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한센(Valerie Hansen), 류형식 옮김, «실크로드-7개의 도시», 소와당, 2015.

중국의 주요 무역 상대는 로마가 아니라 사마르칸트였다. 사마르칸트는 이란어권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였다.

실크로드에 관한 책들은 대개 유물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지만, 이 책에서는 고문서에 기반을 두고자 한다. ··· 고문서는 의도적으로 집필된 역사서가 아니다. ··· 소소한 개인의 일상이나 단순한 사실 혹은 사건이 우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휴지통에서 꺼낸 정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도 어떤 식으로든 가공하지 않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의 “로드”는 “길”이 아니라 사실은 이동의 범위였고, 거대한 사막과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정표 없는 발자취들이었다. ··· “실크”는 “로드” 못지않은 오해를 담고 있다. 비단은 실크로드의 여러 무역 상품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 어느 무역로에서는 염화암모늄이 최고의 무역 상품으로 등장한다. 염화암모늄은 금속 가공을 위한 용매나 가죽 처리를 위한 약품으로 쓰였다.

“실크로드”라는 명칭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 1877년에서야 리히트호펜 남작이 “실크로드”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 그가 만든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점차적으로 퍼져갔다. … 1948년의 <타임즈 오브 런던>에는 “난로가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퀴즈”란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수록되었다. 실크로드는 “어디에서 어디까지일까요?” 정답은 “중국 국경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유럽까지.” 실크로드란 용어는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무역 및 문화 교류를 뜻하는 용어로 상당히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시작이 되어서 실크로드는 꽤 반듯하고 교통량이 많았던 길로 인식되었지만, 실제로 그러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실크로드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지리적 환경에 걸쳐 있고, 그 중 상당 구간이 안정적이지 못한 길이었다. 서안에서 시작해서 서쪽으로 여행하면 먼저 하서회랑을 지난다. 하서회랑은 남쪽으로 기련산맥과 북쪽으로 몽골 고비 사막 사이에 있는 1,000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다. 감숙성의 오아시스 도시 돈황에 도착하고 나면 여행자들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으로 갈지 남쪽으로 갈지 선택을 해야 한다. 두 갈래 길은 카슈가르에서 다시 만난다. 양쪽 길이 모두 막혀 있다면 지구상 가장 험난한 사막을 중앙으로 가로지르는 수밖에 없다. 돈황을 거치면 신강(新疆), 즉 새로운 영토라고 하는 지역을 만나게 된다. 청나라가 18세기 이 지역을 점령한 뒤로 지역 명칭을 그렇게 불렀다. … 오늘날 신강 지역은 중국 서부의 실크로드 대부분을 포괄하고 있다.

한 사람이 실크로드 전체, 장안에서 사마르칸트까지 3,600킬로미터를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장 유명한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유럽에서 중국까지 전체 경로를 육로로 여행했고, 돌아올 때는 바다로 왔다고 한다. … 대부분 여행자들은 보다 작은 범위 안에서 움직였다. 자신의 고향에서 다음 오아시스까지 갈 뿐 더 이상은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품 무역은 지역 단위로 이루어졌고, 여러 사람을 거쳤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무역의 대부분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실크로드 고문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발굴은 돈황에서 동쪽으로 64킬로미터 떨어진 현천의 중국군 주둔지 유적에서 나왔다. … 35,000점이 넘는 고문서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23,000점은 한자가 적힌 목간이었고, 12,000점은 일정한 크기로 재단된 죽간이었다. … 종이는 기원전 2세기 중국에서 발명되었지만 처음에는 필기 재료가 아니라 포장지로 사용되었다.

현천 고문서는 한 세계 전체를 담고 있다. 그 세계에는 중국 서쪽 변경, 오늘날 카슈가르 인근의 오아시스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 국경 너머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오아시스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중앙아시아 오아시스의 통치자들은 한나라 황제에게 외교 사절단을 파견함으로써 체계화된 교환 체계에 참여했다. … 아쉽게도 유럽 지역에서는 현천 고문서에 비견할 만한 상세한 문서가 발굴된 적이 없다.

