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兪吉濬), «서유견문»

장인성, «서유견문», 아카넷, 2017.

… 유교패러다임과 근대패러다임이 중첩된 시기였다. … 유학적 언설과 언어는 현실에 대한 해석력이 떨어지고, 막 들어오기 시작한 근대언어들은 아직 현실을 규정하는 힘을 갖지 못하였다. … 현실과 언어가 분리되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유학자들은 집요하게 기존의 유학 언어로 현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 유길준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내거나 언어의 의미를 변용시켜 현실에 대응하였다. – 18

… 유길준은 ‘제도’, ‘규모’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이 말은 현재 통용되는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제도’는 제도(institution)의 뜻도 있지만 규범(norm)이란 뜻에 더 가까웠다. ‘규모’도 지금은 크기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주로 국가의 운용과 관련하여 규범, 제도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하였다. – 20

스코틀랜드 사상가들은 인간이 이성적임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이성적이기 이전에 사회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은 사회질서에 주목하였다. – 29

유길준은 ‘인세’(人世)라는 말로 사회를 묘사하였다. 일본에서는 ’society’의 번역어로 ‘인간교제’, ‘동료집단’ 등 여러 말이 쓰이다가 1870년대 말부터 번역어 ‘사회’가 통용되었다. 유길준도 일본을 통해 ‘사회’ 개념을 인지했을 터다. 하지만 ‘교제’, 특히 ‘인세’(人世)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였다. ‘인세’는 인민이 사회적 관계를 영위하는 세상을 뜻한다. ‘인세’는 사회를 연상시키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근대적 사회현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이 말이 더 유용했을 것이다. – 46

유학은 원래 실학이다. 공맹유학(원시유학)은 실천적인 가르침이다. 주자학(신유학)은 주희의 철학적 해석에 기초한 유학의 특수한 형태다. 조선조 한국에서는 주자학이 정통 유학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유학과 거의 동일시되었다. 조선후기 실학은 주자학의 철학적 해석을 극복하고 유학의 실천적, 실학적 성격을 되찾으려는 사상적 경향이었다. … 실제와 허상의 괴리를 강하게 의식한 것도 실학정신의 표현이다. 1880년대 질서변동 과정에서는 기존의 언어로 새로운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 83

… 언문을 아문(我文)이라 부르고 식자층이 사용한 진문을 한자(漢字)라는 중립적 호칭을 사용한 대목에서도, 유길준의 자주적 언어관과 주체성을 엿볼 수 있다. – 114

유길준의 시선은 천체에서 땅으로, 인간으로 하강한다. 대에서 소로 좁혀진다. 독자들은 지구적 시야에서 인간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얻게 될 것이다. – 142


허경진 옮김, «서유견문», 서해문집, 2013(2004).

… 국한문혼용 저술이니 한문으로 된 저술보다는 쉬울 거라는 생각에서 이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 한문으로 된 책보다 갑절은 더 힘들었다. … 문법이 다르다는 점과 일본식 외래어가 많다는 점 때문이었다. … 그가 이 책을 국한문혼용체로 쓴 까닭은 나라마다 말과 글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이러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 역자 서문

그는 세상이 바뀌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실용적인 과문科文을 이미 버렸듯이, 이제는 한문을 버렸다. …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히려 우리 글자만을 순수하게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고백이 있었기에 그는 청나라를 ‘지나支那’라고 쓸 수 있었다. … “우리 글자만을 순수하게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했는데, 한글 전용을 실천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지만, 아직 일반인들이 개화의 주체로 나설 수 없는 시대적 한계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다. – 역자, <서유견문>에 대하여


… 모스는 뛰어난 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미국 전체를 통하여 학문의 지도자 위치에 있으며, 그의 명성을 온 세계에 떨치는 사람이다. 그는 나에게 공부하는 차례를 일러 주었으며, 학교를 드나드는 데 필요한 여러 규정을 알려 주었다. … 안목을 넓히고 자질을 풍부히 하는 데에 그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 22

우리 글자와 한자를 섞어 쓰고, 문장의 체제는 꾸미지 않았다. 속어를 쓰기에 힘써, 그 뜻을 전달하기를 위주로 하였다. – 25

이 책이 비록 서투르지만 역시 이와 같은 경우다. 산의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산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헛된 영상을 가리킨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근본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 25

책이 완성되고 며칠 뒤에 친구에게 보이고 그에게 비평해 달라고 하자,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참으로 고생하기는 했지만, 우리글과 한자를 섞어 쓴 것이 문장가의 궤도를 벗어났으니, 안목이 있는 사람들에게 비방과 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첫째, 말하고자 하는 뜻을 평이하게 전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니, 글자를 조금만 아는 자라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둘째,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적어서 글 짓는 법이 미숙하기 때문에 기록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셋째, 우리나라 칠서언해의 기사법을 대략 본받아서 상세하고도 분명한 기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 나는 오히려 우리 글자만을 순수하게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 서투르고도 껄끄러운 한자로 얼크러진 글을 지어서 실정을 전하는 데 어긋남이 있기보다는, 유창한 글과 친근한 말을 통하여 사실 그대로의 상황을 힘써 나타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 25

