거 사상을 정합하고 해석했다.

지식이 융합하고 교류하는 추세는 <회남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며 황로학파의 학술 또한 그러하다. <회남자>는 하나의 길만 따르거나 한 모퉁이의 취지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며 당대의 지식을 집대성한 저작이다. 절충과 융통의 사상적 대세 속에서 개인의 생존과 사회 규범, 방기와 술수, 형명(刑名)과 법률, 유학과 윤리 등이 근 1백 년 동안 사상 세계의 주된 사조를 구성하게 된다. 백가쟁명이 끝나게 된 것은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나 한무제의 파출백가 같은 정책 때문이 아니라, 절충과 융통이 이미 다양한 사상가들의 이론을 겸용하여 각 학파의 사상적 차이가 옅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절. 진한 시대의 보편적 지식 배경과 일반 사상의 수준

1970년대 마왕퇴 한묘 등 유적 발굴로 우리는 진한 시대의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발굴로 알게된 사실은, 진한 시대에 황로 사상이 흥성하고 한무제 시대는 유술만이 독존했다는 기존의 학설과는 무척 달랐다. 당시 사람들은 천도에 관한 철리나 세도에 관한 치리, 인도에 관한 윤리뿐 아니라 여러 실용 지식이나 기술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진한 사람들은 경험을 토대로 상징과 상징이 모사하는 사물, 현상 사이에 신비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화상이나 도상은 단순한 예술적 의미가 아니라 실용성을 지닌 신비한 성격을 지녔다. <좌전>에 나온 ‘황천’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고대 중국인들은 사후의 유명(幽冥) 세계나 신선이 사는 불사의 세계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장수와 선인의 영원성, 부귀와 가정의 화목 같은 행복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민족국가’ 관념도 생기기 시작했다. 주변 나라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에게는 ‘중국’과 ‘중국인’이라는 의식이 도드라졌고, 동일 지역에서 동일한 문화를 향유하고 같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한다는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이 ‘국가’ 개념은 한나라 때 크게 유행했다. ‘한’은 민족과 국가의 공통 명칭이 됐다.

외재하는 우주는 여전히 인간의 판단과 이해의 가장 기본적인 근거였다. 사람들은 ‘천’의 구조와 운행을 본받으며 사상과 행위의 합리성을 획득했다. 또 ‘천’으로 현시되는 자연법칙은 더 분명하게 숫자 개념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천지와 인신과 소통하는 권력은 여전히 소수의 술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2절. 철리의 종합: <여씨춘추>에서 <회남자>까지

‘겸병’과 ‘융합’의 추세는 상대주의적 시비, 선악론이 기존의 항구적이고 고집스러웠던 것을 타파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이는 <순자>를 고대 사상의 종합이라고 평가하고 어떤 이는 <한비자>가 그러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연원이 다른 학설에 대한 종합적인 해설 시도 중에 가장 중요한 저작은 <여씨춘추>다.

진나라 재상 여불위가 휘하에 모인 빈객들에게 저술토록 한 <여씨춘추>는 천하의 사상과 지식을 모두 포괄하겠다는 야심이 담겨있다. 이 책의 ‘십이기’는 천지만물과 고금의 일을 두루 포괄하는 틀이 되었다. 천도의 순환과 변화에 따라 사계절과 12달을 벼리로 삼고 음양의 소식(消息)을 체험하면서 ‘춘생’, ‘하장’, ‘추수’, ‘동장’을 연상하여 천상, 물후, 농사, 정사, 인사 등을 모두 연계시켰다. 천자의 거처, 수레, 복식, 음식 등을 순서에 따라 안배하였고, 정부의 사무나 군사와 농사의 금기 등을 규정하였다. 하늘과 땅의 현상들을 세도와 인도와 연관시켰으며, 이로써 천지의 변화를 자명한 근거로 삼아 개인과 사회의 도리를 논증하고자 했다.

<여씨춘추>는 천을 인간 세상에 투사하여 절대적으로 공평무사한 사회를 이상적인 세계로 그려냈다. “하늘은 사사롭게 덮어주는 일이 없고, 땅은 사사롭게 실어주는 일이 없으며, 해와 달은 사사롭게 밝혀주는 일이 없고, 사계절은 사사롭게 운행하는 일이 없다.” “천하는 임금 한 사람만의 천하가 아니고, 천하는 모든 이들의 천하다.” 황제지학은 음양과 사계절의 천도를 기본적인 사상적 맥락으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이 ‘십이기’를 관통한다.

인류 역사는 사계절처럼 순박한 상태에서 성숙한 상태로 진입하는데, 문명의 시대에는 청명한 이성과 후천적 지식으로 자아를 절제해야 한다. 이런 시대에는 유자의 학설이 합리성을 확보한다. 질서를 유지하려면 교육, 학습 외에 군대와 형법도 필요하게 된다. 가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군대를 잘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겨울은 죽음에 해당하는데 이를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장례 역시 간소하게 지내야 한다.