종합하자면, 고고학적으로나 문헌학적으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대 로마와 한나라 사이에 접촉이 거의 전무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 2~3세기는 중국과 서양 사이에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접촉이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그리고 11세기 초는 돈황과 호탄에서 발굴된 고문서들의 하한 연대이다.

제1장은 니아와 누란의 유적에서 시작한다. 그 지역 사람들과 중국인, 그리고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간다라 지역에서 온 이주자들 사이의 문화 접촉에 대한 확인가능한 최초의 유물이 그곳에서 대규모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쿠차는 제2장의 주제인데,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불경 번역가인 쿠마라지바(구마라습, 344~413)의 고향이기도 하다. 쿠마라지바는 최초로 불경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중국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 어려서부터 산스크리트어를 배웠고, 포로가 되어 중국에 잡혀간 뒤 17년 동안 중국어를 배웠다.

소그드인들은 실크로드 교역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외국인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많은 소그드인들이 북로에 있는 투르판에 영구정착했다. 투르판 유적은 제3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 640년 당나라 군대가 투르판을 점령한 뒤 모든 주민은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놓였다. 극단적인 건조 기후로 인해 투르판에는 실크로드 사람들의 일상 생활 관련 문서들이 유독 풍성하게 보존되었다.

제4장은 사말르칸트 근처에 있던 소그드인의 고향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그곳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에 속해 있다. … 최근 들어 가장 흥미로운 고고학 발굴은 당나라 수도 장안, 오늘날 서안에 있는 외국인 묘지일 것이다. 장안에 대해서는 제5장에서 다룰 것이다.

돈황 장경동(경전 도서관 동굴)에서 발견된 40,000여 건의 고문서들은 제6장에서 다룰 것이다. … 그 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본인 <금강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 돈황 석굴 벽화는 분명 중국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동시에 가장 규모가 방대한 불교 유적이다. … 돈황의 통치자들은 오아시스 호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호탄에 대해서는 제7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결론>

실크로드는 인류 역사상 교통량이 가장 적었던 길이다. … 그러나 실크로드는 역사를 바꾸었다. … 실크로드는 상업적인 면에서보다는 역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길이었다. 여러 갈래 길의 네트워크는 지구상 가장 유명한 문화의 혈맥이었다.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종교, 예술, 언어, 신기술이 교환되었기 때문이다. … 실크로드는 잘 닦여진 도로가 아니었다. … 실크로드의 역사는 장건의 여행으로부터 시작하곤 한다. 황제가 장건을 파견한 이유는 국방문제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역 때문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 이 책에서 언급된 각각의 실크로드 공동체(니아, 누란, 쿠차, 투르판, 사마르칸트, 장안, 돈황, 호탄)에서 교역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였다. 니아에서 발굴된 3세기와 4세기 카로슈티 문서는 수천 건에 달하지만, “상인”은 딱 한 번 언급될 뿐이었다. … 군사비는 그 지역의 번영을 떠받쳤던 지속적인 재정 지원이었다. 755년의 투르크-소그드 혼혈인 장군 안록산(소그드식 이름은 Rokhshan)의 반란 직후 당나라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한 예산 지원을 중단했고 실크로드 경제는 무너졌다.

무역이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 간의 광범위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피란민이었다. …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나 비단을 직조하는 기술은 중국에서 서쪽으로 전해졌고, 동시에 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중국으로 전해졌다. 떠돌이 예술가들도 이 길을 따라 이동했다.

역사적인 수도 장안은 지금은 서안으로 불리는데 실크로드 예술로 유명하다. 가장 주목되는 발굴은 하가촌의 저장고일 것이다. 그곳에는 중국식과 서양식 모티프가 결합된 아름다운 금그릇 은그릇이 100점이 넘게 들어 있었다.

현장 법사와 같은 불교 승려들은 가장 중요한 번역가였다. 그들은 산스크리트어 같은 낯선 외국어로 된 용어를 중국어로 체계적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서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중국어에는 새로운 어휘가 35,000개 가량 유입되었다. … 돈황에서 발견된 현천 고문서는 기원 전후에 중국과 서역의 통치자들 사이에 정기적인 사신 교환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 실크로드의 최전성기에 중국 사절단은 사마르칸트를 방문했고, 상대측인 소그드인들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갔다.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벽화는 사절단의 모습을 보여주는 최고의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