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ятлана Алексіевіч), 김은혜 옮김, «체르노빌의 목소리», 새잎, 2015(2011).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꿈>을 보면, 일본의 모든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후지산이 붉은 화염에 휩싸이고, 땅 위에 플루토늄, 스트론튬, 세슘 구름이 떠다닌다.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와중에 차를 마시면서 논쟁하고, 싸우고, 키스한다. 보이지 않는 죽음이 그들의 혈관, 뇌, 몸속으로 기어들어간다. 특별한 사람들, 즉 소수의 과학자와 핵 전문가만이 진실을 안다. … 일본에서 지진과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이 영화가 떠올랐다. – 저자 서문.
… 이제 우리에게 질문이 주어졌다. 이 비극은 일본만의 것인가, 아니면 인류 전체의 것인가? 문명의 힘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우리 가치관이 참이라는 확신을 재난이 흔들고 있지 않은가?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 핵의 신화 자체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충격은 빨리 사라졌다. 방사선은 바로 죽이지 않는다. 5년이 지난 후에는 암에 걸려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저자 서문.
사고해체작업 본부에서는 아침 회의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이 일에는 목숨 열 개면 됩니다.” “여기에는 스무 명이 소요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자력이 가장 값싼 에너지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 오늘날 거의 30개국에서 443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 한국에 21기가 있다. … 체르노빌 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벨라루스에는 100년 전 규모 7.0의 지진이 일어난 장소에서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진행 중이다. … 벨라루스 국민은 원전 건설이 두렵지만, 누구도 그들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원전 시공은 러시아가 맡았다. 계약 체결식에서 푸틴은 일본보다 더 안전한 원전을 지을 거라고 말했다. …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 저자 서문.
체르노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선(先)지식이다. 체르노빌로 인해 사람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던 방식과 갈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 책은 체르노빌이 아니라 체르노빌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 나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그리고 지구와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린 우리의 흔적을 다루었다. 나는 일상적인 감정, 생각, 발언을 기록하고 수집한다. 영혼의 일상을 잡으려 노력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 그런데 이곳에는 평범한 것이 하나도 없다. … 예술이 기술로 말미암은 지구의 종말을 아주 많이,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냈지만, 우리의 삶보다는 기이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 9쪽, 저자 독백
… 늙은 양봉가가 이야기를 해줬다. “아침에 정원에 나가보니 익숙했던 소리가 들리지 않았소. 왠지 벌이 한 마리도 없었소. … 나중에야 원전에 사고가 났다고 들었는데, 그 원전이 옆에 있던 거였소. 벌들은 알았는데, 우리는 모른 거지.” … 강가에서 어부들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들이 해준 이야기다. “텔레비전으로 설명을 해주기를 기다렸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얘기해줄 줄 알았어. 그런데 지렁이가, 평범한 지렁이가 땅 깊숙이 들어갔어. 그런데 우리는 모르잖아. 그래서 땅을 파고 또 팠지. 그런데도 지렁이를 한 마리도 못 찾아 고기를 못 잡았지.” - 18쪽, 저자 독백
