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Aριστοτέλης), 강상진 등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길, 2014(2011).
모든 기예(technē)와 탐구(methodos),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 1094a
그러나 우리가 탁월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어려 기예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먼저 발휘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어 봄으로써 배우는 것이니까. 가령 건축가는 집을 지어 봄으로써 건축가가 되며, 기타라 연주자는 기타라를 연주함으로써 기타라 연주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 1103b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행하지 않고 말(logos)로 도피하면서 자신들은 철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런 방식으로 신실한 사람(spoudaios)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태도는 의사의 말을 주의해서 듣기는 하지만, 처방된 바는 전혀 행하지 않는 환자들과 비슷하다. 이런 식으로 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신체가 좋은 상태일 수 없는 것처럼, 이런 방식으로 철학하는 사람들의 영혼 또한 좋은 상태일 수는 없을 것이다. – 1105b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가깝게 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에게도 친구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만약 그래도 친구라면 폴리스 동료 시민으로서의 친구일 뿐이다. – 1171a
… 정치학의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1094b
…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일원리들로부터 출발하는 논의와 제일원리들을 향해 나아가는 논의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 1095a
… 좋음이 어떤 공통적이며 단일한 보편자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 1096a
‘좋음 자체’나 ‘좋음’ 역시 좋음인 한에서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또 좋음 자체가 영원하다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일 수도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하얀 것이라고 해서 잠깐 동안만 하얀 것보다 더 하얀 것이 아니듯이. – 1096b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완전한 좋음은 자족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족성은 자기 혼자만을 위한 자족성,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자족성이 아니다. 부모, 자식,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료 시민들을 위한 자족성이다. – 1197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