음양가의 사시운행의 순행에 근거하고 유가와 묵가 등 여러 사상의 좋은 점을 취하며, 천지인을 관통하는 <여씨춘추>의 거대한 정신을 고취하는 저작물이 나왔으니 회남왕 유안이 문객들을 모아 편찬한 <회남자>다. <회남자> 역시 모든 지식을 포괄하는 거대한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회남자>에서 ‘도’란 모든 것의 본원이자 합리성의 근거다. 여기서 ‘도’란 곧 ‘하늘’이자 ‘자연’으로서, <여씨춘추>에서 하늘과 인간 모두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회남자>에서 도는 자연과 사회, 인류를 통해 드러나는데 <여씨춘추>의 여러 논의들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천, 지, 인, 물, 사를 두루 포괄하는 거대한 체계를 확립했다. 이는 근본적인 원리로 볼 때 유자들이 규정한 윤리나 도덕 규범과는 다르다. 유자의 방법을 응용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모두 ‘도’라는 근본 사상 맥락에 포함시킨다.

<회남자>는 <여씨춘추>와 달리 각 편이 상호 관련을 맺으며 춘추 전국 시대의 여러 학설을 망라한다. 황제와 노자의 지식에 근거를 두긴 하지만 <회남자>의 사고방식이나 여러 학설의 수용 범위는 이미 전국시대 황제지학을 벗어났다. <여씨춘추>는 천을 사상의 의거로 삼고, 인(개인)의 존재를 강조했다. <여씨춘추>가 상징하는 것이 사의 계층 및 ‘정통’의 항쟁이라고 한다면, <회남자>는 서한 전기에 주변 지역의 사조와 중심이 되는 국가의 사조 간의 충돌을 상징한다.

3절. 국가 이데올로기의 확립: <춘추번로>에서 <백호통>까지

진한 교체 시기의 문사인 육가는 유학이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되어야 하는 합리성을 역설했다. 육가는 <신어>에서 ‘인의를 행하고 옛 성인들을 본받을 것’을 논했는데,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이 제왕의 스승이 돼야 한다는 이상주의를 견지한 것이다. 좀 더 실용적인 면에서 입세하여 책략을 제시한 이는 숙손통이다. 그는 유가가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가의 이상주의는 점차 실용주의로 접근하게 되고, 유자의 사상과 학설 역시 정치 이데올로기 쪽으로 기울게 되면서 최종적으로 숙손통에 의해 예의 제도가 제정됨으로써, 예약으로 정치적 질서를 건립하려는 유가의 목적이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즉 유학이 유술로 전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삼기에 유학은 우주론의 근거가 미약하다. 그래서 한나라 초기에는 황로의 사상을 받아들여 유학의 우주론을 지탱하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런데 ‘천’을 인간 질서의 합리적 배경으로 삼고 비교적 충분하게 우주 법칙을 논술한 이는 동중서다. 그는 유가 학설을 민족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격상시켰다. 사상사로서 그의 영향력은 동시대 어떤 유자들보다 탁월하다.

‘천’에 근거를 두면 유가의 입장은 와해된다. 동중서는 사람이 천성을 받아 태어났다는 관념에 약간 수정을 가해 ‘생’, ‘성’, ‘정’을 구분하였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성’을 확립하려면 선천적 본성 이외에 후천적인 수양이 필요하다. 따라서 법률 제도와 교화 조치가 필요해진다. 도덕과 윤리는 법률의 근거와 배경이 되었다. 동중서는 ‘천인감응’을 굳게 믿었는데, 고대 중국에는 오래전부터 우주와 사회, 인류가 하나의 근원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서로 감응한다는 전통 관념 체계가 있었다. 이것이 거의 모든 사상의 배경이자 토대다.

유자의 학문은 도덕이나 윤리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고 군주의 권위나 정당성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측면이 강하다. 달리 말하면, 이미 무한의 경지에 이른 군주 위에 더욱 무한한 ‘천’을 올려놓은 것이다. 지식계층은 또 한번 하늘을 대신하여 정치에 대항하고 군주에게 제약을 가할 수 있는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동중서의 ‘천인삼책’(1. 천인감응 2. 군권천수 3. 춘추 대일통)은 한나라 시대 유학의 전환에 결정적 사고방식을 제공했다. 염철회의(소금과 철의 독점 문제)와 석거각회의(<춘추> 해석 논쟁)를 거치며 정치 권력은 사상 권력에 대해 승리를 확인했고 유자들도 변화했다. <백호통>은 반고 개인의 사상이 아니라 2백 년에 걸친 국가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논술이다. 동한 시대에 이데올로기가 완성된 후, 유가 학설은 우주 자연의 법칙을 갖추어 근거로 삼고, 군주제로 널리 시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으며 행정과 교육 사상을 주입하고 확대하는 데 편리하도록 간략화된 언어 계통을 갖추게 되었다.

4절. 경과 위: 일반 지식과 정영 사상의 상호 관련 및 그 결과

진한 양대의 사상사는 참위(예언)의 학문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미신이라 비판 받을 수 있으나, 끊임없이 이어진 일반 지식과 사상의 자연적인 연속으로 간주하면 그 내적 기인을 이해할 수 있다. 참위는 추연의 사상과 음양오행 학설에 근원을 둔다. <<한서>> <예문지>에 보면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수술’(數術)이 당대 지식의 큰 부류로 간주된다. 사회 생활 속에서 실제 생활의 지식을 담당하면서도 무축이나 술사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설득하려고, 이미 공인된 주류의 이론적 근거와 경전 근거를 찾으려 노력했다.

