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Πλάτων), 박종현 옮김, «국가», 서광사, 2011(1997).
어저께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피레우스로 내려갔었네. (327a)
“시가에 밝은 사람이 시가 기법에 의해서 사람들을 비시가적이게끔 만들 수 있을까요? … “그런데도 올바른 사람이 올바름에 의해 사람들을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로 만들 수 있겠소? 요컨대, 훌륭한 사람이 ‘훌륭함’(덕)에 의해 사람들을 나쁜 사람들로 만들 수 있을까요? / “그야 불가능합니다.” / “차게 하는 것은 열의 기능이 아니라 그 반대되는 것의 기능이라고 나는 생각하니까요.” (335c)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이네. 훌륭한 사람들이 정착 통치를 맡게 될 때는, 그런 벌을 두려워해서 맡는 것으로 내겐 보이네. (347c)
“이상한 비유와 이상한 죄수들을 말씀하시는군요.”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일세.” (515a)
그가 높은 곳의 것들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이 필요하다고 하는 생각하네. (516a)
“… 이런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서 이전의 같은 자리에 앉는다면, … 갑작스레 햇빛에서 벗어놔왔으므로, 그의 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게 되지 않겠는가?” … “… 어둠에 익숙해지는 이 시간이 아주 짧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는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에 대해서,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기들을 풀어 주고서는 위로 인도해 가려고 꾀하는 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를 죽여 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516e~517a)
“… 이것의 전환περιαγωγή에는 방책τέχνη이 있음직하네. … 이는 그것에다 보는 능력을 생기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능력을 지니고는 있되, 바르게 방향이 잡히지도 않았지만, 보아야 할 곳을 보지도 않는 자에게 그러도록 해 주게 될 방책일세.” (518d)
“… 밤과도 같은 낮에서, 진짜 낮으로 향하는 ‘혼의 전환’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이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실재로 향한 등정일 것 같으이.” (521c)
“… ‘변증술적 논변’이 끝을 맺어 줄 바로 그 ‘본 악곡’이 아니겠는가? … 누군가가 ‘변증술적 논변’에 의해서 일체의 감각을 쓰지 않고서 ‘이성적 논의’를 통해서 … ‘좋은 것 자체’를 ‘지성에 의한 이해 자체’에 의해서 파악하게 되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을 때, 그는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의 바로 그 끝에 이르게 되네. 마치 동굴을 벗어난 그 죄수가 그때 ‘가시적인 것’의 끝에 이르렀듯 말일세.” (532a)
“… 변증술적 탐구 방법만이 이런 식으로, 즉 가정들을 폐기하고서,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원리 자체로 나아가네.” (533d)
“… 스무 살이 된 자들 중에서 … 본성에 대한 ‘포괄적인 봄’을 갖도록 해야만 되네.” … “… 그것은 변증술적 자질인지 아닌지에 대한 최대의 시험이 되기도 한다네. ‘포괄적으로 보는 사람’은 ‘변증술에 능한’ 자이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이가 아니기 때문일세.” (537c)
“… 그리하여 ‘좋음 자체’를 일단 보게 되면, 이들은 그것을 본으로 삼고서, 저마다 여생 동안 번갈아 가면서 나라와 개개인들 그리고 자신들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만 하네.” (540a)
만약에 우리가 혼이 불사한 것이며 모든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견디어 낼 수 있다고 믿고서 내 주장에 설득된다면, 우리는 언제나 그 윗길을 가며 모든 면에서 분별을 갖고 올바름을 수행할 것이니,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도 그리고 신들과도 친구이기 위해서일세. … 그리하여 이승에서도 그리고 앞서 우리가 말한 그 천 년 동안의 여정에서도 우리는 잘 지내게 될 걸세. (621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