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안인희 옮김,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푸른숲, 2015(1998).

세상도, 무대상의 관례도 모르는 스물한 살짜리의 재능으로 비극을 쓰는 것보다 더 부적합한 일은 없었다. – 73쪽

자기 소설에서 찢어낸 넝마조각으로 남의 소설을 깁고, 다시 남의 소설에서 플롯과 상황을 훔쳐내서 자신의 졸작에 이용하곤 하였다. 온갖 종류의 짜깁기를 뻔뻔스럽게 맡았고, 남의 작품을 다림질하고 늘리고 고치고 물들이고 유행에 맞게 뜯어고쳤다. 그는 온갖 것에 다 손을 댔다. 철학, 정치학, 잡담 등 어떤 주문자의 주문에도 잘 맞춰주었고, 재빠라고 능숙하고 뻔뻔스런 숙련공이었으며, 휘파람 한 번에 달려와서 목하 유행중인 온갖 품목들에 겸손한 약삭빠름으로 적응하였다. (…) 이런 진창에서 그런 천재가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문학사상 되풀이될 수 없는 기적의 하나다. 스스로 자기 머리채를 잡아올려서 진흙탕에서 빠져나왔다는 저 뮌히하우젠의 동화처럼 이것은 거의 동화에 가까운 일이다. – 95~96쪽

그렇게 엄청난 실패를 하고 났으니 다른 사람 같으면 항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는 아직도 충분히 강해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 137쪽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그는 셔츠 바람에 옷깃은 풀어헤치고서 기름과 축축한 종이 냄새를 풍기는 뜨거운 작업장에서 스물네 명의 노동자들 사이에 서서 용병대장처럼 싸웠다. (…) 발자크는 이 시기에 자신의 높은 야망에 완전히 작별을 고한 상태였다. (…) 그의 유일한 야망은 인쇄기를 돌아가게 하는 것, 사업을 번창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프랑스 국민의 집과 마음에 프랑스 고전작가들을 들이민다는 어리석은 야망은 이미 사라졌다. 발자크와 바르비예 인쇄소는 전혀 조건 없이 주문에 맞추어서 주문받은 대로 무엇이든 인쇄했다. 인쇄업자 오노레 발자크의 작품 1호는 고귀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장수하기 위한 반단백질 알약 혹은 생명의 알약’이라는 설명서였다. – 142~143쪽

그의 영원한 경쟁자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그는 항복하고 엘바 섬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워털루를 시도하였다. 이전의 경험들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써먹은 방법을 한 번 더 되풀이했다. 이미 파산한 기업을 구하기 위해서 그것을 다시 확장한다는 방법이었다. (…) 발자크의 내면에는 공상가와 나란히 교활한 현실주의자가 숨어 있었다. – 147쪽

현실의 모순과 끈질기게 맞서 싸운 이 고단한 2년은, 전에는 오직 창백하고 삶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을 모방적으로만 묘사하던 낭만주의자에게 일상의 연극을 담은 현실세계를 보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뒷날 그가 말한 것처럼 이 연극 하나하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처럼 감동적이고 나폴레옹의 전투처럼 강력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물질주의 시대에 돈이 가지는 막강하고 악마적인 의미를 체험하였다. (…) 노동자들과 노동을 하고 고리대금업자들과 싸우고 절망적인 경계심을 품고서 물품공급업자들과 거래를 해봄으로써 그는 자신의 동료들인 빅토르 위고, 라마르틴, 알프레드 드 뮈세 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인 맥락과 모순들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이들 다른 작가들은 낭만적인 것, 고귀한 것, 위대한 것만을 추구하였던 반면, 발자크는 인간 속에 감추어진 작지만 잔인한 것, 천박하게 추악한 것, 감추어진 폭력을 보았고 묘사할 수가 있었다. 젊은 이상주의자의 상상력에 현실주의자의 명료함, 사기 당한 자의 의심 등이 덧붙여졌다. 이제 위대함이 그를 자극하지 않고, 낭만적인 장식도 그를 기만하지 못하게 된다. (…) 채무자를 얽어매는 올가미와 빚쟁이들에게서 도망치는 그물의 코를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버는 법과 잃는 법, 소송을 거는 법과 경력을 쌓는 법, 낭비하는 법과 절약하는 법, 다른 사람을 속이는 법과 자신을 속이는 법을 알았다. – 153~154쪽