학술과 사상이 이데올로기화하는 과정에서 유학은 지나친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도덕 중심의 사상적 맥락을 부단히 수정했다. 엘리트 사상이 일반 지식으로 내려오는 경향을 띤다. 방기, 수술에 관한 지식은 거꾸로 위로 올라가 이미 알고 있는 현상을 해석하고 주류 우주 이론을 수용하며 미지의 영역을 추측하였다. 경험을 확장하여 이론화했다.

‘경’이 생겨나자 경전의 권위를 나눠갖고자 하는 ‘위’(緯)가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위서는 경서와 관계를 맺어야 그 권위의 후광을 얻는다. 위서에서 ‘기’, ‘음양’, ‘오행’등을 차용한 것은 그러한 사고방식이 중국 고대부터 사람들이 가장 신봉하는 것이었고, 사람들의 직각이나 경험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우주론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은 방술과 같은 지식이 권위와 신앙을 얻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다.

진한 시절부터 동한 말엽까지 위서의 학문은 흥성했다가 다시 쇠미해졌다. 위서가 인정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위서는 존재 의미를 상실했기에 정점에 이르러 쇠망하기 시작했다. 위서의 지식과 기술은 서서히 경서 계통으로 흡수되었다. 양한 시기는 사상의 체계화와 표준화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기로 국가 신학의 탄생을 촉진했다.

지식과 기술의 총체인 경전의 위상은 더 높아졌고 사인들에게 경학은 인격과 정신의 지주가 되었다. 경전을 두루 통달한 통유도 등장했다. 정현처럼 뛰어난 대학자가 등장하여 경전에 대한 상세하고 방대한 주해도 이루어졌다. 경전과 경전 주석으로 사람들은 모든 지식을 얻게 되었고 진리 또한 합리성을 갖추게 되었다.

제4편

서언: 이역의 풍

현존하는 사실로 고대 중국과 외부 세계의 접촉을 가늠하는데,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중국인의 시야가 확대되고 중국인의 ‘세계’가 넓게 전개되었다. 우리가 살펴볼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외래 자원은 인도에서 생겨난 불교다. 한나라 이후 중국 사상사는 대체로 불교의 전래와 중국화, 도교의 굴기와 불교에 대한 반응, 중국 전통 사상과 불교의 융합, 그리고 중국 고유 자원에 대한 재발견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아나갔다.

1절. 한나라에서 진나라 때까지: 고유 사상과 학술의 변화

서한과 동한 시절 중국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할 일은 도통, 학통, 정통이 ‘일통’으로 통일됐다는 점이다. 사상이 권력을 지니면 이데올로기가 되며, 이데올로기는 사상으로서 자유성과 초월성을 잃게 된다. 동한 시대에 이르러 지식 계층이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지식 계층은 권력에 대항할 능력을 상실하고 ‘왕자의 스승’에서 ‘황제의 신하’로 위상이 떨어졌다. 문사들은 권력 집단을 비판하며 극단적인 이상주의를 추구했는데, 결국 화를 초래했다. ‘당고의 화’는 이상주의 정신과 보편적 진리의 좌절을 뜻하는 것으로 이후 사상사의 일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2절. 현의유원: 3세기 사상사의 전환

사상사의 학술과 기풍은 군체가 인정하는 가치를 이상으로 삼던 것에서 멀어지면서, 개인 정신의 독립과 자유를 추구하는 쪽으로 전향했다. “공자께서 성과 천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가히 들을 수 없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한나라 사람들은 ‘성’이라는 인간의 궁극적 근거를 토론한 적이 별로 없다. 사상가는 언제나 전대의 사상서에서 ‘이의역지’의 해석 방법으로 새로운 사상을 창출한다. 이것이 ‘사로’(思路)다. 왕필은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궁극적인 문제를 파고들어 사상의 근거를 찾았다. ‘구체적인 인사’ 문제를 ‘추상적인 현리’로 전환했다.

사상사적 전환 속에서 유가가 논의하고자 한 사상의 종점은 도가 사상의 기점이 되었다. 한나라 시대에 모든 지식과 사상의 근거였던 우주론, 예를 들어 음양오행설은 본원적인 ‘유’와 ‘무’로 대치됐다. 일단 노장의 사로로 전향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간단명료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의’의 본질적 의미를 중시하다보니 현학은 언어를 경시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상적 맥락의 기점과 종점은 여전히 무와 유의 문제였다. 이미 당대에는 도가와 유가가 병존하고 있었다. ‘무’를 ‘유’에 앞서 우선적인 위치에 놓은 것은 사상적 기점의 대전환을 유도했으며 생활상의 가치 태도에서 대전환을 불러일으켰다. 도가의 종지를 재차 해석하여 새롭게 발현했다.

그런데 실제 생활의 사회질서를 세우는 것은 ‘무위의 도’가 아니라 인위적 형식이기에 ‘자연’과 ‘명교’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이때 장자에 대한 재해석이 등장해, 현원한 본체론에서 인생의 정취와 정신적 자유에 대한 흥취를 일으킨다. ‘독화’(獨化)란 우주, 사회, 인간이 아무런 외재적 간섭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직접 삶에서 실천할 수 있기에 금세 사대부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와 아울러 현학은 유희 경향과 문학 취향을 띠게 된다. 과거에는 논변과 증명을 요구했던 사상들이 ‘일용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생활 관념이 됐다. 이런 자원과 배경 속에서 외래 사상인 불교가 ‘서로 섞임’을 통해 서서히 중국의 지식계와 사상계로 진입한다.

