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진리와 방법», 문학동네.

원제: Wahrheit und Methode

** 요약

- 존 스튜어트 밀은 귀납법을 인간학에 적용했다.
- 개별을 보편으로 귀속하는 방법은 역사 인식에는 부적합하다.
- 드로이젠은 ‘역사의 정언명법’을 요구한다.
- 딜타이는 ‘정신과학의 독립성’을 주장한다.
- 헤르더에 이르러 ‘인간 형성’(Bildung) 개념이 정립되었다. 생성(werden)에서 존재(Sein)으로 향하는 것은 physis의 지속적 형성과 유사하다. 교양은 곧 역사 보존이 된다.

* 체험 예술의 한계, 알레고리의 권리 회복

이른바 ‘괴테의 세기’(1750~1830)는 체험 예술에 한계를 거의 두지 않았던 천재들의 시대다. 그렇지만 예술과 문학의 전체 역사로 보면 이 시기는 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예술 작품을 진정한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체험의 천재성이 아니라 [괴테의 세기 다음에 이어진, 가령 인상주의처럼] 확고한 형식과 표현 방식의 정교한 구성이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문학과 수사학이 공존했는데 19세기로 접어들며 수사학의 지위가 전락해 버렸다. 천재적 창작 이론이 적용된 필연적 결과다.

상징과 알레고리의 개념사를 추적하며 둘 간의 관계 변화를 살펴 보자. 알레고리는 원래 담화나 ‘로고스’의 영역에 속한다. 그 자체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상징은 로고스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자체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데 재회 때 상대를 알아보기 위한 정표 같은 것이 그 예다. 이 둘은 상이한 영역에 있지만 종교 영역에서 둘 다 애용되면서 의미가 서로 가까워졌다. 알레고리는 배후의 진리를 인식시키려는 신학적 필요에서 생겼다. 신플라톤주의는 상징 개념을 알레고리처럼 사용했다. 감각적인 것은 신적인 것, 즉 참된 것이 유출된 것이라서 위로 고양될 가능성이 있다.

볼 수 있는 대상과 볼 수 없는 의미 사이의 불가분성과, 두 영역의 합치 가능성은 종교 의식의 형식적 기초다. 상징이 감각적인 것과 비감각적인 것의 합치라면, 알레고리는 비감각적인 것에 대한 감각적인 것의 의미 있는 연관이다. 의미가 모호한 상징과 의미를 다 드러내는 알레고리는 대비된다. 상징이 지닌 의미의 무규정성은 계몽 시대 합리주의적 미학이 천재 미학에 굴복된 이유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 59절에서 상징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했다. ‘상징적 표현’이라는 개념을 새로 정립한 것은 칸트 사상의 훌륭한 성과다. [상징은 시공간이라는 직관 형식으로 파악 못하는 이성 영역의 이념을 어느 정도 감성화하여 보여준다. 경험적 사유는 유비적으로 확장되며, 판단력과 이성은 형식상 합치한다. 신에 대한 인식은 상징적일 뿐이다.] 인간적 개념을 신에게서 분리했다. 상징의 이런 역할은 미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의 관계를 기술하는 데도 유효하다. “아름다움은 도덕적 선의 상징이다.” [신의 사랑이다.] 감성적 판단력의 완전한 반성의 자유에 대한 요구, 감상적 판단력의 인간적 의미, 이 둘의 일치는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상이다.

실러와 괴테가 주고받은 편지에 ‘상징’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보편자의 총체성을 자기 안에 포함한 특수자를 가리킨다. 상징은 감각적 현상과 초감각적 의미의 합일이다. 상징은 이념 세계와 감각 세계의 불일치를 쉽게 지양하지 못한다. 상징의 종교적 기능은 이 불일치에 의존하는데, 상징의 의미가 깊을수록 이 불일치는 심화된다. 알레고리는 천재의 일이 아니다. 확고한 전통에 근거하며 오성적 파악에 거슬리지 않는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교리의 통일성이나 성서의 기독교적 해석과 결부되었다. 철학적 미학에서 상징은 인간 정신의 창조물로서 고유한 실증성을 지닌다. 체험 미학의 편견 탓에 절대적 대립처럼 보였던 상징과 알레고리의 관계는 다시 상대화된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이길우 등 옮김, «진리와 방법1», 문학동네, 2012(2010).