아직도 우리는 ‘멀다-가깝다’ 또는 ‘우리-남’과 같은 말을 쓴다. 하지만 체르노빌 구름이 나흘 만에 아프리카와 중국에 도착했는데, 체르노빌이 발생한 후에 멀고 가까운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콜럼버스 시대의 지구가 아니다. - 19쪽, 저자 독백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됩니다! 입 맞추면 안 됩니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사선 오염 덩어리입니다.” … 다가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 임신 중이었던 이 여성은 다가가서 입 맞추고, 남편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건강과 아기를 바쳐야 했다. … 한편 죽어가는 남편과 아들의 곁을 지키지 않은 아내와 어머니들을 비난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있는가? 방사성 물질 옆을 지키지 않았던 그들을… 그들의 세상에서는 사랑도 변했다. 죽음도. - 20쪽, 저자 독백
100년 사이에 스탈린의 굴라크와 아우슈비츠가 세워졌다. 체르노빌이 폭발했다. 그리고 뉴욕의 9월이 발생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한 세대 만에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 아버지의 연세는 여든셋인데, 그 모든 것을 겪으셨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 21쪽, 저자 독백
게다가 잘난 과학자 선생이 하나 와서는 땔감도 씻어야 한다고 연설했어. - 59쪽, “산 사람과도 죽은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다”
그 지역을 청소했다. 하루는 지하에서, 하루는 원자로 지붕에서 긁어내고, 벗겨 냈다. 삽을 들고 어디든 갔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황새라고 불렀다. 로봇이 못 견디고 기술이 미쳐가는 곳에서 우리는 일했다. - 111쪽, “군인의 합창”
가는 길에 야생으로 변한 개와 고양이를 보았다. … 동물을 쏴서 죽이라는 명령을 받기까지는 무슨 일인지 몰랐다. - 113쪽, “군인의 합창”
10년이 흘렀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벌써 잊혔을 것이다. - 119쪽, “군인의 합창”
진짜 전쟁이었다. 핵전쟁… 뭐가 무서운지 무섭지 않은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 121쪽, “군인의 합창”
나는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선택할 수만 있다면 평범하게 죽고 싶다. 체르노빌 식 죽음이 아닌 평범한 죽음… 나는 아프가니스탄에도 갔다 왔다. 거기서는 총알로 죽기가 더 쉬웠다. … 로봇이 죽어갔다. 과학자 루카초프가 화성탐험을 위해 만든 그 로봇들이…. 사람을 닮은 일본 로봇도 높은 방사선 수치 때문에 그 속이 다 타버린 것 같았다. 고무옷을 입고 고무장갑을 낀 군인들이 뛰어다녔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정말 작았다. 나는 모든 것을 머리에 새겼다. - 131쪽, “군인의 합창”
갓 태어난 딸은 아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루였다. 온몸이 구멍 하나 없이 다 막힌 상태였고, 열린 것이라곤 눈뿐이었다. … 아이가 눈을 뜨고는 미소를 지었다. … 수술을 몇 번 더 해야만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외국에 가서 수술을 받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남편이 한 달에 120달러밖에 못 버는 상황에서 어디서 수만 달러를 구해오나? 한 교수가 비밀리에 조언을 해줬다. “따님의 병리현상은 학문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외국 병원에 편지를 보내 보세요. 분명히 관심을 보일 겁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냈다. (울음을 참는다) … 나는 울면 안 된다. 문마다 두드렸다. 편지를 보냈다. 실험이 목적이라도 내 딸 좀 봐주세요. - 135쪽, “오래 된 예언”
아직은 모르지만, 언젠가 물어볼 것이다. “왜 나는 사람들이랑 달라요?” “왜 나는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요?” “왜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요?” “왜 모두한테, 나비, 새한테도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는 안 일어나요?” 나는…. 나는 증명해야만 했다. 딸이…. 나는 증명 서류를 받고 싶었다. 딸이 자라서 이 사실을 알도록. 바로 나와 내 남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또 울음을 참는다) 4년을 싸웠다. 의사들과, 공무원들과 싸웠다. 높은 사람들과 면담도 했다. 힘들게 노력했다. 4년 만에 딸이 앓는 무서운 병이 전리 방사선, 저준위 방사선과 관련이 있음을 확증하는 진단서를 받아냈다. 나는 4년 동안 거절당했고, 그들은 내 딸이 소아 장애를 앓고 있다고 주장했다. 소아 장애라니? 내 딸이 앓는 장애는 체르노빌 장애다. - 137쪽, “오래 된 예언”