3절. 청정도교: 도교 사상, 지식, 기술의 종교화 과정

2세기 말에서 6세기 말까지 4백 년에 걸친 도교의 역사는 ‘청정도교’(淸整道敎)라는 네 글자로 개괄할 수 있다. 도교의 출발은 상고시대 무격의 방술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생명’, ‘행복’, ‘민족국가’ 등 생활과 밀접한 문제들이었다. 동한 시대 무격, 방술가들은 도참, 재이, 점성자들로 주로 경학이나 위학에 근거를 두거나, 극심한 사회 변동 속에서 활동하거나 장생술을 중시하는 부류 등으로 나뉘는데, 이 모두 도교 형성과 정합의 중요한 내부 인자가 되었다. 즉, 도교의 여러 지식과 기술의 배후에는 후대 도교 관념의 핵심인 생명의 영원함과 행복 추구가 잠재해 있다.

2세기 중엽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자 부적과 주술로 병을 치료하는 무격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반면 위진남북조 시대의 도교 경전을 보면 도교 내부에서 문화적 품격이나 도덕 규범에 관한 비판과 반성이 엄격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종교 역시 그러하듯 도교도 아래 세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종교화됐다.

1. 지식과 기술의 합리화
2. 조직 형식의 합법화
3. 도덕과 율령의 신성화

이러한 역정이 2세기 말에 시작하여 몇 세기 동안 진행됐다.

도교의 규율이란 모든 신도들의 신앙이 도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율의 근거는 유가의 윤리에서 나왔고, 텍스트는 주로 불교의 계율에서 참조했다. 도교는 고대 중국의 상징 체계를 새롭게 정리하면서 점차 완전한 귀신의 계보를 세우고, 우주의 근거와 도덕적 지향을 갖춤으로써 인간의 질서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상징 체계로 자리 잡았다. 나쁜 짓을 하면 업보를 받을 것이며, 착한 일을 하면 행복 세계가 기다린다. 귀신 계보의 배후에는 고대 중국의 우주 기원과 태극, 양의, 천지인 등에 대한 상상과 추론이 자리 잡고 있다.

도교가 종교 형태로 변화하자, 더 이상 노장의 현묘한 철리로 자신의 종지를 체현할 수 없었고, 목적 역시 노자나 장자의 격언으로 실현하기 어려워졌다. 장생과 행복을 추구하려면 현실에 부합한 지식과 기술이 요구됐다. 죄악과 타락을 징벌하려면 상징 체계가 요구됐다. 도교는 정신적 초탈을 강조한 불교와 달리 현세의 만족을 중시했다. 도교는 드디어 세속화되었다.

4절. 불교의 동방 전래와 그 사상사적 의의(1)

불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에 전래됐다. 불교가 중국에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대략 동한(2세기) 명제 때다. 불교는 전래 당시에는 중국 지식인들의 사상이나 신앙 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초기 1,2백년간 일반인들의 마음속에 불교는 그저 도교와 유사한 종교일 뿐이었다. 고대 중국인의 전통적 생각으로는 생존은 의심할 바 없는 진실한 세계로서,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사고가 뚜렷했다. 따라서 불교의 고사나 의식, 관념 등은 이런 전통적 사고와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매우 세속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사람들은 불경을 암송하고, 불상을 만들고, 절을 짓는 등 조금씩 훌륭한 업을 쌓으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초월에 이르게 된다 믿었다.

서기 2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400년 동안 불교 신앙은 고대 중국인들의 생활과 사상 속에 보편화되었다. 사람들이 빌었던 것에는, 현실 생활과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부모의 내세, 선조의 운명, 심지어 중생들이나 국가의 희망에 대한 관심까지 포함돼 있었다. 선량한 소망을 혈연관계가 없는 일반 중생에까지 확대했다. 액운을 피하고 복을 구하는 것은 일반 신도들이 이해하는 종교 신앙의 의의다. 선과 악의 윤리 원칙을 유가에 의해 규정한다면, 이 윤리 원칙이 실행되는 감독 책임은 불교가 완성할 수 있다. 여기에 가장 효율적인 개념이 인과응보다. 불교의 전파 과정에는 언제나 ‘선에는 선한 보답이 있고 악에는 악한 보답이 있다’는 불법이 함께했다.

“주공과 공자가 말한 바는 (도의) 가까운 모습을 대략 보여주었고, 석가의 가르침에 이르러서야 (도의) 그윽하고 미묘한 부분까지 모두 이르렀습니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강승희의 이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함축돼 있다.

1) 불교가 중국에 존재하는 이유는 개인의 해탈과 초월을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사회 사상과 행위를 규범 짓는 기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2) 규범이 공자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는다.
3) 사상과 행위를 규범 짓는 힘이 인과응보 개념에서 나왔다.

