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한] George Orwell,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Most people who bother with the matter at all would admit that the English language is in a bad way, but it is generally assumed that we cannot by conscious action do anything about it. Our civilization is decadent and our language must inevitably share in the general collapse. It follows that any struggle against the abuse of language is a sentimental archaism, like preferring candles to electric light or hansom cabs to aeroplanes. Underneath this lies the half-conscious belief that language is a natural growth and not an instrument which we shape for our own purposes.

대다수 사람들은 영어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보통은 의식적으로 우리가 애를 써도 바꾸기 어려울 거라고 여긴다. 우리 문명의 쇠락과 더불어 우리의 언어는 전반적으로 함께 붕괴할 수밖에 없다. 언어 오남용에 맞서는 일은 옛것을 찾는 감상적인 일처럼, 예컨대 전등보다 촛불을 좋아하거나 비행기보다 마차를 좋아하는 일처럼 취급된다. 거기에는 언어란 모름지기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것이지, 우리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갈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는 믿음이 반쯤은 깔려 있다.

Now, it is clear that the decline of a language must ultimately have political and economic causes: it is not due simply to the bad influence of this or that individual writer. But an effect can become a cause, reinforcing the original cause and producing the same effect in an intensified form, and so on indefinitely. A man may take to drink because he feels himself to be a failure, and then fail all the more completely because he drinks. It is rather the same thing that is happening to the English language. It becomes ugly and inaccurate because our thoughts are foolish, but the slovenliness of our language makes it easier for us to have foolish thoughts.

언어의 몰락에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원인이 있음이 명백하다. 즉, 어중이떠중이 작가들이 끼친 나쁜 영향 탓만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원인이 되어 원래 원인을 강화하며, 그래서 결과도 더 나빠지는 무한한 악순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실패했다는 자괴감에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는 바람에 더 철저히 실패하는 식이다. 그와 마찬가지인 일이 영어에서 벌어진다. 우리의 생각이 어리석어 영어가 추해지고 부정확해지는 한편, 영어를 무분별하게 쓰면 우리의 생각 역시 쉽게 어리석어지기 마련이다.

The point is that the process is reversible. Modern English, especially written English, is full of bad habits which spread by imitation and which can be avoided if one is willing to take the necessary trouble. If one gets rid of these habits one can think more clearly, and to think clearly is a necessary first step toward political regeneration: so that the fight against bad English is not frivolous and is not the exclusive concern of professional writers. I will come back to this presently, and I hope that by that time the meaning of what I have said here will have become clearer. Meanwhile, here are five specimens of the English language as it is now habitually written.

요점은 그 과정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영어, 특히 문어는 나쁜 습관으로 가득차 있고 그걸 모방한 표현이 널리 퍼지고 있는데, 번거로움을 감수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습관을 없애기만 하면 더 또렷이 생각할 수 있고, 또렷이 생각하는 건 정치 개혁을 향한 첫 필수 단계다. 나쁜 영어에 맞서 싸우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며, 직업 작가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나는 이 문제를 곧 다시 다룰 것이며, 그때는 내 말의 의도가 더 뚜렷해지기를 바란다. 그 중간에 요새 습관처럼 쓰이는 나쁜 영어 표현의 견본 다섯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 Each of these passages has faults of its own, but, quite apart from avoidable ugliness, two qualities are common to all of them. The first is staleness of imagery; the other is lack of precision. The writer either has a meaning and cannot express it, or he inadvertently says something else, or he is almost indifferent as to whether his words mean anything or not. This mixture of vagueness and sheer incompetence is the most marked characteristic of modern English prose, and especially of any kind of political writing.

이 글들에는 저마다 오류가 있는데, 피해야 할 지저분한 표현을 쓴다는 점은 제쳐두고서도 공통적인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표현(구상)이 상투적이고, 둘째는 정확성이 부족하다. 저렇게 글을 쓰는 사람은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자기가 쓰는 단어가 무슨 뜻을 지녔는지 신경도 거의 안 쓴다. 제대로 표현할 능력이 없어 애매모호하게 뒤죽박죽 쓰는 건 현대 영어 산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며, 정치적 글쓰기에서 유독 심각하다.

As soon as certain topics are raised, the concrete melts into the abstract and no one seems able to think of turns of speech that are not hackneyed: prose consists less and less of words chosen for the sake of their meaning, and more and more of phrases tacked together like the sections of a prefabricated hen-house. (···) the normal way of coining a new word is to use Latin or Greek root with the appropriate affix and, where necessary, the size formation. It is often easier to make up words of this kind than to think up the English words that will cover one’s meaning. The result, in general, is an increase in slovenliness and vagueness.

어떤 주제가 제기되면 어김없이 구체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에 녹아버리고, 진부하지 않은 말투로 표현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뜻에 적합한 단어는 산문에서 점점 사라지고, 조악한 조립식 주택처럼 이어붙이는 구절은 점점 늘어난다. (···)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손쉬운 방법은 라틴어나 그리스어의 어근에 접사를 붙여, 필요에 따라 길이를 조절하면서 그럴싸한 파생어를 만드는 것이다. 어떤 뜻을 아우르는 영어 단어를 궁리하여 쓰는 일보다는 이런 식으로 단어를 만드는 일이 더 쉬운 법이다. 그 결과 문장은 더 지저분해지고 더 막연해진다.

