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이애숙(옮김), «오키나와 노트», 삼천리, 2012.

… 후루켄 소켄 시가 일본청년관에서 급사했다. 일본청년관은 그가 평생을 바친 오키나와 반환운동의 거점이었다. … 소켄 씨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그의 분노를 공유하기 위한 노력으로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의식 있는 오키나와 현민의 분노이다. – 8

… <오카와의 복수>에 나오는 대사, “죽는 순간까지 이게 마음에 걸려 죽을 수가 없어”를 환기시키는, 죽은 자의 참담한 분노를 공유하면서 소켄 씨를 애도할 뿐이다. – 16

‘나는 왜 오키나와에 가는가?’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너는 왜 오키나와에 오는가?’라고 거절하는 오키나와의 목소리와 겹치며 언제나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 오키나와 여행으로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들의 더 없는 친절함과 공존하는 단호한 거절이 있기에 참으로 난처하다. – 18

나는 예전에 미국에서 핵전략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상한 경험이 떠올랐다. 그는 연필로 극동 지역의 지도를 그렸다. 그런데 일본열도가 오키나와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칠 만큼 작았다. 생각해보면 핵전략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너무나 자연스런 지도였을 뿐이다. 핵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희생과 차별의 총량에서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아니 그보다도 더 크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 33

내 사고방식이나 감각의 저변에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위험하고 깊숙한 늪으로 들어가는 염세적인 경향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와 동시에 마치 균형을 이루듯이 백과사전파적인 것에 도달하고 싶어 하는 생각과 감각 그리고 자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설명하는 태도를 생존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것은 모호한 말이나 막연한 말이 암시하는 상황 때문에 고통받는 것보다 명료하고 분명하게 확인하는 편이 대처하기 쉽다는 예측이다. 또 흐릿한 어둠 속의 어떤 현실을 또렷이 인식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이미 찾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태도이다. – 49

그런데 일본 본토보다 좁고, 중국 대륙에 더 가깝고, 섬 전체가 노출된 오키나와가 핵기지로서 위협 확산에 그토록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걸 생각하면 악몽 같은 이미지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오키나와에 핵기지를 두고 상대를 위협하는 백악관이나 펜타곤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오키나와 민중은 보복 핵공격으로 섬멸당할 사람들이다. 상대국의 정치 지도자와 군부의 상상 속에서도, 오키나와 민중이 궤멸되는 상황을 작은 희생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배치한 핵무기가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상황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야만 노출된 작은 섬의 핵기지가 협박의 무기, 공포의 핵심으로 실재하게 된다. – 60

샌프란시스코조약 제3조로 오키나와를 인신공양하고, 오키나와 민중을 핵무기 공포 확산의 희생양,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침묵의 희생양으로 꽁꽁 묶어 놓은 본토 정부가 지금껏 보여 준 태도가 바로 그 증거이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오키나와 핵기지를 확실하게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지 않다. – 63

시마부쿠로 젠바쓰의 <오키나와 동요집>에는 까마귀에게 “빨리, 숨어!” 하고 소리치는 노래가 있다. 메이지 시대 본토 일본인의 위협 앞에서 오키나와 아이들이 까마귀와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 64

실제 나쁜 짓을 하지 않았을 때 굳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인간에게 만족감을 주는 허세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난 뒤에 후회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우울한 행위이다. – 83

나는 오키나와를 기준으로 삼아 일본인으로서 자기 검증을 하기 위해서 이 노트를 썼다. 하지만 점점 논리적으로 완결시켜 끝마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 ‘유약한’ 내가 물러서지 못하도록 옆에서 채찍질 하는 글을 적어 두고 싶다. –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