중국 전통의 언어로 불교의 교리를 번역하고 해석하는데, 여기서 ‘격의’(뜻을 드러나게 함)라는 개념이 생겼다. ‘합본자주’는 중국어 환경에서 불교 경전의 원의를 탐구하는 주석본이다. 토론과 쟁론을 거치며 불교 교리는 중국어 환경에서 자체의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도’로 ‘보리’의 개념을 이해하고 ‘무’로써 ‘공’의 개념을 대신했다. 이러한 경향의 문제점은 차이점을 소멸하여 더 깊은 이해의 기회를 없애버려서, 풍부한 불교 사상을 한정된 고대 중국의 사상 범주로 제한한다는 데 있다. ‘공’의 의미는 모든 현상에 ‘자성’이 없다는 것이지만 지식 배경이 없는 중국인으로서는 쉽게 ‘공’과 ‘무’를 연결한다. ‘만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마음은 어떻게 없을 수 있는가?’ 이런 까닭에 불교는 당시 매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무심’설은 ‘본무’설로 대체되었으나 여전히 미흡했다. ‘색즉시공’이란 색 자체가 본래 실제 본성을 갖고 있지는 않으므로 사실은 ‘공’이라는 말이다. 이런 해석 과정 속에 불교는 도가로 인해 그 교리가 더욱 명백하게 변했다. 도가 또한 불교의 도움으로 그 사상의 폭이 넓어졌다.

5절. 불교의 동방 전래와 그 사상사적 의의(2)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주목해야 할 인물은 남방의 혜원과 북방의 구마라습이다. 혜원은 불교의 초월성을 항변하고, 한편으로는 불교의 세속화를 촉진했다. 구마라습은 많은 불경을 번역하여 깊고 다양한 불교 학설을 중국 지식인들에게 소개했다. 사상이 풍부한 불교는 중국 사상의 한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상류 사회에서는 중국의 도리보다 불교의 도리가 정밀하고 깊다는 점을 인정했다. 불교는 유가의 도를 포함할 뿐 아니라 유가와 도가를 뛰어넘었다고 평가되기도 했다. 예컨대 사람의 불성에 관한 명제는 중국 사상에 없던 것이다.

불성과 돈오에 대한 해석 등 불교에 대한 상층 문화인들의 심화된 이해와 설명은 이 시기 사상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공’에 대한 사변은 이 시기 주요 화제였다. 형이상학적 본원에 대한 사고가 결핍되었던 중국의 고대 사상과 언어로는 ‘공’을 충실히 설명하지 못했다. 진정한 본원은 일체의 절대적 존재를 초월한다. 동도 아니고 정도 아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다만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으로 하여금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 현상 세계에서 자유롭게 적응하여 만족하면 심령 세계도 청정하고 순수할 수 있다. 불교는 언어의 한계를 강조한다. ‘공’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영원히 집착하지 않는다.

우주 본원인 ‘공’에 관해 토론했던 것은 결국 인생의 최종 의의에 근거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중국 사상계의 주류에서 추구하는 종극의 경지는 절대와 초월이 아니라, 사회 생활 가운데에서 원만한 인생을 실현하는 것이다. <반야>가 우주 본원에 대한 분석에 기초를 둔다면 <열반경>은 인생 문제를 다룬다.

사람이 자신을 진실한 존재로 여기면 ‘아’가 있게 되고, 진실이 없는 ‘고’의 세계에 잘못 들어가게 된다. 마음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세계는 환각, 욕망 등을 불러일으키며, 이로써 야기된 각종 고뇌와 얽매임은 생사윤회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모든 죄과와 업보가 이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이런 것은 ‘무상’한 것이다. ‘집착’이 있으면 초월할 수 업삳. 극단을 떠나 유무를 초월하면 ‘중도’에 부합하고, 비로소 반야학에서 인정하는 초월과 절대의 경지에 이른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영원히 집착하지 않으며, 생주이멸의 현상 세계의 배후에 숨겨진 영원의 절대를 통찰한다.

주의해야 할 점은, 반야학의 공이 확실한 사상적 근거인 한편 허무주의로 빠지게 하는 사상의 부식제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축도생이 제시한 ‘선불수보 돈오성불’(선은 보답을 받지 않고 돈오하여 성불한다)은 의식의 전환으로 절대 진리를 깨닫는다는 뜻으로, 불교라는 종교 자체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중국의 지식 계층은 불교의 ‘교’에는 냉담했으나 ‘리’에 대해서는 흥미를 가졌다. 이는 구체적 경험의 현상 세계를 꿰뚫어 직접 절대적 철리를 나타내는 것을 일컫는다.

6절. 불교가 중국을 정복했는가?

서기 5세기부터 7세기까지 사상사는 유, 불, 도 등 ‘삼교의 합류’, 즉 세 사조의 분쟁과 각축, 상호 융합 과정으로 간주된다. 불교의 도리와 도가의 현언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당시의 관습이 되었다. 불교가 중국 문명에 진입하며 닥친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종교가 세속 국가의 이익과 함께 처할 때, 존재 독립성을 지닐 수 있는가?
2. 종교 신앙은 윤리나 도덕 규범보다 우선적 지위를 지닐 수 있는가?
3. 종교적 이상은 민족 문화의 특수성을 넘어선 보편적 의의를 지닐 수 있는가?

불교는 결국 고대 중국의 세속적 도덕을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못하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양자가 모두 합리성을 갖고 있다고 인정했다. 불교는 중국에 들어온 후 중국어라는 환경에 처하면서 커다란 압박을 받았다. 세속 정권이 갖고 있는 강제적 역량, 오래 굳어진 습관적 이해와 해석 방식, 문명의 전통적 권위 등이 그것이다. 각종 불교 경전이 번역되는 중에 중국인의 관념에 부합하는 경전이 특별히 선택되었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5세기에서 7세기의 사상사의 진척 과정을 보면, 불교가 중국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 불교 사상으로 하여금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불교 교단과 세속 정권, 불교 계율과 도덕 윤리, 불교 정신과 민족 입장 등 세 방면에서 불교는 모두 조용하게 입장의 전이를 이루었다.

