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브링클리(Alan Brinkley), 황혜성 등 옮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앨런 브링클리(Alan Brinkley), 황혜성 등 옮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1», 휴머니스트, 2011(2005).
1498년 세 번째 항해 때에는 드디어 아메리카 대륙 본토에 도착했고, 남아메리카의 북쪽 해안을 따라 순항했다. 그런 다음 처음으로 아시아의 일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대륙에 도달한 것임을 깨달았다. – p. 37
··· 중상주의(mercantilism)로 알려진 새로운 경제 개념이 등장했다. 중상주의는, 한 개인이나 나라가 부유해지려면 다른 사람이나 나라를 희생시켜야 하고, 다라서 한 국가가 부유해지려면 다른 나라에 가능한 한 많은 물건을 팔고 적게 사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하는 것이었다. – p. 56
칼뱅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구원 여부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었다. 즉, 사악하거나 쓸모 없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았다는 징표이고, 덕망과 근면, 성공은 은혜의 징표가 될 수 있었다. … 이 새로운 종파가 북유럽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어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s)와 영국의 청교도(Puritans)를 비롯한 여러 칼뱅주의자들이 배출되었다. – p. 57
많은 영국인에게 새로운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는 충분한 개혁이 아니었다. 유럽의 종교개혁에 영향받은 사람들은 교회를 ‘정화’(Purify)할 개혁을 요구했고 그 결과 ‘정화하는 사람들’(Puritans)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 제임스1세가 1603년에 즉위하자, 청교도들의 불만이 증폭되었다. … 제임스1세는 독단적으로 불법적인 세금을 물리고, 영국의 가톨릭 교도들을 두둔해 특허장을 비롯한 많은 혜택을 주었… 17세기 초에는 영국 밖으로 도피처를 모색하는 비국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p. 58
15세기 포르투갈의 항해술은 그야말로 탁월했는데, 이는 모두 탐험의 증진에 생의 대부분을 바친 항해 왕 헨리(Prince Henry the Navigator)의 덕택이었다. 헨리가 사망한 후, 1486년에는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았다. 그리고 1497년에서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까지 항해했다. 그러나 ‘신세계’와 최초로 만난 사람들은 포르투갈인이 아니었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포르투갈에서 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 그는 지구를 실제 크기보다 훨씬 작은 것으로 생각했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서쪽으로 무언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점이다. … 1492년 8월, 콜럼버스는 90명의 선원과 3척의 배 니냐호, 핀타호, 산타마리아호를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대성양을 향해 서진했다. 10주간의 항해 끝에 육지를 발견하고는 아시아의 어느 섬에 도착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바하마 군도의 한 섬에 도착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쿠바에 발을 디뎠을 때에도 중국에 다다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생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끝났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대륙에 자기 이름도 붙이지 못했다. 그 영광은 포르투갈 탐사선의 승객으로 신세계를 탐험하면서 방문한 지역을 생생하게 기술해 아메리카가 새로운 대륙임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피렌체의 상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에게 돌아갔다. … 1513년에 스페인 사람 바스코 데 발보아가 파나마 지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과 중국을 가르는 거대한 대양을 서쪽에서 바라본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스페인이 이 대양에 접근하기 위해 고용한 포르투갈 사람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현재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남아메리카 남단의 해협을 발견하고, 이 사나운 폭풍우 속의 해협을 건너 대양으로 나아가(그는 이 대양이 너무도 평온해 이를 태평양이라고 이름붙였다) 필리핀으로 향했다.
유럽의 질병이 신세계로 유입된 것이야말로 그 교류가 가져온 최초의 가장 심각한 결과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인플루엔자, 홍역, 발진티푸스 그리고 특히 천연두와 같은 질병에 노출된 결과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수백만의 원주민이 사망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백인과 접촉한 이후 수십 년 내에 원주민 전원이 사망하기도 했다. 1490년대에 콜럼버스가 도달했던 히스파니올라에서는 원주민의 수가 약 100만 명에서 500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멕시코 마야 지역에서는 스페인 사람과 처음으로 접촉한 후 수 년 내에 원주민이 95퍼센트나 사망했다. … 원주민의 수가 이토록 감소한 것이 꼭 질병에 노출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고의적으로 원주민 말살 정책을 실행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이 보여준 잔악함은 부분적으로 유럽인이 세계 곳곳에서 행한 전쟁의 무자비함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7세기 초에 네덜란드는 주도적인 교역 국가의 하나였다. 1609년, 네덜란드인에게 고용된 한 영국인 탐험가 헨리 허드슨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는 뉴욕 주의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 탐험으로 네덜란드인이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 1624년에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허드슨 강, 델라웨어 강, 코네티컷 강에 잇달아 영구적인 교역소들을 설치하면서 이곳이 이내 뉴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맨해튼 섬에 들어선 뉴암스테르담이 이 식민지의 중심지였다. … 1664년, 리처드 니콜스가 지휘하는 영국 함대가 네덜란드 식민지인 뉴네덜란드의 수도 뉴암스테르담에 정박해 총독 스토이베산트의 항복을 받아냈다. 1673년에는 네덜란드인이 이곳을 다시 점령하고 … 그러나 1674년에 다시 이곳을 빼앗겨서 영원히 잃게 되었다. 요크 공작은 이제 자신의 영지가 된 이곳을 뉴욕(New York)이라고 개명했다.
