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강주헌 옮김, «지중해의 기억», 한길사, 2016(2006).
지중해의 유구한 역사를 곁에서 지켜본 최고의 목격자는 바로 지중해일 것이다. 누구도 이런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중해를 보고 또 보아야만 한다. – 55쪽
평원지대는 발전을 목표로 삼았지만 산악지대는 생존이 목표였다. … 4월이나 5월에 내리는 비는 산악지대에서는 축복의 비였지만, 그즈음이면 밀이 거의 익어가던 평지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 저기압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거나 비스케 만에서 리옹 만까지 발달하면 곧바로 동쪽으로 향하면서 사방에서 바람을 끌어들이며 … 세력을 확대해간다. … 바닷물도 발트 해의 짙은 잿빛을 띠고, 돌풍에 커다란 물보라를 만들어낸다. … 도시들은 빗줄기와 낮은 구름에 뒤덮이면서 엘 그레코가 톨레도를 묘사한 그림에서처럼 극적인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낸다. – 60쪽
우리는 지중해 지역의 삶을 포근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매력적인 풍경에 의한 착각이다. 경작지는 부족한 반면 메마르고 척박한 산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 “뼈는 많지만 고기는 부족한 땅”이다. – 68쪽
지금도 10개, 20개, 아니 100개의 지중해가 있다. … 카디스의 기후는 베이루트의 기후와 비슷하고, 프로방스의 강변은 크림 반도의 남쪽 해안과 비슷하다. 예루살렘 근처 올리브 산(감람산)의 식물군은 시칠리아 섬에서 그대로 발견된다. 그렇지만 실제로 똑같은 방식으로 경작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포도나무 가지를 똑같은 방식으로 묶어주고 기둥을 세우는 곳은 찾아볼 수 없다. 똑같은 포도나무, 똑같은 올리브나무, 똑같은 무화과나무, 똑같은 월계수도 없다. … 지중해는 ‘하나’라는 이미지는 몇 가지 커다란 차이에 의해 여지없이 깨진다. – 70쪽
최근에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최초의 농업, 최초의 가축 사육, 삶의 조건에 대한 최초의 인식, 최초의 도기와 청동기, 최초의 바다 항해는 수메르인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 그보다 4,000년 전 소아시아·팔레스타인·이라크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는 1958년에 발간된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의 저자에게 감히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수메르 문명이 무에서 갑자기 탄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 76쪽
… 모든 고고학자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연대기를 작성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런 꿈을 성취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몇 가지 접근법이 있지만, 그 중 가장 두드러진 방법은 1946년 미국의 화학자 윌리엄 리비가 고안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이다. … 식물과 동물과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일정한 양의 방사성 탄소를 흡수하며, 숨을 거둔 뒤에는 시신에서 그 양이 차차 줄어든다. 따라서 줄어든 양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일종의 소급시계가 된다. – 77쪽
선사시대를 연구한 어느 학자는 인간의 존재를 간단히 이렇게 비유해주었다 – 지구의 생명체가 그 동안 겪어온 생물학적 진화 과정의 모든 과정을 1년이라고 한다면, 즉 1월 1일에 생명체의 첫 징후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인간으로 진화할 최초의 종은 12월 31일 오후 5시 30분에야 나타났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자정에서 20분을 남겨두고 나타났을 것이며, 석기시대부터 우리 시대까지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삶은 1년의 마지막 몇 분에 불과할 것이다. – 79쪽
수메르에서는 기원전 세 번째 천년시대가 끝날 무렵 설형문자가 처음 등장했다. … 당시 수메르에서 사용되던 모든 소리를 옮길 수 있었다. … 기술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집트에서는 첫 왕조 때부터 파피루스의 심으로 만든 종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갈대를 펜으로 사용해서 신속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 … 문자는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수메르에서 발굴된 옛 토판은 대부분 재산목록이거나 회계장부, 분배된 식량의 목록과 여기에 덧붙은 수령자의 서명이다. – 138쪽