내 기억으로, 사고 후 며칠 사이 방사능,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게다가 뢴트겐에 대한 책까지 도서관에서 다 사라졌다. 불안감이 조성되는 걸 막기 위한 상부의 명령이라는 소문이 곁들여졌다. 바로 우리의 안녕을 위한 조치라는… 사람들은 인쇄된 글이라면 무조건 믿었지만, 사실 아무도 진실을 찍어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다. … 왜 체르노빌에 대한 글이 없을까? 우리 작가들은 아직도 전쟁과 스탈린의 수용소를 주제로 글을 쓰면서 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 우리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람과 대화할 때 이야기를 들어주면 상대방은 경청해주어 고맙다고 한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들어주어 고맙다고. 자신도 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 140쪽, “달의 풍경”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탈모’라는 말을 배웁니다. 많은 아이들이 대머리기 때문이에요. 머리카락이 없어요. 눈썹도, 속눈썹도… 다들 익숙해졌습니다. … 아이들은 가기 싫어 울어요. 새 학교에서는 놀림을 받습니다. … 병원에 도착해서 보니 엄마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어가고 있었어요. 엄마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얘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여름에 일어나길 바랐어. 여름에는 따뜻하고, 꽃도 피고, 땅이 부드럽잖아. 그런데 지금은 겨울이야. 봄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참아줘.” …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매일 듣습니다. 이들의 원성과 울음소리를… - 177쪽, “무제: 고함”
아이들은 무엇을 봐도 놀라거나 즐거워하지 않아요. 항상 졸리고 피곤해요. 안색이 잿빛이고 창백해요. 놀지도, 장난치지도 않아요. 혹시 싸워서 창문이라도 깨면 선생님들이 기뻐할 정도예요. 아이들을 혼내지도 않아요. 그 아이들은 아이답지 않거든요. 그리고 정말 느리게 자라요. - 180쪽, “두 목소리: 남자와 여자”
나한테 수첩이 하나 있다. 처음부터 기록을 해왔다. 대화, 소문, 농담을 적었다. 가장 흥미롭고 믿을 만한 이야기다. 정확한 흔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신화이다. … 이것은 역사다. - 190쪽, “전혀 낯선 것이 내 속으로 기어들어온다”(영화감독 알렉세이 유리예비치 게르만)
소문: “들었어? 체르노빌 외곽에서 탈영병을 잡았대. 원자로 옆 토굴을 파서 1년이나 살았대… 탈영한 이유가 군대 상사가 죽도록 싫어서였대. 그래서 찾아온 곳이 체르노빌이라니…” / “방사선에 피폭된 사람들을 가둘 수용소를 체르노빌에 건설 중이다. 가둬 놓고 조금 구경하다가 묻을 거라고 한다. … 레닌그라드 포위전 때처럼…” / “머리랑 지느러미가 없는 민물고기가 낚인대. 몸뚱이만 헤엄쳐 다닌대. 이런 비슷한 일이 사람한테도 곧 일어날 거래. 벨라루스인들이 식인종이 될 거래.” - 195쪽, “전혀 낯선 것이 내 속으로 기어들어온다”
우리 머릿속에서 군사적 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 같은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나 1초 만에 재로 변한 사람들의 모습이지만, 평화적 핵은 안전한 전구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세상을 아이처럼 보았다. … 우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체르노빌 후에 더 똑똑해졌다. 성숙했다. 나이를 더 먹었다. … 사람은 영원하지 않지만 고방사능 입자는 죽지 않는다. 사람은 사망 후 1천 년이 지나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불타는 입자’는 계속 살 것이다. 그리고 이 먼지는 또다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 202쪽, “오염된 샌드위치를 먹은 이야기”
한 여자아이가 1986년 가을에 학교에서 단체로 당근을 뽑으러 밭에 간 이야기를 해줬다. 가는 데마다 죽은 쥐가 보였고, 아이들은 웃으면서 그에 대해 논했다. “쥐, 바퀴벌레, 지렁이가 다 죽으면 토끼, 늑대가 죽지. 그 뒤에는 우리가 죽을 거야. 사람이 제일 끝에 죽을 거야.” - 214쪽, “오염된 샌드위치를 먹은 이야기”
적으라, 받아 적으라, 기억에서는 다 지워질 테니. 적어두지 않은 걸 후회한다. - 215쪽, “오염된 샌드위치를 먹은 이야기”