자연과학의 귀납적인 방법으로는 사회적·역사적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학문의 단계로 올려놓을 수 없다. … 분명한 것은 역사적 인식이 구체적인 현상을 일반적인 규칙의 사례로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p. 21

독일 고전주의 시대는 문학 및 미학적 비평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줌으로써 바로크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진부한 취미이상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성의 개념, 즉 계몽된 이성의 이상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부여했다. 특히 헤르더는 계몽주의의 완벽주의를 ‘인간 형성’이라는 새로운 이상을 통해 제압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19세기에 역사적 정신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 p. 27

우리에게는 아직도 여전히 괴테의 세기가 동시대인 것으로 여겨지고, 반면에 바로크 시대가 마치 역사적으로 오랜 옛날의 시대처럼 생각되는 이 심대한 정신적 변화가 도대체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 하는 것은 교양의 개념에서 가장 명확하게 느낄 수가 있다. … 우리에게 익숙한 ‘Bildung’(교양)이라는 낱말의 내용에서… ‘자연적 형성’이라는 낡은 개념이 그 당시 거의 완전히 저 새로운 개념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교양은 이제 육성의 개념과 아주 밀접하게 짝을 이루며, 그것은 우선 자신의 자연적 소질과 능력을 계발하는 인간의 독특한 방식을 말한다. – pp. 28-29

… 빌헬름 폰 훔볼트 Wilhelm von Humboldt 는 그의 두드러진 특징인 섬세한 감각에 따라 이미 육성과 교양의 의미를 완전히 구별한다. … 여기에서 교양이란 육성, 말하자면 능력 혹은 재능의 계발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교양이라는 낱말의 이러한 격상은 오히려 고대의 신비주의적 전통을 상기시키는데, 이 전통에 의하면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은 그 형상을 자신의 영혼 안에 지니고 있으며, 그 형상을 자신 안에서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 p. 30

Bildung(교양)이 과정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성 과정의 결과를 말한다는 사실은 이제 생성 werden 에서 존재 Sein 로의 통상적인 전이 현상과 일치한다. … 교양의 결과는 … 지속적인 형성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교양이라는 낱말이 그리스어 physis(자연)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양은 자연처럼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떠한 목표를 알지 못한다. … 교양의 개념은, 비록 타고난 소질의 단순한 육성이라는 개념에서 파생했다 하더라도 이 개념을 능가한다. … 소질의 훈련과 배양은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어학 교재는 단순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 이에 반해 교양에서는 어떤 사람이 형성되게 하는 것 또한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의 것으로 습득되며, 이 점에서 교양이 수용하는 모든 것은 교양과 하나가 된다. – pp. 31-32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임홍배 옮김, «진리와 방법2», 문학동네, 2012.

…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이란 잘못된 이해를 피하는 기술이다”라고 말한다. … “이 소극적인 표현은 해석학의 모든 과제를 내포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과제의 적극적인 해결책을 일체의 교조적·내용적 선입견, 심지어는 해석자 자신의 의식에 배어 있는 선입견까지도 완전히 배제한 문법적·심리적 해석 규칙들의 규범에서 찾는다. – p. 28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이해해야 할 것은 누구나 공유하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개성적 사유이며, 그 개성적 사유는 그 본질상 자유로운 연상이자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인 것이다. – p. 31

해석의 대상은 저자가 자기 작품에 대해 성찰하는 자기해석이 아니라 저자의 무의식적 생각이라는 점에서 저자와 해석자의 대등한 설정이 정당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p. 38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윤리적 인식은 결코 대상적 인식이 아니다. 인식주체는 그저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객관적 사태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 자신이 인식대상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인식대상은 인식주체가 마땅히 행해야 할 당위인 것이다. – p. 203

헤겔 논리학의 주된 관심사인 사유의 총체성은 근대의 ‘방법’인 거대한 독백을 통해 사유의 지속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이다. 그런 근대적 방법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 발언자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사유의 지속성을 부분적으로만 실현하는 셈이 된다. – p. 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