(···) Many political words are similarly abused. The word Fascism has now no meaning except in so far as it signifies ‘something not desirable’. The words democracy, socialism, freedom, patriotic, realistic, justice have each of them several different meanings which cannot be reconciled with one another. In the case of a word like democracy, not only is there no agreed definition, but the attempt to make one is resisted from all sides. It is almost universally felt that when we call a country democratic we are praising it: consequently the defenders of every kind of regime claim that it is a democracy, and fear that they might have to stop using that word if it were tied down to any one meaning. (···) Other words used in variable meanings, in most cases more or less dishonestly, are: class, totalitarian, science, progressive, reactionary, bourgeois, equality.

여러 정치적 언사들도 마찬가지로 오용된다. 파시즘이라는 말은 이제 ‘뭔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으로 마구 쓰인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유, 애국, 현실적, 정의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상이한 뜻을 함께 지닌 단어들이다. 민주주의 같은 말은 한 가지로 딱 정의할 수 없는 것임에도, 새로 규정하고자 시도하면 사방에서 저항에 부딪히기 십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나라를 민주적이라고 부르면 누구든 어김없이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모든 정체의 옹호자들은 자기 체제가 민주적이라고 주장하는데, 민주주의라는 말이 어떤 뜻으로 정확히 규정되는 바람에 민주적이라는 말을 더는 이용하지 못할까봐 걱정한다. (···) 다양한 뜻을 지닌 말 중에 속이려는 목적으로 주로 쓰이는 것들이 있다. 계급, 전체주의적, 과학, 진보적, 반동적, 부르주아, 평등.

(···) modern writing at its worst does not consist in picking out words for the sake of their meaning and inventing images in order to make the meaning clearer. It consists in gumming together long strips of words which have already been set in order by someone else, and making the results presentable by sheer humbug. The attraction of this way of writing is that it is easy. It is easier — even quicker, once you have the habit — to say In my opinion it is not an unjustifiable assumption that than to say I think. If you use ready-made phrases, you not only don’t have to hunt about for the words.

요즘의 나쁜 글은 뜻을 잘 표현하려고 단어를 고르거나 뜻을 더 뚜렷하게 전달하려고 참신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들어놓은 단어들을 덕지덕지 이어붙여서 속임수처럼 표현한다. 그런 식으로 쓰는 것에 끌리는 건 쉽기 때문이다. ‘나는 ~라고 생각한다’라고 쓰는 것보다는 ‘내 견해로는 ~이 부당한 가정은 아닌 듯하다’라고 쓰는 편이 쉽고, 일단 습관이 되면 더 잽싸진다. 이미 만들어진 어구를 쓰면 단어를 찾느라 애쓸 필요도 없다.

(···) By using stale metaphors, similes, and idioms, you save much mental effort, at the cost of leaving your meaning vague, not only for your reader but for yourself. (…) A scrupulous writer, in every sentence that he writes, will ask himself at least four questions, thus: What am I trying to say? What words will express it? What image or idiom will make it clearer? Is this image fresh enough to have an effect? And he will probably ask himself two more: Could I put it more shortly? Have I said anything that is avoidably ugly?

(중략) 낡아빠진 직유나 은유, 관용구를 쓰면 정신의 수고야 덜 수 있겠지만, 여러분의 독자뿐 아니라 여러분 자신도 문장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섬세한 작가라면, 자신이 쓰는 모든 문장에 적어도 네 가지 질문을 스스로 던질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무슨 단어로 그것을 표현할 것인가? 어떤 이미지와 관용어를 쓰면 뜻이 더 뚜렷해지는가? 이 이미지는 충분히 효과를 낼 만큼 참신한가? 아울러 두 가지 사항을 자신에게 더 물어볼 것이다. 더 간결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까? 꼴사나운 부분을 고칠 여지는 없는가?

But you are not obliged to go to all this trouble. You can shirk it by simply throwing your mind open and letting the ready-made phrases come crowding in. They will construct your sentences for you — even think your thoughts for you, to a certain extent — and at need they will perform the important service of partially concealing your meaning even from yourself. It is at this point that the special connection between politics and the debasement of language becomes clear. In our time it is broadly true that political writing is bad writing. Where it is not true, it will generally be found that the writer is some kind of rebel, expressing his private opinions and not a ‘party line’. Orthodoxy, of whatever colour, seems to demand a lifeless, imitative style. (···) In our time, political speech and writing are largely the defence of the indefensible.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수고를 반드시 감내해야 할 필요가 없으므로, 정신을 놓고 이미 사용되는 관용어들이 밀려들기만을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용구들이 여러분의 문장을 대신 만들어줄 것이며, 심지어 여러분의 생각을 어느 정도 대신하기도 할 것이다. 또 필요하다면 여러분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부분적으로 은폐하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할 것이다. 언어의 타락과 정치 사이의 특별한 연관성이 뚜렷해지는 지점이다. 우리 시대에 정치적 글은 대체로 나쁜 글이다. 예외가 있다면, 글쓴이가 반골 기질이 있어서 ‘당의 노선’과 다르게 자기 견해를 표현할 때다. 색깔이 어떻든, 이른바 정설이라는 건 활기를 잃은 모방적 문체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 우리 시대에 정치적 언사는 옹호할 수 없는 것을 옹호할 때만 쓰이는 것 같다.

(…) But if thought corrupts language, language can also corrupt thought. (…) What is above all needed is to let the meaning choose the word, and not the other way around.

(…) 그러나 사고가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역시 사고를 타락시킬 수 있다. (…) 무엇보다 뜻이 단어를 선택하게끔 해야지, 단어가 뜻을 선택하게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


이 글에서 조지 오웰이 용어 오남용의 첫 예로 든 것은 ‘파시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