이 책에서 서력의 연월을 쓴 까닭은 그들의 일을 말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연호를 따다가 쓴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498년이 서력 1889년이다. … 지명과 인명의 번역은 중국식과 일본식 표기법이 이미 있다. … 내가 듣고 본 것은 비록 우리나라 소리에 맞지 않아도 그대로 사용했으니, 영길리(英吉利) 및 오지리(墺地利) 따위가 그것이다. 내가 보고 듣지 못한 것은 한자로 우리 소리에 가깝도록 번역하기에 힘썼으니, 희시오(喜時遨) 및 추시이(秋時伊) 따위가 그것이다. – 30

하루 낮과 밤을 24시간으로 나누며, 오전과 오후가 각각 12시간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1시간이 우리나라의 반 시간이다. 한 시간을 60으로 나누어 그 하나를 1분시라고 한다. 또 1분시를 60으로 나누어 그 하나를 1초시라고 한다. … 번역에는 문역과 의역의 구별이 있다. … 의역은 외국의 글자와 우리 글자가 혹시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 말뜻만은 그대로 번역한다. 가령 외국 말에서 ‘남의 눈에 먼지 던지기’(draw the wool over (person’s) eyes.)라는 뜻을 우리 말로는 ‘사람 속이기’라고 번역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책은 의역을 많이 따랐다. – 32

(나는 이 책이) 영원히 전해지기를 바라고 쓴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신문지의 대용품으로 이바지하고자 한 것이다. … 근본되는 뜻의 큰 줄거리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매우 다행이겠다. 그 밖에 제대로 되지 못한 것들은 내 뒤에 올 박식한 사람이 바로잡기를 바라고 기다릴 뿐이다. – 33

나라끼리 교제하는 것도 또한 공법으로 규제하여, 천지에 공평무사한 이치로 한결같이 행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커다란 나라도 한 나라고, 작은 나라도 한 나라인 것이다. … 공법에 통달한 어느 학자가, “속국이라는 말은 오늘날 어울리지 않은 명칭이다”라고 말하였다. … 약소국이 강대국의 사나운 위협과 난폭한 핍박을 못 이겨, 자기 나라를 스스로 보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전에 없었던 속국의 체제를 한때 자인한 적이 있더라도, 이 일 때문에 본래부터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권리를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또 그러한 승인은 합법적인 조처가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백 번 승인하였다 하더라도 한 공법 조항으로 소멸되는 것이다. – 112

천하에 급한 일 가운데 학교를 설치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 – 120

국민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자유와 통의를 말한다. … 통의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당연한 정리(正理)라고 할 수 있다. … 천만 가지 사물이 당연한 이치를 따라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상경을 잃지 않고, 거기에 맞는 직분을 지켜 나아가는 것이 통의의 권리다. … 통의는 인간에게 천연과 인위의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 인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법률을 세우고 그에 따라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것이다. 또 통의를 자세히 논하자면 유계(有係)와 무계의 구별이 있다. 무계의 통의는 한 사람에게만 소속되어 다른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유계의 통의는 세속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사귀어 서로 관계되는 것이다. …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 저마다 사람이 되는 이치를 본다면, 사람 위에도 사람이 없고, 사람 아래에도 사람이 없다. 천자도 사람이고 서민도 또한 사람인 것이다. – 131~137

통의와 자유는 그 조목을 세우기가 아주 어렵지만, 인간과 관계있는 사물에 의거하여 그 두드러진 것만 간단히 들어보자.
1) 신명의 자유와 통의
2) 재산의 자유와 통의
3) 영업의 자유와 통의
4) 집회의 자유와 통의
5) 종교의 자유와 통의
6) 언론의 자유
7) 명예의 통의 – 139~

무릇 사람의 자유와 통의는 천하 사람들에게 보편화되어 있는 권리다. – 152

… 우리나라의 풍속은 도학군자와 문장대가의 고명한 이론과 심원한 저술이 상자에 가득 차고 책상에 흘러 넘쳐도, 저술한 주인이 살아 있을 때에는 거론하지 않는 법이다. 후세 자손을 기다렸다가 비로소 인쇄되기 때문에, 만약 그 자손이 시원치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학문과 심오한 이론이 있더라도 세상에 공표될 수가 없고, 혹시 그 자손 가운데 이러석은 자를 만나면 벽에 도배하거나 시장바닥에 휴지로 써버리기 때문에 한평생 고생한 업적이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 살아 있을 때에 인쇄하여 세상에 공포한다. – 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