핵폭발의 위험이 존재하던 때가 있었소. 용해된 우라늄과 흑연이 지하수에 들어가지 않도록 원자로 아래에서 지하수를 빼내야 했소. 우라늄과 흑연이 물과 섞이면 임계질량이 형성되기 때문이었소. 폭발력이 3-5메가톤쯤 됐을 것이오. … 원자로 아래에 밤낮으로 터널을 뚫던 400여명의 광부들은 어떻소? … 그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소. 이들이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겠소? 나는 그들이 영웅이라고 생각하오. … 사람들은 사고, 재앙이라고 부르오. 하지만 그건 전쟁이었소. … 원자로 가까이서 일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뇨생식기관에 문제가 생겼소. 남성 기관에… 하지만 이런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소… - 242쪽, “역할과 슈제트에 대한 갈망”
행복한 임산부를 못 본 지 오래됐다. 행복한 엄마를… 꿈 이야기를 한다. 발이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은 꿈, 고슴도치 머리가 달린 강아지를 낳은 꿈… 예전 여자들은 이런 꿈을 안 꿨다. 들어본 적도 없다. 산파 일을 한 지 30년이나 됐지만 들은 적 없다. – 247쪽, “민족의 합창”
우리는 항상 공포 속에 살았고, 공포 가운데 사는 법을 안다. 우리는 그런 환경 속에 산다. 그 부분에서는 우리를 따라올 민족이 없다. - 249쪽, “민족의 합창”
내 아이는 죽은 채로 태어났어요. 손가락도 두 개 모자랐어요. 여자아이였어요. 난 울었어요. 손가락이라도 다 있었더라면… 여자아이잖아요. - 253쪽, “민족의 합창”
사내아이 둘, 애들을 데리고 쉴 새 없이 병원에 간다. … 막내가 교실에 있다. 뛰어도, 놀아도 안 된다. 누가 실수로 치기라도 하면 출혈로 죽을 수가 있다. 혈액병인데 발음하기도 어려운 병명이다. 아들과 같이 병원 침대에 누워서 생각한다. ‘죽겠지.’ 나중에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죽음이 엿들을 수 있다는 걸… . 화장실에서 울었다. 모든 엄마들이 병실이 아니라 화장실, 목욕실에서 울었다. 병실에 돌아올 때는 발랄하게 들어왔다. - 255쪽, “민족의 합창”
나는 소아과 의사다. … 아이들은 암에 걸리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 게 상상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아이들은 병명, 치료 절차, 약 등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안다. 자기들 엄마보다 더 잘 안다…. 병실에서 술래잡기하며 소리친다. “내가 방사선이야! 내가 방사선이야!” 아이들이 죽어갈 때, 마치 놀란 얼굴을 하는 것 같다.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그런 놀란 얼굴을 하고 누워 있다. - 257쪽, “민족의 합창”
한 할머니를 만났어요. / “우리 집 소에서 짠 우유는 마셔도 돼?” / … 준위가 먼저 말했어요. “할머니,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 “벌써 여든이 넘었어. 어쩌면 훨씬 넘었을지도 몰라. 전쟁 때 서류가 다 타버려서 모르거든.”/ “그러면 마셔도 돼요.” - 287쪽, “무서운 일은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러시아인은 언제나 무언가를 믿으려 합니다. 철도, 개구리, 비잔틴 문화, 핵… 그리고 이제는 시장을 믿습니다. - 294쪽, “러시아인은 언제나 무언가 믿으려 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요. 절대로 다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 300쪽, 니나 프로호르비나 리트비나(해체작업자 아내)
우리 연구소 전화는 다 도청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결국 못 참고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내 말 잘 들어.”
“무슨 말이에요?”
“쉿, 조용히. 창문 닫고, 먹을 거는 다 폴리에틸렌 봉지에 집어넣어. 고무장갑 끼고 젖은 수건으로 가능하면 온 집안을 닦아. 그다음에 그 걸레도 봉지에 넣고 어디 멀리 숨겨 놔. 베란다에 말리던 이불은 다시 빨아. 식빵은 사지 마… 물 한 컵에 요오드 두 방울 섞어 마셔. 머리도 감아.” … 아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 만약 KGB 요원도 들었다면, 아마 자신과 가족을 위해 자기도 그 생존법을 메모해뒀을 겁니다. - 303쪽, “한 때 우리가 사랑했던 물리”
다음 날 친구는 떠났지만 우리는 아이들에게 예쁜 옷을 입혀 5월 1일 행진에 나갔어요. 갈 수도, 안 갈 수도 있었죠. … 그런 날에는 당연히 모두 함께 해야만 했어요. - 311쪽, “콜리마,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를 넘어서”
“지원자 일보 전진!”
