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거자오광(葛兆光), 오만종 등 옮김, «중국사상사2», 일빛, 2015(2015).

제2편

서언: 이학 탄생 전야의 중국

혼란하기 그지없던 오대십국의 정국은 송나라의 약진으로 960년경 거의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전연지맹(요-송 조약)에서 정강지변(후금의 북송 정복)까지 송나라는 한 번도 천하를 밝게 비춘 적이 없었다. 밖을 다스릴 힘이 미약했던 송나라는 외부 세력들을 미개한 오랑캐라 칭하며 내부 안정에만 골몰할 뿐이었다. 무력으로 얻은 왕조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1. 권력의 천부적 정당성 확보
2. 백성의 동의 획득
3. 지식과 사상, 신앙 세계의 유효성 회복

1001년에 지방의 서원 등 사학의 합법성을 승인한 것은 중요한 사건이다. 이는 지식 계층이 정치적 합법성에 대한 공인을 획득했음을 뜻한다. 무력을 억제하고 인문을 숭상하는 정책은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 세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고대 중국의 왕권은 일종의 ‘보편황권’(우주왕권)이다. 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선정하여, 그 전통적 철학의 함의를 조심스럽게 재해석하면서, 역사적으로 보이는 일관된 궤적을 묘사하고, 유구한 역사의 윤리적 원칙을 드러냄으로써 현재 국가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왕을 존대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인 ‘존왕양이’를 내세워 ‘중국’과 ‘오랑캐’의 공간적 차이와 문화적 차이를 엄격히 구분했으며, 불교를 제압하는 일에 몰두했다.

지식인들은 사회적 도덕의 상실과 윤리의 붕괴가 국가 권위를 실추시켰다고 보았다. 국가의 합법성과 질서의 합리성을 회복하려면 ‘근본’을 반듯하게 해야 한다. 근본이란 일찍이 고대 학자들이 ‘도’라고 부른 것이고 후대의 학자들이 ‘리’라고 한 그것이다. 현실을 초월하는 ‘리’는 현실 속에 있는 모든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지식을 다시 정리하였다. 부국이나 강병과는 거리가 먼 고원한 이상주의를 견지한 ‘도학’(이학)이 중국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다. 이러한 사조는 당나라 중기 한유 이래의 생각을 계승한 것이다. 한유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성된 공자-맹자-한유의 진리 계보가 반복되었고, ‘가짜가 점점 진짜가 되듯’ 새로운 사상의 역사가 서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러한 이상주의 사조가 정치적 변두리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도학과 통치는 별개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1절. 낙양과 변량: 문화 중심과 정치 중심의 분리

1060년대 말에서 1070년대까지 정치적 수도였던 변량에서 실용적 정책이 수행되고 있었을 때, 문화의 중심지였던 낙양에서는 권력에서 멀어진 고급 사대부들이 모여들었다. 고대 중국 역사에서 이렇게 정치 중심과 문화 중심이 현저히 분리되었던 현상은 아주 드물다. 신종과 왕안석이 추진한 변법은 온화한 문화적 보수주의를 옹호하고 고도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표방했던 사대부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도통과 정통 사이의 분리가 있다. 실용성을 갖춘 현실적 사상 경향(정통)은 사대부들에게 그저 ‘관리’의 역할을 담당할 뿐 ‘스승’의 존엄(도통)은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각 지방에 토대를 둔 사대부들에게는 1.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 증대, 2. 자유로운 토론 환경 등 언론 공간 확보, 3. 국가와 개인을 잇는 ‘향신’ 계급의 성장 등 유리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경제적 기반을 갖춘 이들 계급은 급진적 개혁에 결코 찬동할 수 없었다. 반면 왕안석은 도덕을 하나로 만들어 천하의 풍속을 통일하고자 했다.

