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H. 아널드(John H. Arnold), 이재만 옮김, «역사», 교유서가, 2015.

History: A Very Short Introduction(2000)

언어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 ‘역사’는 흔히 과거 자체와 역사가들이 과거에 관해 쓰는 것 둘 다를 가리킨다. ‘역사서술’은 역사를 쓰는 과정을 뜻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 관한 탐구를 뜻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나는 ‘역사서술’을 역사를 쓰는 과정이라는 뜻으로, ‘역사’를 그 과정의 최종 산물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 책은 (내가 말하는) ‘역사’와 ‘과거’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 18

작가 L. P. 하틀리(L. P. Hartley)는 “과거는 낯선 나라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르게 행동한다”라고 말했다. 과학소설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는 반대 경우를 상정해, 과거는 진정 낯선 나라이고 그들은 꼭 우리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 역사가는 과거의 모든 이야기가 아니라 일부만 말할 수 있다. 사료에는 구멍이 있고(다블리의 기록부 중 일부는 소실되었다), 잔존하는 증거가 없는 영역도 있다. 증거가 있어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다. 역사가들은 말할 수 있거나 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불가피하게 결정한다. 그러므로 ‘역사’(역사가들이 과거에 관해 말하는 진실한 이야기들)는 우리의 주의를 붙잡고 우리가 현대의 사람들에게 되풀이해 말하기로 결정한 것들로만 이루어진다. 뒤에서 보겠지만, 역사가들이 진실한 이야기를 선택할 때 의존하는 근거는 오랫동안 변해왔다. – 20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역사가들은 언제나 ‘틀린다’. 우리가 틀리는 이유는 우선 결코 완전히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적 서술에는 빈틈과 문제, 모순,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우리가 ‘틀리는’ 다른 이유는 설 언제나 동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틀릴’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은 틀리면서도 언제나 ‘맞으려’ 시도한다. – 28

나는 이 장과 이 책에서 역사에 관해 말하면서 ‘진실한 이야기(true story)’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표현에는 필연적인 긴장이 담겨 있다. 증거와 합치해야 하고 사실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진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이 잘못된 이유와 ‘사실’을 고쳐서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 동시에 역사는 ‘사실’을 더 넓은 맥락이나 서사 속에 배치하는 해석이라는 뜻에서 ‘이야기’다. – 30

헬레네의 역사에 관한 헤로도토스의 새로운 서술을 우리가 믿든 안 믿든, 허구적 이야기와 진실한 역사적 서술을 구별하기 위해 증거를 사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헤로도토스는 20세기 역사가와 흡사해 보인다. … 헤로도토스는 당대에 상황과 성격을 예시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했다. 시간이 순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역사란 동일한 주제들과 문제들을 거듭거듭 낳으면서 거듭거듭 순환하는 것이었다. – 38~40

로마시대 저술가 살루스티우스(Sallustius)와 키케로(Cicero)는 어떤 종류의 글을 쓰든 지켜야할 규칙과 규약이 있으며 역사를 쓸 때는 특정한 규칙과 규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수사학자’(또는 서술자)는 설령 다른 이들이 불쾌해할지라도 진실을 불편부당하게 말해야 하고, 사건들을 연대기적·지리적으로 배열해야 하며, 성격과 우연을 포함해 행위의 원인에 주목하면서 어떤 ‘위대한 행위’가 행해졌는지 말해야 하고, “쉽고 물 흐르는 듯한 문체로 차분하게 써야” 했다. … 중세에 수사학은 줄곧 역사서술의 한 요소였지만 다른 요소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세에 역사가들이 받아들인 도구로는 작문과 수사학의 고전적 모형, 과거의 사건에 대한 구술자료, 연표, 연대기 등이 있었다. – 44~48