제2편

서언: 이학 탄생 전야의 중국

혼란하기 그지없던 오대십국의 정국은 송나라의 약진으로 960년경 거의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전연지맹(요-송 조약)에서 정강지변(후금의 북송 정복)까지 송나라는 한 번도 천하를 밝게 비춘 적이 없었다. 밖을 다스릴 힘이 미약했던 송나라는 외부 세력들을 미개한 오랑캐라 칭하며 내부 안정에만 골몰할 뿐이었다. 무력으로 얻은 왕조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1. 권력의 천부적 정당성 확보
2. 백성의 동의 획득
3. 지식과 사상, 신앙 세계의 유효성 회복

1001년에 지방의 서원 등 사학의 합법성을 승인한 것은 중요한 사건이다. 이는 지식 계층이 정치적 합법성에 대한 공인을 획득했음을 뜻한다. 무력을 억제하고 인문을 숭상하는 정책은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 세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고대 중국의 왕권은 일종의 ‘보편황권’(우주왕권)이다. 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선정하여, 그 전통적 철학의 함의를 조심스럽게 재해석하면서, 역사적으로 보이는 일관된 궤적을 묘사하고, 유구한 역사의 윤리적 원칙을 드러냄으로써 현재 국가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왕을 존대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인 ‘존왕양이’를 내세워 ‘중국’과 ‘오랑캐’의 공간적 차이와 문화적 차이를 엄격히 구분했으며, 불교를 제압하는 일에 몰두했다.

지식인들은 사회적 도덕의 상실과 윤리의 붕괴가 국가 권위를 실추시켰다고 보았다. 국가의 합법성과 질서의 합리성을 회복하려면 ‘근본’을 반듯하게 해야 한다. 근본이란 일찍이 고대 학자들이 ‘도’라고 부른 것이고 후대의 학자들이 ‘리’라고 한 그것이다. 현실을 초월하는 ‘리’는 현실 속에 있는 모든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지식을 다시 정리하였다. 부국이나 강병과는 거리가 먼 고원한 이상주의를 견지한 ‘도학’(이학)이 중국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다. 이러한 사조는 당나라 중기 한유 이래의 생각을 계승한 것이다. 한유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성된 공자-맹자-한유의 진리 계보가 반복되었고, ‘가짜가 점점 진짜가 되듯’ 새로운 사상의 역사가 서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러한 이상주의 사조가 정치적 변두리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도학과 통치는 별개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1절. 낙양과 변량: 문화 중심과 정치 중심의 분리

1060년대 말에서 1070년대까지 정치적 수도였던 변량에서 실용적 정책이 수행되고 있었을 때, 문화의 중심지였던 낙양에서는 권력에서 멀어진 고급 사대부들이 모여들었다. 고대 중국 역사에서 이렇게 정치 중심과 문화 중심이 현저히 분리되었던 현상은 아주 드물다. 신종과 왕안석이 추진한 변법은 온화한 문화적 보수주의를 옹호하고 고도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표방했던 사대부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도통과 정통 사이의 분리가 있다. 실용성을 갖춘 현실적 사상 경향(정통)은 사대부들에게 그저 ‘관리’의 역할을 담당할 뿐 ‘스승’의 존엄(도통)은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각 지방에 토대를 둔 사대부들에게는 1.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 증대, 2. 자유로운 토론 환경 등 언론 공간 확보, 3. 국가와 개인을 잇는 ‘향신’ 계급의 성장 등 유리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경제적 기반을 갖춘 이들 계급은 급진적 개혁에 결코 찬동할 수 없었다. 반면 왕안석은 도덕을 하나로 만들어 천하의 풍속을 통일하고자 했다.

당나라 지식인들은 9세기 ‘도통’이라는 허구를 만들어 역사를 새롭게 서술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에 합법성과 합리성을 부여했다. 재해석된 ‘성정’설은 새로운 사상 기초를 찾아주었다. 당나라 시대 지식인들의 ‘도통’, ‘성정’, ‘고문’ 등에 대한 새로운 서술이 송나라 지식인들의 사고의 출발점이 되었다. 황권이 팽창하는 상황에서 사대부들은 세력이 약해져 권력의 외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목표와 초점을 ‘국가 권위’에서 ‘사상 질서’로 전환했다. 그들은 낙양을 중심으로 신앙과 지식 세계를 중건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국가 권위를 높이고 사회 질서를 중건한다는 ‘존왕양이’를 기본 태도로삼되, 이에 더하여 이치를 밝히고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명리변성’을 사상의 더 중요한 기초로 삼았다. 정치에 대한 극단적 불만은, 사대부들로 하여금 사회 규범에 불과했던 윤리를 관습을 뛰어넘는 초월적 지위로 올리도록 했다.

