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카이 토모아키(深井智朗), 홍이표 옮김, «신학을 다시 묻다», 비아, 2018.
… 신학은 분명 ‘교회의 학문’이지만 교회라는 담을 넘어 지속해서 사회의 영향을 받았고 또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신학이라는 학문이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 왔는지, 특히 그 변천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 서문, p. 10
<파우스트>는 파우스트 전설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작품 전체가 시의 형식을 띠고 있다. 주인공 파우스트는 말한다.
이 세계를 가장 내밀한 곳에서
통괄하는 힘이 무엇인가? 그것을 알고 싶다.
모든 작용력과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을 보고 싶다.
– <파우스트> 382~384행
철학이나 법학, 의학을 배웠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참된 앎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신학을 접하자 그는 한탄한다.
아아, 신학마저도!
– <파우스트> 356행
- p. 13
오늘날 신학은 그리스도교 종교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것, 관심 밖의 것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근래에 와서는, 그리스도교 내부에 있는 이들도 신학의 쓸모에 대해 의구심을 던진다. 예전에는 신학자라고 하면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존경을 받았지만, 오늘날 상당수 교인은 신학자를 ‘그리스도교 복음을 일부러 어렵게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p. 28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라는 몸에 신학이라는 맹장은 없어졌지만, 그 맹장이 있었던 흔적은 남아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후, 현대 사회는 자신의 의지로 자기 몸에서 신학을 도려냈다. – p. 30
슐라이어마허는 <신학통론>에서 신학을 ‘실정적인 학문’이라고 평가했다. 신학이 ‘교회’라는 구체적인 현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의학이 병원이라는, 법학이 법정이라는 ‘실천의 장소’를 갖고 있듯 신학은 교회라는 실천의 장소를 갖고 있다. … 신학은 구체적인 현장을 가진 뚜렷한 실천적인 학문이다. – p. 35
신학은 본래 테올로기아theologia, 즉 ‘신’, 혹은 ‘하느님’theos에 관한 ‘말’logos을 뜻한다. … 신학자들은 자신이 처한 시대, 그리고 문화에서 나온 ‘말’을 사용해 그 대상인 ‘신’을 더 적절하게 설명하고자 애쓴다. – p.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