역사는 정치가와 통치자를 위한 선례의 창고다, 키케로식 수사학은 역사가의 문체에 필수적이다 등등이 그런 요소였다. … 도시마다 자기네와 고대를 연결하는 고유한 서술을 원했던 까닭에 역사 작품이 급증했다. … 16세기를 지나면서 수사학이 지배적인 뮤즈의 위치에 올랐다. 문체가 다시 한번 내용을 정복했다. 역사는 아름답게 쓰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엄’에 걸맞은 사건과 인물만을 다루어야 했다. – 51

랑케는 근대 역사서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곤 한다. 이처럼 랑케가 아버지로서 유산을 물려주었다고 생각하는 주된 이유는 그가 ‘증거’에 호소했거니와, 역사가가 문서고에 부지런히 되돌아간다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역사를 산출할 수 있고 또 산출해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 65

그들이 매도한 ‘역사’는 대부분 수사학적 역사였다. 다시 말해 고전적인 작문 원칙을 준수하고, 섬세하게 다듬은 서사를 제공하는 동시에 과거의 정치적 사건에서 본받을 만한 ‘교훈’을 이끌어내려는 역사였다. – 67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6~1457)은 그리스도 이후, 1,400년 동안 가장 유명했을 문서에 대해 역사상 가장 유명할 문서 분석을 내놓았다. 그 문서는 4세기에 로마 황제가 기독교 교회에 선물과 교리를 증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었다. 이 ‘기증장’은 중세 내내 교회의 무기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발라는 이것이 위조문서임을 입증했다. … 문헌학을 역사적 연구에 적용한 결과, 과거를 다루는 방법에 두 가지 새로운 생각이 추가되었다. 첫째 생각은 문서 자체의 특징에 근거해 문서를 비판할 수 있고, 따라서 무엇이 역사적 기록의 ‘진실’을 구성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기준을 몇 가지 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 생각은 언어가(따라서 문화가) 역사적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는 것,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통치 엘리트층의 운명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고 생활하는 방식 또한 변했다는 것이었다. – 71

역사가는 법률가처럼 상충하는 서술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사건들의 정확한 연쇄를 확증하려 노력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의심하는 태도로 ‘증인’(문헌)을 대해야 한다고 보두앵은 말했다. – 78

철학으로 기울어진 역사가들은 축적된 사실과 정치적 사건만 다루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세계 ─ 현재 세계와 과거 세계 둘 다 ─ 는 무엇보다 복잡한 곳이었다. 계몽주의 역사가들은 통치 엘리트층의 결정만이 아니라 지리와 기후, 경제, 사회의 구성, 사람들의 특징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과학자들이 자연세계에서 현상들 간의 믿기 어려운 연관성을 지적할 수 있다면, 역사가들도 그들과 유사하게 복잡한 방식으로 과거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했다. … 이제 역사에서 신의 역할은 재규정되어야 했다. 일부 저술가들은 신을 그냥 배제해버렸다. 다른 저술가들은 ‘신의 섭리(Divine Providence)’, 즉 인류 역사의 행로를 미묘하게 조종하고 그 역사의 목적인(目的因)으로 작용하는, 형언할 수 없는 완벽한 계획이 신의 역할이라 상상했다. – 82

이 시기에 역사는 자연과학의 논리, 즉 세계는 본질적으로 정적이고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신중한 탐구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논리의 영향을 받았다. 흄은 자연과학 연구와 유사하게 역사 연구를 통해 ‘인간본성”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었다. – 87

역사가들, 특히 독일 계몽주의 시대 후기의 역사가들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갈수록 확신하게 되었다. 첫째, 문서고의 사료를 대단히 상세하게 연구해야 했다. 둘째, 지리적 위치, 사회체제, 경제적 세력, 문화적 관념, 기술발전, 개인의 의지 같은 요인들 간의 복잡한 관계를 포함하는 인과관계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켜야 했다. – 89

랑케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랑케는 발견을 ‘왜곡’하는 상상적 영감을 배제한 채 정밀한 조사와 입증 같은 ‘과학적’ 개념을 고수하며 문헌을 신중하게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실제 어떠했는지만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 91