당나라 지식인들은 9세기 ‘도통’이라는 허구를 만들어 역사를 새롭게 서술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에 합법성과 합리성을 부여했다. 재해석된 ‘성정’설은 새로운 사상 기초를 찾아주었다. 당나라 시대 지식인들의 ‘도통’, ‘성정’, ‘고문’ 등에 대한 새로운 서술이 송나라 지식인들의 사고의 출발점이 되었다. 황권이 팽창하는 상황에서 사대부들은 세력이 약해져 권력의 외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목표와 초점을 ‘국가 권위’에서 ‘사상 질서’로 전환했다. 그들은 낙양을 중심으로 신앙과 지식 세계를 중건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국가 권위를 높이고 사회 질서를 중건한다는 ‘존왕양이’를 기본 태도로삼되, 이에 더하여 이치를 밝히고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명리변성’을 사상의 더 중요한 기초로 삼았다. 정치에 대한 극단적 불만은, 사대부들로 하여금 사회 규범에 불과했던 윤리를 관습을 뛰어넘는 초월적 지위로 올리도록 했다.

사대부의 도전 세력은 1) [왕안석등이 추진한] 실용주의 사조, 2) 이단 학설의 흥기 등이었다. 따라서 모든 문제를 포괄하고 그것을 해석해 낼 수 있는 궁극적 관념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절실했다. 천지 만물 배후의 더 초월적인 실재를 찾아 신앙세계를 중건하고자 했다. 사물의 이치에 관한 학문 외에 본성과 천명에 관한 학문을 궁리했다. 그들은 실용적 지식으로 사용되던 오행 이론을 성리설적 의미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지식과 사상을 궁극의 본원처까지 끌어올려 지식과 사상의 합리성의 근거를 묻는 것은 송나라 사대부들의 사상적 유행이었다. 또 다른 사상적 유행은 궁극 본원인 리의 출처를 외재적 우주로부터 내재하는 인성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리’를 둘러싼 사유 중에 ‘리일분수’(理一分殊), ‘격물궁리’(格物窮理), ‘궁리진성’(窮理盡性)은 서로 연결되는 핵심 개념이다. 이는 <화엄경>의 이사무애(理事無碍), 유여경등(有如鏡燈), 중중무진(重重無盡) 등의 개념을 차용하여 도덕 개념으로 새로이 해석한 것이다. 리일분수란 ‘리’는 하나지만 여럿으로 나뉘어 달라진다는 뜻으로, ‘격물궁리’(사물을 연구하여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들이 말하는 ‘격물’에는 심리적 전제, 즉 ‘정심성의’(正心誠意)가 깔려있다. 즉, 격물의 궁극적 목적은 도덕적 고양이다. 따라서 지식은 결국 도덕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사유를 함축하고, 이로써 지식의 독립적 영역과 의의를 잃게 만들었다. 학문의 궁극 목표를 ‘궁리진성’이라 하여 ‘리’의 의미는 점차 내재하는 도덕과 윤리 측면으로 집중되었으니, 이를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아완성을 위해 자신을 만드는 공부)이라고 부른다.

송나라 유자들은 ‘도’, ‘리’, ‘심’, ‘성’의 관념 체계를 새롭게 확립해 갔는데, 그 핵심은 과거 합리성의 궁극적 근거를 ‘하늘’에서 ‘인간’으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리일분수’를 통해 궁극 진리와 일반 지식을 분별하였고, ‘격물궁리’를 통해 지식과 사상을 획득하는 길을 규정했으며, ‘궁리진성’을 통해 내재하는 초월적 사상 경향을 확립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는 시종 근본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개인이 ‘가정’이나 ‘국가’등 사회 활동 속에서 인가를 확보하지 못하면 그가 ‘진실’이나 ‘선함’을 지닌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사회 영역과 자연 영역의 경계를 서로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2절. 이학의 연속: 주희와 육구연의 논변과 그 주변

주희가 널리 배운 뒤에 집약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육구령과 육구연 형제는 먼저 인간의 본심을 밝히고 나서 널리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희와 육구연 간의 논변은 이학의 균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상사의 관점에서 이러한 균열은 이학 내분의 서로 다른 사유 방식이 각기 성숙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리에 관한 학설은 아직 변두리에 머물렀지만, 이 학설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인쇄술과 교통의 발달, 토론 분위기의 형성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식은 경전 주석의 방식으로 학습되고 강습과 토론 형식을 빌려 전파되었다. 남송 시기에 서원은 강서, 호남, 절강, 복건 지역에서만도 250여 곳이 된다. 당시에 공부하는 이들은 2-3만 명은 되었을 것이다. 남송 이학은 민간 지식계에서는 이미 여론 권력을 쥐고 있었으나, 정치 영역에서는 시종 발언권을 지니지 못했다.