… 메소포타미아는 독특한 운명을 가진 문명이었다. 그러나 산악과 사막이라는 바깥세계 탓은 아니었다. 내부세계도 사분오열이 끊이지 않았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 비교할 수 있었다. … 우루크, 우르, 키시, 라르사, 이신, 마리, 아다브, 라가시 등은 원시적인 부족사회에서 발전한 도시였다. … 키시에서 우르로, 다시 우루크, 라가시, 아다브로 패권이 넘어갔다. … 우르가 한동안 주도권을 잡았지만, 곧 이신과 라르사 그리고 결국 바빌론에 패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 151쪽
메소포타미아는 많은 길이 만나는 교차로에 있었다. 이란과 인도양과 경계를 함께하고, 소아시아의 심장부와 만났다. 또한 아슈르의 상인들을 통해 카파도키아와도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활기찬 무역로는 시리아로 향한 길이었다. … 우가리트는 ‘태양이 저무는 윗바다’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아랫바다’와 페르시아 만에 견주어 지중해를 ‘윗바다’라고 불렀다. – 191쪽
에게 해의 동쪽 끝, 즉 소아시아의 고원지대에서 흘러내려온 계곡의 하구에 자리잡은 항구들을 중심으로 한 해안지역은 수천 년 동안 아나톨리아와 에게 해, 그리스를 이어주는 문화교류의 중계지였다. … 트로이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런 중계지의 하나로 활약했다. 그때까지 전설로만 전해지던 지역에서 슐리만은 9층으로 묻힌 도시를 발굴해냈다. – 205쪽
알파벳의 발명은 암흑시대에 있었던 또 하나의 혁명이다. … 기원전 두 번째 천년시대가 끝나기 직전에 혁명적으로 간단한 문자가 태어났다. 우리가 페니키아 문자라고 일컫는 선형의 알파벳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22개의 기호는 오직 자음만을 가리켰으며, 그 자음들은 지금도 셈어의 기본구조를 이룬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 문자를 받아들였지만 그들의 언어를 더 명료하게 표기하려면 모음에 해당하는 기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288쪽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의 경우는 에트루리아인처럼 모호한 존재가 아니다. 페니키아인은 동지중해의 연안지대에 뿌리를 두었고, 그리스인은 에게 해와 그리스 중부의 해양도시 코린토스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 페니키아는 산과 바다 사이에 낀 좁고 긴 땅이었다. … 도시들 간의 교통도 육로보다 해로가 더 편했다. 그런데 이런 항구들은 모두가 독립적인 세계였다. 모든 항구가 갑이나 섬에 위치해서 방어하기 쉬웠고, 등 뒤로는 산이라는 천연의 방어벽이 있었다. 티루스는 지금 충적토로 본토의 한 부분이 되었지만 원래는 좁은 섬에 세워진 도시였다. 이런 입지조건 덕분에 티루스는 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모든 외부공격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었다. … 페니키아인들은 식민지를 개척할 때도 이런 이상적인 지리적 거점을 찾아서, 가능하면 갑이나 섬에 정착했다. – 301쪽
동지중해와 서지중해를 잇는 해로는 대략 세 곳이었다. 첫 번째 해로는 북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길로, 첫 단계가 그리스 본토와 섬들 그리고 케르키라 섬까지였다. … 범선이 순풍을 받으면 하루가 걸리지 않아 오트란토 해협을 가로지를 수 있었고, 그뒤 이탈리아 해안을 따라 메시나 해협까지 항해했다. … 티레니아 해는 그리스 선박들이 서쪽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교차로였다. 남쪽 해로는 이집트에서 리비아까지, 더 나아가서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 해협)까지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가는 길이었다. – 307쪽
지중해는 결코 ‘그리스의 호수’가 아니었다. 기원전 525년 그리스는 이집트를 잃었고, 페르시아의 캄비세스는 나우크라티스에서 교역을 중단시켰다. 기원전 494년에는 그리스의 네트워크에서 중추세력이던 이오니아가 페르시아에 정복되었다. 그뒤 마라톤·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고, 아테네는 상처뿐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가 아니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몰락하면서야 비로소 끝났다고 말할 수 있다. … 지중해는 여전히 분할되어 있었다. … 로마의 완전한 통일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 3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