랑케는 사실 먼 옛날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를 인용하고 있었다. 랑케가 충성을 바친 대상은 투키디데스였다. 랑케가 역사에 다른 무엇을 주었든 간에, 그는 역사를 다시 한번 정치적 사건의 탑으로 돌려보냈다. – 93

저술되는 모든 역사는 이와 비슷한 무언가, 즉 일군의 특정한 사료를 향해 나아가도록 역사가를 추동하는 실마리를 내포한다. 역사가는 증거에 눈길을 주기도 전에 선택과 결정을 한다. 따라서 사료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은 역사를 시작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진실할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역사가 자신, 즉 자신의 관심사와 관념, 환경, 경험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 107

그런데 어떤 집을 지어야 하는가? 역사가는 무엇을 지을지, 어떤 사료를 제시하고 지지할지 결정해야 한다. – 111

‘편향’(필자의 편견, 필자가 서술을 왜곡하는 방식)을 찾는 사람은 ‘편향되지 않은’ 입장을 찾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이 문제다. 누구에게나 있는 특색이 ‘편향’에 포함된다면, ‘편향되지 않은’ 문헌이란 없다. 어떤 사료는 의견과 편견을 아주 공공연히 드러내고 우리는 당연히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어떤 사료는 그 사료가 가정하는 것들을 밝히기 위해 아주 신중하게 연구해야 한다. – 113

사료가 입을 다무는 어느 순간부터 역사가는 추측을 시작해야 한다. 즉 문헌을 해석해야 한다. – 126

새로운 질문은 언제든지 있다. 왜 그런가? 사료를 보는 새로운 시각 때문에, 사료 이전과 이후에 보이는 다른 사료 때문에, 역사가가 걸어가는 다른 길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사료에 틈, 여백, 생략, 침묵이 있기 때문이다. 사료는 말을 하지 않으며 전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 131

다시 말해 더 많은 양의 자료를 어떻게 종합하고 더 큰 이야기가 제시하는 윤곽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생각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역사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만이 아니라 연속성까지 의식하고, 그런 변화와 연속성을 설명하려 한다. – 135

마르크스와 그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역사의 해석에도, 장기간에 걸쳐 사회에서 변화가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 설명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마르크스는 20세기에 다른 누구보다도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오늘날 글을 쓰는 모든 역사가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자다(marxist, 대문자 ‘M’이 아닌 소문자 ‘m’). 이 말은 역사가들이 모두 ‘좌파’라거나(그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마르크스에 진 빚을 반드시 인정하거나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 요소는 오늘날 역사가들이 사실상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큼 그들의 관념에 깊숙이 배어들었다. 그 요소란 사회적·경제적 환경이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삶,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그리하여 행동에 나서도록 그들을 추동한다는 통찰이다. – 141

사회사가는 인류학과 사회학에 힘입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행위의 패턴, 즉 그들의 가족구조, 일상적 행동, 그들 주변의 사회적 공간을 배열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 그 ‘문화’는 사유와 이해의 패턴, 언어의 양식, 인생의 의례,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문화사가들은 경제적 환경이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그 방식의 강조점을 바꾼다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받아들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그들과 사회 및 경제의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논증했다. – 144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역사는 자기네가 선택하지 못하는 환경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 그 환경에 영향을 끼친다. ‘환경’, ‘역사’, ‘사람들’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이것들은 역사가가 역사에서 하나의 패턴을 이끌어내기를 기다리며 계속 동행한다. 이처럼 서로 부딪히는 물결들에 의해 형성되는 패턴 안에서, 역사는 생겨난다. – 155

원래 망탈리테는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 역사가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가 친구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와 함께 ‘아날적’ 접근이라 알려진 새로운 종류의 역사를 시작하며 사용한 표현이다(‘아날 Annales’은 그들이 창간한 학술지 『경제사회사연보 Annales d’historie economique et sociale』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날학파의 목적은 몇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역사 연구의 방향을 정치적 사건에서 경제와 사회, 문화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었다(이 목적 역시 투키디데스의 탑에서 탈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하나는 역사의 훨씬 광범한 진전 ─ 아날 학파가 말하는 ‘장기지속(longue durée) ─ 을 검토하고 과거에서 뿌리 깊은 흐름을 찾는 것이다. 이 목적과 연관된 것이 기후 변화와 지리적 위치, 장기간의 경제적 변천을 역사적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에 포함하려는 욕구였다. – 164