주희는 경전 주석, 역사 재구성, 사상 세속화라는 노력으로 ‘도통’을 확립하려 했다. 소위 ‘계통’이란 일종의 허구적 역사 계보다. 맹자의 의의를 두고 논쟁이 심했다. 주희는 <근사록>을 편집하여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어록을 선택하여 수록했다. 주돈이를 이학의 시발로, 이정 형제를 이학의 정종으로, 장재를 이학의 보충적 지위로 삼아 사상적 계보를 확립했다. 주희에 따르면 <근사록>은 사서로 가는 계단이고, 사서는 진리의 최종적 텍스트인 육경으로 가는 계단이다. <사서장구집주>는 수백 년 동안 규정된 교과서로써 과거시험을 통해 고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주희는 사상의 구체화와 세속화 노력으로 원래 상층 지식인들에게 속해 있던 도덕과 윤리 원칙을 점점 일반 백성들의 생활 세계에 불어 넣었다. 초월적 원칙이 일상생활 속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주희의 저작은 <가례>다. 주자는 일상생활 속의 중요한 단계인 출생, 혼례, 상례, 제사 같은 것들을 모두 유학이 지도하는 영역 속으로 편입하고자 했다.

송나라 때 신유학의 새로운 경향은, 국가의 질서나 생활 준칙 수립에 만족하지 않고 질서와 준칙의 보편성과 절대성의 최종 근거를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모든 현상 세계를 포괄하는 본원은 사유의 시발점이 되고 탐색의 종점이 된다. 주희는 북송 유자들의 ‘리일분수’ 사유 방식을 다시 끌어들인다. 현상 세계에 있는 것들은 하나에 근본하지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수많은 것들이 모두 각자 적절하게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사물들 속에서 절대적이고 동일한 ‘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격물치지 혹은 ‘즉물궁리’다.

주희는 시종 마음의 함양을 지식인의 궁극적 목적으로 생각했다. ‘격물치지’에서 ‘지’의 최종적 모습은 도덕의 이상적 경지다. 그가 말하는 ‘박람반관’(넓게 보고 반성적으로 관찰)의 관찰 대상 역시 내재적 심성의 본원이다. 본성, 마음, 감정, 욕망을 주희의 관점으로 보면, “마음을 물에 비유하자면 본성은 물의 이치다. 본성이 확립된 것은 물의 고요함이고, 본성이 행해지는 것은 물의 움직임이다. 욕망이란 물이 흘러가 넘치는 것이다.” “미발은 본성이고 이발은 마음이다.” 본성은 인간이 하늘한테서 부여받은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리’에 부합하는 미발의 상태다. 이발의 마음은 각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모습의 인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리가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라면, 시공간 속에서 사는 사람들로서 그들이 지닌 이 ‘마음’은 결코 순수와 절대에 온전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에서 리로 가는 근거가 불충분하다.

공리와 실용을 추구하는 사조는 이학을 위협했다. 지나치게 현실과 결과만 추구하는 풍조는 진리의 초월성과 독립성을 해친다. 주희는 ‘삼강오륜의 정도’를 확립하고, 모든 지식인들의 마음속에 ‘오로지 진정한 유가의 도로 자신을 검속하는’ 정신을 확립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실과 괴리된 초월적 기준은 유연성이 부족했다. 한편 육구연은 내면의 초월을 주장했다. 일체의 가능성이 외부가 아닌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육구연이 보기에 주희의 ‘격물치지’는 지나치게 산만하고 번잡한 것이었다. 육구연은 맹자의 ‘진심’, 즉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 중하다고 보았다. 주희는 지식을 천대하고, 불교와 도교의 분위기가 짙은 육구연의 이론이 매우 허망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육구연 등이 주장한 심학과 주희가 주장한 도학도 근본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다. 뒷날 왕양명 이래 그 구분이 사라졌다.

