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黃玹),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서해문집, 2016(2006).
梅泉野錄
임금이 즉위한 뒤 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운현궁]을 넓히고 새롭게 했으며, 몇 리나 되는 담장에 네 개의 문을 만들고 궁궐처럼 장엄하게 꾸몄다. – p. 12
시골 사람으로 서울에서 벼슬하던 자들 가운데 양요가 일어나자 달아나는 자들이 잇달았다. 이에 운현이 노하여 <<잠영록>>을 펼쳐 그들의 이름 옆에다 모두 선仙 자를 써놓았으니, 그들이 죽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난리가 평정되자 그들을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다. – p. 38
군정 명부에 오른 자들에게 군역을 베로 대신하게 하면서 폐단이 많아졌다. 이는 약한 백성들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된 반면, 사족들은 한가롭게 노닐며 죽을 때까지 신역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었다. 예전에 이름난 많은 신하들이 이를 반대했지만 관습에 끌려 개혁하지 못했다. – p. 39
민씨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 백성들은 그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도리어 운현의 정치를 그리워했다. 이는 후한 백성들이 슬퍼 탄식하면서 망조 시절을 다시 생각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운현의 어진 덕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 p. 50
흥인군 이최응과 심순택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명관[과거 시험관]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몽매하여 ‘어魚’ 자와 ‘노魯’ 자를 구분하지 못했다. 시권을 대할 때마다 잘되고 못된 것을 분간하지 못했으므로 운이 좋으면 급제하고 그렇지 않으면 떨어졌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이 시험을 주관하면 문장 솜씨가 없는 자들이 모두 좋아했다. – p. 63
요즘 서울 사대부들은 부귀를 누리며 한가롭게 노니느라 평소 붓을 잡지 않고 가난한 선비를 집에 데려다 놓고 양육하다가 과거 시험이 있으면 급히 데리고 들어가 사역을 시켰다. 이때 대신 글 짓는 자를 거벽이라 하고, 대신 글씨 쓰는 자를 사수라 한다. 그들은 드러누워 조보를 들춰 보다가 아무 날에 어떤 과거를 실시한다는 기사만 보면 소리쳤다. / “거벽과 사수는 어디 있느냐?” / 지방 부자들도 이를 따라하니, 글자 한 자 읽지 않아도 시권에 쓰인 것은 모두 훌륭했다. 시관이 아무리 공평하게 채점하더라도 선발한 자들은 모두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 p. 64
6월 10일[갑자]에 난병들이 대궐에 침입하니, 중궁은 밖으로 달아나고 이최응·민겸호·김보현은 모두 살해되었으며 대원군 이하응이 정사를 맡았다. 이날 새벽에 난병이 흥인군의 집을 에워싸니, 이최응이 담장을 타 넘다가 떨어져 불알이 터져 죽었다. … 중궁이 (피난하면서)… 광주를 지나 쉬는데, 어떤 촌 할미가 다가와 보고는 피난 가는 아낙네로 생각하여 떠들며 말했다. / “중전이 음란하여 이런 난리가 일어나 낭자가 여기까지 피난 오게 되었구려.” / 중궁은 말없이 듣기만 했는데, 환궁한 뒤 이 마을을 모두 없앴다. – pp. 80~86
26일에 안중근이 합이빈에서 이등박문을 죽였다. … 이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감히 통쾌하다고 칭찬하지는 못했지만 모두 어깨를 추켜세우고 깊은 방에 앉아 술을 따르며 서로 경하했다. / 이때 이완용, 윤덕영, 조민희, 유길준은 양 궁의 명이라고 속여 대련으로 나아가 조문했다. 임금은 통감부에 나아가 친히 조문했고, 이등박문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제전비로 삼만 원을 부의했고, 유족에게는 십만 원을 주었다. 이학재 등은 이등박문의 송덕비를 세우자고 건의했고, 민영우는 동상을 세우자고 건의했다. 이들이 미치광이처럼 분주하게 돌아다니자 왜놈들이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 p. 435
[1909년] 23일[음력 10월 11일 정사]에 이재명이 이완용을 칼로 찔렀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 p. 439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지만 여태 그러지 못했구나.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어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요사스런 기운이 가려 임금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져 햇살도 더디 드네.
조칙도 이제는 다시 있을 수 없어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가닥을 모두 적시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 버렸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 보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내 일찍이 나라를 버티는 데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으니
겨우 인을 이루었을 뿐 충을 이루진 못했구나.
겨우 윤곡을 따른 데서 그칠 뿐
진동을 못 넘어선 게 부끄럽기만 하구나.
- p. 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