중대 전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소. 지휘관 앞에는 모니터가 있었고, 전원을 켜니 화면에 원자로 지붕이 나타났소. 흑연 조각과 용해된 아스팔트… 주어진 시간은 45초였소. … 1천 루블의 보상금을 받았소. 그런 거였소. 두려움에 대한 보상은 즉각 주어졌소. 하지만 그리고 죽어가는 거였소. … 지난 휴일에 그를 보러 다녀왔소.
“내 소원이 뭔지 물어봐 줘.”
“뭔데?”
“평범한 죽음….”
- 317쪽, “자유와 평범한 죽음을 꿈꾸다”
얼마 전 내 딸이 말했어요.
“엄마, 내가 못생긴 아이를 낳더라도 나는 걜 사랑할 거야.”
상상이 되세요? 아직 10학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그런 생각을 하더군요. 딸 친구들도 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했어요. 얼마 전 아는 사람이 아들을 낳았어요. 첫 애라 많이 기다리던 아이였어요. 젊고 잘 생긴 부부예요. 그런데 태어난 아기가 입이 귀까지 찢어졌고, 귀는 한쪽밖에 없어요. 요즘은 옛날만큼 그 집에 안 가요. 갈 힘이 없어요. 그런데 딸은 아니에요. 그 집에 자주 가요. 연구하러 가는 건지, 연습하러 가는 건지, 가고 싶어해요.
- 321쪽, “못생겨도 사랑할 아이”
소문은 언제나 진실보다 끔찍해요. 우리 아이들을 보세요. 어디를 가든 버려졌다고 느끼고 있어요. 살아있는 귀신 취급받아요. 웃음거리가 되어요. 한 번은 딸이 여름캠프에 갔는데, 아이들이 무서워서 다가오지 않더래요.
“체르노빌 개똥벌레다! 저 여자애 야광이래.”
정말인지 보려고 밤에 애를 마당으로 불러냈어요. 머리에서 빛이 나는지 보려고. …
너무 많이 말했는데,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묻는다) 식사 준비할까요? 같이 드시겠어요? 아니면 무서우세요? 솔직히 말씀하세요. 이제 섭섭하지도 않아요. 이미 다 겪었어요. … (상 앞에 앉는다. 같이 식사한다.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어제는 밤새도록 울었어요…. 이곳 사람들은 빨리 늙어요. 저는 마흔인데, 예순은 되어 보이죠. 그래서 아가씨들이 시집을 일찍 가요. … 내 영혼을 어떻게 글로 적을 수 있어요? – 322쪽, “못생겨도 사랑할 아이”
어제 전차를 탔다. 소년이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장면을 봤다. 어른이 꾸짖는다.
“네가 늙으면 아무도 양보 안 해줄 거야.”
“나는 안 늙어요.” 소년이 답했다.
“안 늙는다니?”
‘우리는 곧 다 죽어요.”
- 332쪽, “벙어리 군인”
예술은 기억이다. 우리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기억이다. 나는 무섭다. 한 가지가 무섭다. 우리 삶에서 두려움이 사랑을 대신해버릴까 무섭다. – 339쪽, “벙어리 군인”
5년 후, 어린이 갑상샘암 발병이 30배 증가했다. 선천성 기형, 신장과 신장 질환, 소아 당뇨도 많이 늘었다. 10년 후, 벨라루스인의 평균 수명이 55세로 줄었다. 나는 역사를 믿는다. 역사의 심판을 믿는다. 체르노빌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했다. – 367쪽, “한 사람의 거대한 권력”
병원에 입원했어요. 정말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부탁했어요. “엄마, 나 못참겠어요. 그냥 죽여 주세요.” … 할머니가 우리를 지하실에 가뒀어요. 그러면서 무릎 꿇고 기도했어요. 우리한테도 말세니까 기도하라도 했어요. 우리가 죄지어서 하나님이 벌준다고 했어요. 오빠는 여덟 살이었고 나는 여섯 살이었어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생각해봤어요. 오빠는 산딸기 잼이 든 병을 깨뜨렸어요. 나는 새로 산 원피스가 울타리에 껴서 찢어졌는데 엄마한테 말 안 하고 옷장에다 숨겼어요. … 옛날에는 내가 절대로 안 죽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죽을 거라는 거 알아요. – 379쪽, “어린이 합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