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ятлана Алексіевіч), 박은정 옮김, «아연 소년들», 문학동네, 2017.
어머니들이, 그것도 바로 얼마 전에 아들의 시신이 담긴 차가운 아연관을 붙잡고 몸부림치던 그 어머니들이 학교들과 군사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조국 앞에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고 소년들에게 호소한다. – 25
- 카라반을 기다려요. 한번 매복을 나가면 보통이 이삼일이에요. 뜨거운 모래 속에 누워서, 필요하면 그대로 용변도 봐야 하죠. 그렇게 삼일이 지날 때쯤이면 거의 정신이 나가요. 증오심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서 제일 먼저 나타난 대열에 미친듯이 총질을 하게 되죠. 총격을 마치고, 모든 게 끝난 후에야 깨달아요. 카라반은 그저 바나나와 잼을 운송중이었다는 걸요. 그래서 다 먹어치웠어요. 평생 먹고도 남을 그 많은 양의 단것을요…… – 33
내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일은 늘 그렇듯 딱 한 가지다. 나는 (책에서 책으로 넘어다니며) 필사적으로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린다. 역사를 사람의 크기로 작게 만드는 일. – 38
헬리콥터에 올랐다…… 하늘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수백 개의 아연관들을 보았다. 아연관들은 햇빛을 받아 아름답고도 무섭게 빛났다. – 41
그때 나는 사람을 쏠 준비가 안 된데다, 아직은 평화로운 삶에 더 익숙해 있었어요. … 이삼 주 후면 예전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이름만 남아요. 내가 이제 내가 아닌 거예요. 누군가 다른 사람이죠. 죽어 넘어진 시신을 봐도 더이상 놀라지 않아요. 침착하게 아니면 치미는 짜증을 누르며 생각하죠. ‘어떻게 시신을 암벽 위에서 끌어내나.’ ‘이 더위에 시신을 끌고 몇 킬로미터를 어떻게가나.’ 이미 알거든요. 쏟아져나온 내장이 무더위 속에 얼마나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지, 사람의 대변과 뒤섞인 피냄새가 얼마나 독한지를요. 아무리 씻어내도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는 걸요. – 53
남쪽 바다에 갔다가 봤어요. 젊은이 몇 명이 두 팔로모래 속을 기어서 바다로 향하는데… 그 젊은이들 몇 명을 다 합친 수가 그들 다리를 다 합친 수보다 많더군요… 그리고 나는 더이상 해변에 나가지 않았어요. 거기서 일광욕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거기서 우는 것밖엔 달리 할 게 없었죠… 그래도 그 청년들은 소리 내 웃고 아가씨들과도 어울리고 싶어했어요. 하지만 다들 그들을 피해 달아났죠. – 437
너무 끔찍한 진실이라, 진실이 아니고 거짓 같아요. 그 진실을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드는군요. 그 진실로부터 나를 지키고 싶어져요. – 438
어머니들의 슬픔과 고통 앞에선 어떤 진실도 무색해집니다. … 아이들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성찰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들입니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순교자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으며 우리 모두 이 거짓에 참여했습니다. 제가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전체주의는 무엇이 위험할까요? 전체주의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이 계획한 범죄의 공범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데 그 위험이 있습니다.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도 천진한 사람들과 실제적인 사람들도 모두 다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어머니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들은 지금 여기서 아들들을 지키는 게 아니라고요. 어머니들은 지금 무서운 이념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살인자인 이념을요. 저는 이 말을 오늘 이 재판을 보러 온 아프간 참전 용사들에게도 똑같이 하고 싶습니다. – 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