사대부의 도전 세력은 1) [왕안석등이 추진한] 실용주의 사조, 2) 이단 학설의 흥기 등이었다. 따라서 모든 문제를 포괄하고 그것을 해석해 낼 수 있는 궁극적 관념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절실했다. 천지 만물 배후의 더 초월적인 실재를 찾아 신앙세계를 중건하고자 했다. 사물의 이치에 관한 학문 외에 본성과 천명에 관한 학문을 궁리했다. 그들은 실용적 지식으로 사용되던 오행 이론을 성리설적 의미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지식과 사상을 궁극의 본원처까지 끌어올려 지식과 사상의 합리성의 근거를 묻는 것은 송나라 사대부들의 사상적 유행이었다. 또 다른 사상적 유행은 궁극 본원인 리의 출처를 외재적 우주로부터 내재하는 인성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리’를 둘러싼 사유 중에 ‘리일분수’(理一分殊), ‘격물궁리’(格物窮理), ‘궁리진성’(窮理盡性)은 서로 연결되는 핵심 개념이다. 이는 <화엄경>의 이사무애(理事無碍), 유여경등(有如鏡燈), 중중무진(重重無盡) 등의 개념을 차용하여 도덕 개념으로 새로이 해석한 것이다. 리일분수란 ‘리’는 하나지만 여럿으로 나뉘어 달라진다는 뜻으로, ‘격물궁리’(사물을 연구하여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들이 말하는 ‘격물’에는 심리적 전제, 즉 ‘정심성의’(正心誠意)가 깔려있다. 즉, 격물의 궁극적 목적은 도덕적 고양이다. 따라서 지식은 결국 도덕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사유를 함축하고, 이로써 지식의 독립적 영역과 의의를 잃게 만들었다. 학문의 궁극 목표를 ‘궁리진성’이라 하여 ‘리’의 의미는 점차 내재하는 도덕과 윤리 측면으로 집중되었으니, 이를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아완성을 위해 자신을 만드는 공부)이라고 부른다.

송나라 유자들은 ‘도’, ‘리’, ‘심’, ‘성’의 관념 체계를 새롭게 확립해 갔는데, 그 핵심은 과거 합리성의 궁극적 근거를 ‘하늘’에서 ‘인간’으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리일분수’를 통해 궁극 진리와 일반 지식을 분별하였고, ‘격물궁리’를 통해 지식과 사상을 획득하는 길을 규정했으며, ‘궁리진성’을 통해 내재하는 초월적 사상 경향을 확립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는 시종 근본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개인이 ‘가정’이나 ‘국가’등 사회 활동 속에서 인가를 확보하지 못하면 그가 ‘진실’이나 ‘선함’을 지닌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사회 영역과 자연 영역의 경계를 서로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2절. 이학의 연속: 주희와 육구연의 논변과 그 주변

주희가 널리 배운 뒤에 집약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육구령과 육구연 형제는 먼저 인간의 본심을 밝히고 나서 널리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희와 육구연 간의 논변은 이학의 균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상사의 관점에서 이러한 균열은 이학 내분의 서로 다른 사유 방식이 각기 성숙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리에 관한 학설은 아직 변두리에 머물렀지만, 이 학설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인쇄술과 교통의 발달, 토론 분위기의 형성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식은 경전 주석의 방식으로 학습되고 강습과 토론 형식을 빌려 전파되었다. 남송 시기에 서원은 강서, 호남, 절강, 복건 지역에서만도 250여 곳이 된다. 당시에 공부하는 이들은 2-3만 명은 되었을 것이다. 남송 이학은 민간 지식계에서는 이미 여론 권력을 쥐고 있었으나, 정치 영역에서는 시종 발언권을 지니지 못했다.

주희는 경전 주석, 역사 재구성, 사상 세속화라는 노력으로 ‘도통’을 확립하려 했다. 소위 ‘계통’이란 일종의 허구적 역사 계보다. 맹자의 의의를 두고 논쟁이 심했다. 주희는 <근사록>을 편집하여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어록을 선택하여 수록했다. 주돈이를 이학의 시발로, 이정 형제를 이학의 정종으로, 장재를 이학의 보충적 지위로 삼아 사상적 계보를 확립했다. 주희에 따르면 <근사록>은 사서로 가는 계단이고, 사서는 진리의 최종적 텍스트인 육경으로 가는 계단이다. <사서장구집주>는 수백 년 동안 규정된 교과서로써 과거시험을 통해 고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주희는 사상의 구체화와 세속화 노력으로 원래 상층 지식인들에게 속해 있던 도덕과 윤리 원칙을 점점 일반 백성들의 생활 세계에 불어 넣었다. 초월적 원칙이 일상생활 속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주희의 저작은 <가례>다. 주자는 일상생활 속의 중요한 단계인 출생, 혼례, 상례, 제사 같은 것들을 모두 유학이 지도하는 영역 속으로 편입하고자 했다.

송나라 때 신유학의 새로운 경향은, 국가의 질서나 생활 준칙 수립에 만족하지 않고 질서와 준칙의 보편성과 절대성의 최종 근거를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모든 현상 세계를 포괄하는 본원은 사유의 시발점이 되고 탐색의 종점이 된다. 주희는 북송 유자들의 ‘리일분수’ 사유 방식을 다시 끌어들인다. 현상 세계에 있는 것들은 하나에 근본하지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수많은 것들이 모두 각자 적절하게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사물들 속에서 절대적이고 동일한 ‘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격물치지 혹은 ‘즉물궁리’다.