격물치지와 같은 사유 방식은 지식 영역의 문제를 모두 인격 함양과 마음의 경지 문제로 귀결시켰다. 학술의 궁극적 의의를 ‘위기’ 즉 자신의 내면적 성숙에 두었다. 육구연이 기여한 바는 이학 세계에서 ‘마음’의 의의를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육구연이 지식을 초월하는 진리 체험을 강조할 때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보편적 진리 존재가 상정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진리의 보편주의적 사유 방식은 현재 역사와 현실 권력을 경시하게 만들 수 있다. 또 여타 문명에서 온 지식과 사상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없어진다. 이는 나중에 중국이 ‘세계’와 만났을 때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상적 자원이 되었다. 지식인 계층이 팽창하고 전파 수단이 발달하며 대가족 내의 교육이 확대되고 담론 공간이 확보되면서 이학자들의 영향력은 확대됐다. 제도적 교육과 인재 선발의 통로가 되어 권력의 중심으로 진입하자, 이학의 본질 역시 조금씩 변질돼 갔다.

3절. 국가와 신사의 지지를 토대로 한 문명 확장: 송대 중국 생활윤리의 동일화 확립

관방 측과 신사 측이 ‘엄격한 금지’와 ‘교육을 통한 장려’, 이 두 수단을 활용하여 문명을 확장해 간 과정은 북송에서 남송까지의 수백 년간 지속되었다. 사인 계층의 대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된 것, 인쇄술이 지식 전파를 쉽게 바꿔놓은 것, 교통 편의가 도시와 향촌 간의 소통을 늘어나도록 한 것 등이 문명화를 촉진했다. ‘하나의 도덕, 하나의 풍속’은 관방과 신사가 다 같이 이야기한 말이다. 황권으로 상징되는 ‘국가’와 신사로 대표되는 ‘사회’는 완전 일치하였다. 따라서 주류 윤리와 사회 질서를 위배하는 이상 활동들은 배척당했다. 중화와 변방을 구분하고, 변방 민족의 문명을 비판한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송나라 사회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신사 계층의 팽창이다. 이들에 의해 ‘문명’의 관념과 규칙이 도시에서 향촌으로, 상층부에서 하층부로, 중심지에서 변방으로 확대됐다. 신사 계층이 넓어짐으로써,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학의 원칙들이 생활 속에 스며들어 규율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것이 이학의 세속화다. 사상은 원칙이 되고, 원칙은 다시 규칙이 된다. 그 규칙이 민중 안에 스며들어 ‘상식’을 형성한다. 국가가 형법에 의거해 민중을 징벌했다면, 신사는 늘 교육을 통해 ‘규훈’을 진행했다. 귀족 풍습이 퇴조하고 평민의 생활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송과 당의 뚜렷한 차이다. 즉, 한족 위주의 중국 문명이 동일화되었다.

4절. 원나라에서 명나라까지: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세계의 일반 상황

비판과 진단의 힘을 갖추고 있는 사상이 일단 시대 사조로 유행하면, 추상적인 교조가 돼버린다. 이학도 마찬가지였다. 원대에 이르러서는 민족적 경계선이 점차 사라지고 문화적 차이도 불분명해져 있었다. 진리가 일단 보편적인 공감을 얻으면, 그리고 유학자가 일단 권력으로부터 존중을 받으면, 특히 유가가 바라고 공감하는 문화 질서가 전면적으로 확립된 상황에서는 그러한 격렬한 민족주의 감정은 종국에는 무마되고 해소된다. 명나라에 이르러, 한족 문명에 속하는 정주이학은 여전히 권력을 쥔 사람들이 합법성과 합리성을 세우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며, 여전히 일반 사인의 권력과 교환하는 데 사용하는 지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