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리안 마리아스(Julián Marías), 강유원·박수민 옮김,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유유, 2016 .

철학은 철학사이다. 이 언명은 철학의 정체성이 철학의 역사를 통해 드러남을 의미한다. 철학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끊임없이 자각적으로 반성해온 유일한 학문인 것이다. 지성을 통해 세계를 파악하고 활동하는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역사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나듯이, 철학의 본질은 철학의 역사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 역자 서문

훌리안 마리아스의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는 엄밀하게는 존재론의 역사다. 이 책은 철학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관념이자 토대가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철학자들은 ‘존재의 수수께끼’라는 주요 문제를 제시하고 그 해결을 반복한다. 사물이란 무엇인가, 사물에 관한 우리의 앎은 참된 것인가, 실체란 무엇인가, 하나와 여럿은 어떻게 공존하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과 신의 관계의 특성은 무엇인가, 생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존재 양상은 어떠한가 등의 존재론적 탐구가 각 철학자의 문제로서, 그리고 이전 단계의 철학과 새로운 단계의 철학을 연관 짓는 형이상학적 매개로서 서술된다. – 역자 서문

파르메니데스의 <자연에 관하여>

이 시는 … 첫째 부분은 진리의 길을 다루었고, 둘째 부분은 의견의 길을 다루었다. – p. 49

… 독사dόxa[의견]의 길이자 필멸자들의 길… 독사는 세상에 관한 견문, 즉 사물들을 토대로 한 견문에 의존한다. 이러한 견문은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 존재는 감각들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누스에 의해 발견된다. … 독사는 누스가 없으므로 … 신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독사는 필멸자들의 것이다. 이는 독사의 기관이 감각적 지각, 아이스테시스aisthēsis이기 때문이다. … 모든 운동과 변화는 노모스nόmos(관습)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사물들에게 부여한 이름들이다. – p. 52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인간에 관한 존재론이다. … 아들 니코마코스가 편집한 것으로 추정되어 그의 이름을 붙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사물들과 인간 활동들의 궁극적인 좋음에 관해 물음을 제기한다. 최고 좋음은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이다. 그렇지만 … 에우다이모니아와 헤도네, 즉 쾌락을 구별했다. … 쾌락은 …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향유일 뿐이다. … 행복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의 측면에서 인간의 활동이 실현한 성과다. 각 사물의 좋음은 자기 고유의 기능이자 존재 방식이며, 동시에 각자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시력은 눈의 좋음이며 걷기는 발의 좋음이다. – p. 145

관상적 삶의 방식은 … 훌륭하다. … 관상적 삶은 가장 지속적인 삶의 방식이다. … 관상적 삶은 가장 자기-충족적인 삶의 형식이다. … 관상적 삶은 그 자체로 추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형식이다. … 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을 불멸화해야 하고, 우리의 현실에서 미미한 부분일지라도 우리 내면에 있는 최상의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 p. 147

스토아 학파에서 철학의 중심은 또다시 인간, 즉 지혜로운 인간이 되었다. … 스토아주의의 진정한 관심사는 도덕성에 관한 물음들뿐이다. … 주된 개념은 … 판타지아 카탈렙시스 phantasia katalepsis(‘직접적인 파악을 전달하는 상상력’)이다. 마음은 ‘상상력’에 도달하기 위해 연상과 비유를 이용한다. – p. 162

스토아주의는 신과 세계를 동일시한다. … 섭리라고도 볼 수 있는 운명의 일반적인 계획에 우연과 인간 자유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다. … 가치판단의 유일한 기준은 모든 것을 한데 묶는 보편적인 신성 법칙이며, 이 법칙은 우리가 자연이라 부르는 것이다. 자연은 … 이 학파의 윤리적 가르침들의 토대다. … 지혜로운 인간은 독립을 쟁취하고, 모든 풍파를 견뎌내는 바위처럼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다. 동시에 지혜로운 인간은 자신의 욕구들을 줄임으로써, 즉 참고 절제함으로써 자기 – 충족성을 획득한다. 지혜로운 인간은 초연함, 평정(아파티아, 아타락시아)을 얻기 위해 그의 모든 열정들을 날려버려야 한다. … 그는 가혹한 고통과 재난의 한가운데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 – p. 163

콩트에 따르면 앎은 인간 종에서뿐 아니라 개별자들에서도 세 가지로 구별되는 이론적 상태들을 거친다. 실증 철학의 기본 명제인 세 가지 상태의 법칙은 앎에 관한 이론이기도 하고 역사 철학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 상태는 각각 신학적 상태, 형이상학적 상태, 실증적 상태라고 불린다. – p. 565

실증적 정신은 상대적이다. 현상에 대한 연구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고 우리의 조직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다. 어떤 감각의 상실 또는 획득은 우리 세계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콩트는 말한다. 우리의 관념들은 현상들이며, 개별적 현상들일 뿐 아니라 사회적 집단적 현상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개별적 사회적 현존의 조건들에 기대며, 그에 따라 역사에 기댄다. 앎은 끊임없이 우리의 필요에 따라 정해진 이상적 한계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 콩트는 관념들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 이런 식으로 역사의 지속성과 사회적 평형에 의해 콩트의 정치적 부속명제, 즉 “질서와 진보”가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콩트가 말하는 도덕-본질적으로 사회적인 도덕-의 책무는 “타인들을 위해 사는 것”이다. – p. 567

콩트는 그가 처음에 사회 물리학사회학이라고 명명했던 사회 과학의 창시자다. 콩트는 집단적 인간에 관한 탐구를 실증적 상태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시 말해서 실증 과학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보다도 이 사회학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해석이다. … 역사의 위대한 주인공은 인류이며, 콩트의 사회학은 종국에는 인류를 거의 신격화하여 종교가 된다. … 예를 들어 ‘인류교’라는 견해다. 인류는 전체적으로 위대한 존재이며, 이는 개인적 삶들의 목표다. 그러므로 도덕은 이타주의이며, 타인들을 위해, 즉 인류를 위해 사는 것이다. – p. 5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