주희는 시종 마음의 함양을 지식인의 궁극적 목적으로 생각했다. ‘격물치지’에서 ‘지’의 최종적 모습은 도덕의 이상적 경지다. 그가 말하는 ‘박람반관’(넓게 보고 반성적으로 관찰)의 관찰 대상 역시 내재적 심성의 본원이다. 본성, 마음, 감정, 욕망을 주희의 관점으로 보면, “마음을 물에 비유하자면 본성은 물의 이치다. 본성이 확립된 것은 물의 고요함이고, 본성이 행해지는 것은 물의 움직임이다. 욕망이란 물이 흘러가 넘치는 것이다.” “미발은 본성이고 이발은 마음이다.” 본성은 인간이 하늘한테서 부여받은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리’에 부합하는 미발의 상태다. 이발의 마음은 각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모습의 인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리가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라면, 시공간 속에서 사는 사람들로서 그들이 지닌 이 ‘마음’은 결코 순수와 절대에 온전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에서 리로 가는 근거가 불충분하다.

공리와 실용을 추구하는 사조는 이학을 위협했다. 지나치게 현실과 결과만 추구하는 풍조는 진리의 초월성과 독립성을 해친다. 주희는 ‘삼강오륜의 정도’를 확립하고, 모든 지식인들의 마음속에 ‘오로지 진정한 유가의 도로 자신을 검속하는’ 정신을 확립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실과 괴리된 초월적 기준은 유연성이 부족했다. 한편 육구연은 내면의 초월을 주장했다. 일체의 가능성이 외부가 아닌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육구연이 보기에 주희의 ‘격물치지’는 지나치게 산만하고 번잡한 것이었다. 육구연은 맹자의 ‘진심’, 즉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 중하다고 보았다. 주희는 지식을 천대하고, 불교와 도교의 분위기가 짙은 육구연의 이론이 매우 허망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육구연 등이 주장한 심학과 주희가 주장한 도학도 근본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다. 뒷날 왕양명 이래 그 구분이 사라졌다.

격물치지와 같은 사유 방식은 지식 영역의 문제를 모두 인격 함양과 마음의 경지 문제로 귀결시켰다. 학술의 궁극적 의의를 ‘위기’ 즉 자신의 내면적 성숙에 두었다. 육구연이 기여한 바는 이학 세계에서 ‘마음’의 의의를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육구연이 지식을 초월하는 진리 체험을 강조할 때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보편적 진리 존재가 상정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진리의 보편주의적 사유 방식은 현재 역사와 현실 권력을 경시하게 만들 수 있다. 또 여타 문명에서 온 지식과 사상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없어진다. 이는 나중에 중국이 ‘세계’와 만났을 때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상적 자원이 되었다. 지식인 계층이 팽창하고 전파 수단이 발달하며 대가족 내의 교육이 확대되고 담론 공간이 확보되면서 이학자들의 영향력은 확대됐다. 제도적 교육과 인재 선발의 통로가 되어 권력의 중심으로 진입하자, 이학의 본질 역시 조금씩 변질돼 갔다.

3절. 국가와 신사의 지지를 토대로 한 문명 확장: 송대 중국 생활윤리의 동일화 확립

관방 측과 신사 측이 ‘엄격한 금지’와 ‘교육을 통한 장려’, 이 두 수단을 활용하여 문명을 확장해 간 과정은 북송에서 남송까지의 수백 년간 지속되었다. 사인 계층의 대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된 것, 인쇄술이 지식 전파를 쉽게 바꿔놓은 것, 교통 편의가 도시와 향촌 간의 소통을 늘어나도록 한 것 등이 문명화를 촉진했다. ‘하나의 도덕, 하나의 풍속’은 관방과 신사가 다 같이 이야기한 말이다. 황권으로 상징되는 ‘국가’와 신사로 대표되는 ‘사회’는 완전 일치하였다. 따라서 주류 윤리와 사회 질서를 위배하는 이상 활동들은 배척당했다. 중화와 변방을 구분하고, 변방 민족의 문명을 비판한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송나라 사회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신사 계층의 팽창이다. 이들에 의해 ‘문명’의 관념과 규칙이 도시에서 향촌으로, 상층부에서 하층부로, 중심지에서 변방으로 확대됐다. 신사 계층이 넓어짐으로써,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학의 원칙들이 생활 속에 스며들어 규율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것이 이학의 세속화다. 사상은 원칙이 되고, 원칙은 다시 규칙이 된다. 그 규칙이 민중 안에 스며들어 ‘상식’을 형성한다. 국가가 형법에 의거해 민중을 징벌했다면, 신사는 늘 교육을 통해 ‘규훈’을 진행했다. 귀족 풍습이 퇴조하고 평민의 생활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송과 당의 뚜렷한 차이다. 즉, 한족 위주의 중국 문명이 동일화되었다.

4절. 원나라에서 명나라까지: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세계의 일반 상황

비판과 진단의 힘을 갖추고 있는 사상이 일단 시대 사조로 유행하면, 추상적인 교조가 돼버린다. 이학도 마찬가지였다. 원대에 이르러서는 민족적 경계선이 점차 사라지고 문화적 차이도 불분명해져 있었다. 진리가 일단 보편적인 공감을 얻으면, 그리고 유학자가 일단 권력으로부터 존중을 받으면, 특히 유가가 바라고 공감하는 문화 질서가 전면적으로 확립된 상황에서는 그러한 격렬한 민족주의 감정은 종국에는 무마되고 해소된다. 명나라에 이르러, 한족 문명에 속하는 정주이학은 여전히 권력을 쥔 사람들이 합법성과 합리성을 세우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며, 여전히 일반 사인의 권력과 교환하는 데 사용하는 지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