그가 잃어버린 돈은 자신의 돈이 아니었고 채무 액수가 너무 커서 일생 동안 그에게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 어떤 패배도 그의 원초적인 낙관론을 꺾은 적은 없었다. 다른 허약한 사람이라면 영구히 등뼈를 부러뜨려놓았겠지만 이 의지력의 거인 앞에서는 살갗도 찢어놓지 못했다. – 155쪽

“그가 칼로 시작한 일을 나는 펜으로 완성하련다.”라고 적고 그것을 석고상의 받침대에 붙여놓았다. . (…) 흔들지지 않고 힘을 집중하고 다양한 성향들에 힘을 낭비하지 않아야만 의지력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 – 166쪽

처음으로 그는 경박하고 낯선 문필가들에게서 베긴 프레스코 기법이 아니라,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참된 세부묘사가 위대한 소설에 설득력 있는 생명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 (…) 자신의 첫 작품과 더불어 사실주의자 발자크가 시작된다. – 167쪽

발자크는 내적으로 만족스럽게 여겨질 때까지 원고를 넘겨주지 않았다. . (…) 한때는 싸구려 소설공장이었던 사람이 이제 예술가의 책임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 171쪽

상류층과 하류층, 빈곤과 부, 결핍과 낭비, 천재와 시민계급, 고독의 파리와 살롱의 파리, 돈의 힘과 그 무능력을 뒤섞어서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횡단면으로서의 소설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위대한 관찰자와 날카로운 비판자인 발자크가, 감상적인 낭만주의자 발자크에게 진실성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 178쪽

세계 문학사상 알려진 가장 지치지 않는 노동의 인간인 진짜 발자크를,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사람들인 이들 고즐랑, 베르데, 자넹 등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가 세계에 내줄 수 있는, 하루 중의 단 한 시간’ 동안만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창작에 바쳐진 감추어진 고독의 스물세 시간을 그들을 몰랐다. 그가 사람들 사이로 나가는 것은 감옥 뜰에서 산책해도 좋다고 죄수에게 허락된 반 시간이나 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 (…) 진짜 발자크는 20년 동안 수많은 희곡, 단편소설, 기고문들 말고도 거의 모두 극히 중요한 74개의 소설을 썼고, 이 74개의 소설들 안에서 수많은 풍경들, 집들, 거리들과 2천 명의 인물들을 가진,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바로 그 사람이었다. 발자크는 오직 이 척도로만 측정될 수 있다. 오직 그의 작품에서만 그의 진짜 삶을 인식할 수 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바보로 보였던 사람은 실제로는 시대의 가장 엄격한 예술적 지성이었다. – 235쪽

발자크는 쓰고 또 쓰고 또 쓴다. 휴식 없이 중단 없이. 그의 상상력은 한 번 불붙으면 한없이 불붙어 타오른다. . (…) 불꽃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자기 주변을 집어삼킨다. 섬세한 여성적인 손길에 붙잡힌 펜은 종이 위를 빠르게 날아서 말이 생각을 거의 쫓아갈 수 없을 정도다. 많이 쓰면 쓸수록 발자크는 음절을 더 짧게 만든다. 오직 앞으로 앞으로, 망설이지 말고 중단하지 말고 앞으로. 그는 멈출 수가 없으며, 내면의 환상을 중단시킬 수가 없다. . (…) 손이 마비되고 눈에선 눈물이 나오고 등은 아프고 과열된 두 뺨으로 피가 방망이질 치고 신경의 긴장은 풀린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제 중단하고 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중대한 업적을 감사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 이 의지력의 악마는 굽히지 않는다. . (…) 커피는 검은 석유, 그것만이 이 환상적인 작업기계 발자크를 계속 작동하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이 먹는 것보다, 잠보다, 다른 어떤 쾌락보다 중요했던 발자크에게는 그랬다. (…) 9시. 휴식은 끝났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저 일에서 생긴 피로를 푼다.” . (…) 발자크는 계속 일하는 가운데 일의 종류를 바꿈으로써만 자신의 힘을 유지하였다. – 242~2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