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노 시게키(宇野重規), 신정원 옮김,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교유서가, 2014.
마키아벨리가 이런 논의를 펼친 배경에는, 군주의 지배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며 전통적 도덕을 거슬러서라도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념이 깔려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군주의 이익보다도 질서유지라는 공공의 이익을 강조하는 국가이성론이 싹튼 것이다. – p. 114
··· 홉스는, 자유로운 국가와 개인의 자유 사이에 필연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히려 강력한 주권자 아래에서만 개인은 자유를 안전하게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홉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 중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치를 행할 자유로운 국가에서만 개인 역시 자유로워진다고 여겼다. ··· 내전을 거치면서 잉글랜드 국제는 해체되었고, 정작 질서의 존립 자체가 의문시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연상태란 전쟁상태(“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나 진배없다고 본 토머스 홉스의 정치학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p. 141
이론과 실천의 영역을 구별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홉스는 양자의 구별을 폐기하고 자연과 인간을 가로지는 엄밀한 학문에 근거해 새로운 정치학의 기초를 다지고자 했다. ··· 기존 공동체를 일단 원리적으로 해체한 다음 원자화된 개인에서 출발하여 질서의 재구축을 꾀했던 것이다. ··· 그에게 인간이란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질대사를 하는 하나의 생물일 뿐이었다. ··· 사람에 따라 판단은 달라지며,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p. 145
1680년대의 왕위계승 문제를 통해 잉글랜드에서는 휘그와 토리라는 두 당파가 형성되었다. 왕위계승 문제에 의회가 개입할 수 있다고 여긴 휘그당과 달리, 의회의 간섭을 부정하고 왕의 혈연을 우선시하는 이들이 토리당이라 불리게 된다(훗날의 자유당과 보수당). ··· 휘그당의 영수 샤프츠베리 백작과 인연을 맺으며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인물이 존 로크이다. 찰스 2세가 의회를 해산하고 억압통치를 강화하자 샤프츠베리 백작 등은 쿠데타를 모의하는데, 로크는 이를 옹호하기 위해 <통치론>(1690)을 집필했다. 정부의 권력은 인민에게서 신탁받은 것이며 인민은 부정한 권력에 저항할 권리를 갖는다고 로크는 주장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소유권론을 축으로 인민과 정부의 관계를 체계화하고, 자의적인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로크는 종종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시조라 불리기도 한다. – p. 158
정의를 어디까지나 인공적인 것이라 파악한 흄은, 정의를 유지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정념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나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회를 만들지만, 사회를 꾸려가면서 그에 걸맞은 습관을 형성한다. 소유권 역시 타인의 재산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암묵적 관행’(convention)으로서 형성되었다. 그렇게 해야 사회도 원만하게 유지된다고 생각하고서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 정의이지, 명시적 계약에 따른 것은 아니다. – p. 190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되는 공동체에서는 집단으로서의 인민이 주권자가 되는데, 주권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것과 똑같다. 자신이 그 일원으로서 결정한 규범에 자발적으로 따르는 한, 사람들은 완전히 자유롭고 자율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결합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의 정신적 집합체를 꾸리고, 그렇게 만든 집합체와 완전히 일체화된다. 그 결과 각인은 이제 기존의 특수한 의지가 아닌, 집합체의 공동의 자아가 갖는 일반의지에 복종하게 된다. ··· “일반의지는 언제나 옳으며, 언제나 공공의 이익을 지향한다”고 말한 루소는, 만일 자신의 특수한 의지와 일반의지가 어긋날 일이 생긴다면 일반의지에 대한 복종이 강제되어야 할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 p. 200
인민 주권을 지향한 프랑스 혁명은 왜 공포정치로 빠져들고 말았는가? 이러한 문제를 파고들면서 자유주의자들은 루소에 주목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자유주의자로 뱅자맹 콩스탕(1767~1830)이 있다. ··· 콩스탕은 루소의 문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근대사회에서 고대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식의 시대착오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콩스탕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이가 바로 알렉시 드 토크빌이다. 토크빌은 ‘다수자의 폭정’이나 ‘민주적 전제’ 같은 말을 사용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tyrannie’나 ‘despotisme’의 개념을 군주가 아닌 다수자나 민주주의와 연결한 것이다. 더구나 민주적 사회에서도 개인의 자유가 억압당할 때가 있다. ··· 토크빌은 권력의 집중이 곧 민주주의 사회 고유의 위험성이라 여겼다. – pp. 229~232
··· 밀은 <자유론>(1859)에서 개인에게 자유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나아가 국가나 사회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권력의 한계, 도덕적으로 정당한 한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고찰했다. ···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개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이룰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한 자유를 부정하는 사회에 진보란 있을 수 없다고 밀은 논했던 것이다. ··· ‘다수자의 폭정’을 비판하는 한편, 의견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개인을 예속시키는 사회의 동질화 압력을 고발했다. 또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이 공공의 현안을 익힐 수 있는 정치교육의 효과에도 주목했다. 개인의 자기도야에 의한 능력의 개화에 기대를 품은 것이다. – p.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