제임스 2세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친구들을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회가 법원에 전제권을 휘두르며 자신의 동지인 가톨릭 교도를 고위 관직에 임명했기 때문에 영국 내에서도 막강한 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1688년경에는 왕을 지지하는 신민들을 찾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의회는 제임스의 딸인 프로테스탄트 교도 메리 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네덜란드의 통치자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 of Orange)을 초대해 왕좌를 넘겼다. … 이 무혈혁명의 결과, 윌리엄과 메리가 영국을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제임스 2세의 폐위 소식을 들은 보스턴 식민지인은 곧 뉴잉글랜드의 인기 없은 총독 안드로스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영국의 새로운 통치자는 뉴잉글랜드령을 철회하고 독립된 식민지 정부를 복원시켰다.
식민지인은 대각성 운동으로 커다란 문화적 변화를 경험했다. … 계몽사상은 17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위대한 과학적·지적 발견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발견이란 바로 자연의 운행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의 발견이다. 이 새로운 과학 지식으로 많은 사상가가 인간 이성의 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단지 신앙만이 아니라 합리적 사고도 이 세상에 진보를 가져올 수 있으며 지식을 고양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 식민지의 계몽사상은 주로 17세기 초 …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과 존 로크, 암스테르담의 바루흐 스피노자,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페인, 토머스 제퍼슨 같은 식민지인이 계몽사상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 성경을 제외하면 연감(almanacs)이 식민지 시기에 가장 많이 유포되고 읽혀 큰 시장을 형성한 간행물이다. … 연감은 의학 상식, 항해 및 농사 정보, 실용 지식, 유머, 미래 예측 등을 담고 있었다. … 인쇄물에 세금을 부과한 1765년의 인지세법(Stamp Act)이 그렇게 커다란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도, 당시 인쇄술이 이미 식민지인의 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7, 18세기의 아메리카 식민지인은, 다른 분야에서처럼 법과 정치에서도 구세계의 제도와 관행을 신세계에서 재창조하고 있다고 믿었다. … 식민지의 법 체제는 전해져온 배심원 제도를 포함해 영국식 제도의 본질적 요소를 대부분 채택했다. 그렇지만 재판 절차와 처벌, 범죄의 규정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드러냈다. 예를 들어, 공무원에 대한 서면 공격이 영국에서는 그 내용이 사실이든 허위이든 상관없이 명예훼손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1734년에서 1735년까지 열린 뉴욕 출판업자 존 피터 젱어에 대한 재판에서, 법정은 정부에 대한 비판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는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 평결로 식민지에서는 출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그렌빌 내각은 … 식민지에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려고 애썼다. 영국 정규군을 식민지에 영구 주둔시켰고, 1765년의 반란법으로 식민지인에게 군대 주둔에 필요한 숙식 제공을 요구했다. … 1764년에는 설탕법을 제정해 설탕에 대한 관세는 높인 반면 당밀에 대한 관세는 낮추었다. … 화폐법을 제정해 식민지 의회의 지폐 발행을 금지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765년에 제정된 인지세법으로, 이는 식민지에서 발행되는 모든 문서, 즉 신문, 달력, 팸플릿, 증서, 유언장, 면허증 등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영국 관리는 … 이전보다 매년 10배가 넘는 세입을 거두어들이게 되었다. … 1765년 여름에는, 식민지 곳곳에서 군중이 인지세법에 항거해 봉기했다. 이 중 보스턴에서 일어난 봉기가 가장 규모가 컸다. 1773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영국에서는 팔 수 없는 많은 양의 차를 재고로 안고 있어 파산 직전에 놓였다.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를 구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773년에 차 세법을 통과시켜, 동인도 회사에 정규 세금을 내지 않고도 식민지에 직접 수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 식민지 상인이 차 세법에 분노했다. … 중요한 점은 이 법으로 대표 없는 과세 문제에 대한 식민지인의 예민한 감정이 되살아났다는 점이다.
앨런 브링클리(Alan Brinkley), 황혜성 등 옮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2», 휴머니스트, 2011(2005).
‘명백한 운명론’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국민주의를 특징짓는 자부심의 성장과 당시 개혁의 열기를 크게 자극했던 ‘오나전한 사회’라는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신과 역사에 대해 방대한 땅 너머로 나라의 경계를 확장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생각에 기반한 것이었다. ‘명백한 운명론’은, 1840년대에 ‘저가 신문(penny press)’의 발행으로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신문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나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 p. 71
미국은 1820년대에 두 번이나 멕시코에 텍사스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멕시코가 완강히 거부했다. … 1830년대 중반에는 이미 멕시코 정부와 미국인 정착민 사이에 갈등이 커지고 있었다. … 1836년에는 미국인 정착민이 과감하게 텍시코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 잭슨 대통령은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거대한 주가 연방에 더해질 경우 지역 갈등이 가중될 것이라고 우려해 텍사스의 가입을 막았고, 1837년까지는 이 새로운 공화국을 인정하는 일조차 유보했다. 미국에게 퇴짜맞은 텍사스는 외톨이가 되었다. – p. 73
1848년 1월, …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한 작은 언덕에서 금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 소식은 몇 달이 안 돼 미국 전역, 나아가 전 세계에 퍼졌고 삽시간에 수십만 명이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밀려들었다. 골드러시가 절정에 달할 무렵 캘리포니아는 거의 광적인 흥분과 탐욕에 가까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극서부로 향하는 이주민은 대개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세밀한 준비를 하게 마련이지만, ‘49년에 온 사람(forty-niner)’이라는 명칭의 캘리포니아 이주민은 달랐다. 그들은 농장과 직업, 집과 가족을 버려둔 채 우르르 배에 올랐고 육로로 몰려들었다. 49년에 온 사람 대부분(약 95퍼센트)은 남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캘리포니아에 건설한 사회는 여성과 아이, 곧 가족이 없어 매우 불안정하고 변동이 심했다. … 캘리포니아는 금을 둘러싼 갈등과 인종 및 종족 간 갈등이 교차하는, 매우 혼란스러운 곳이 되었다. – p.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