망탈리테는 우리가 과거 시대에서 발견하는 가지각색의 가정과 관습, 의례를 압축하는 약칭이 되었다. … 내가 넌지시 말했듯이 망탈리테라는 술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과거 사람들을 오늘날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이 통찰이 정확한지 여부와 무관하게, 뒤에서 이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우선은 망탈리테 관념이 다른 두 가지 인지적 조작 또한 수반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인류 역사 전체를 기간들로 나누는 조작과 역사적 증거를 그것을 만든 사람이 결코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읽는 조작을 수반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 167

상이한 사고방식들과 망탈리테들을 파악하려면 사료를 신중하게 이용해야 한다. 앞에서 시사했듯이, 그러기 위해서는 사료를 만든 이들이 결코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료를 읽어서 그들이 결코 고려하지 않은 의미를 드러내야 할지도 모른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런 읽기를 ‘결을 거슬러 읽기’라고 부르곤 한다. 여기서 ‘결’은 사료가 제시하고자 하는 방향과 논증을 뜻한다. – 171

죽음 ─ 죽음과 관련한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이해 ─ 역시 엄청나게 변해왔다. 기독교 이전 시대의 전사들은 가급적 영웅처럼 싸우다가 젊은 나이에 한 순간에 죽기를 바랐다. 이와 달리 기독교 기사들은 미래가 어떠할지 이해하고 현세에서 선행을 하고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 장수하다 죽기를 바랐다. 어떤 이들은 장례의 일환으로 인육을 먹는 것을 적절하고 영예로운 행동으로 여겼다. – 181

진실과 거짓의 전투를 지켜보는 이들은 상충되는 이야기들의 함의 역시 결정해야 한다. 더욱이 실제 법정과 달리 역사에서는 한 사건을 여러 번 재판할 수 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어떤 ‘사실’과 ‘진실’도 의미와 해석과 판단이라는 맥락 외부에서 말할 수 없으므로 사실과 의미의 양극성은 옹호될 수 없다. 둘째, ‘진실’로 통하는 것(‘진실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절대적인 수용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수용에 의존하므로 진실은 합의의 과정이다. – 194

두 역사 모두 (저마다 고유한 편견과 계급에 따른 이해관계, 성정치를 가진) 주관적인 역사가들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가능한 유일한 견해로 제시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단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 ─ 대문자 ‘H’로 시작하는 역사(History) ─라는 관념은 여전히 굉장히 매력적이고 따라서 굉장히 위험하다. – 199

‘대문자 진실’과 단일한 역사라는 관념을 포기한다고 해서 절대적 상대주의로, 다시 말해 사건에 대한 어떤 서술이든 다른 모든 서술과 똑같이 타당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가 일어났음을 부인하는 사기꾼들과 이데올로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 201

나는 역사를 탐구해야 하고 역사가 중요한 세 가지 대안적인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번째 이유는 그저 ‘즐거움’이다. … 두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바로 역사를 생각할 거리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탐구할 때 우리는 현재 맥락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탐험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탐험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 맥락을 더욱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세번째 이유 역시 다른 두 가지 이유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 자신에 관해 다르게 생각하는 것, 우리가 개개인이 ‘되는’ 과정을 알아가는 것은 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을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세번째 이유는 제1장에서 역사란 논쟁이며 논쟁은 변화를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할 내용을 상기시킨다. “이것이 유일한 행동 방침이다”라거나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라는 독단적인 주장에 직면할 때, 우리는 역사에 의지해 언제나 많은 행동 방침들과 많은 방식들이 있었음을 지적해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 역사는 이의를 제기할 수단을 제공한다. – 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