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조호근 옮김, «물리와 철학», 서커스, 2018.

파동은 입자일 수 없으며 입자는 파동일 수 없다. 양자 단위의 대상은 둘 중 어느 한 쪽에 속하지 않는다. 파동으로서의 성질을 측정하면 관찰 결과는 파동처럼 보이게 된다. 반면 입자로서의 성질을 측정하면 전자는 입자의 행동 양식을 따른다. – 10

고전 물리학의 성공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보편적인 이상으로 이어졌다. – 63

자연과학은 단순히 자연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과 우리 사이의 상호 작용의 일부를 표현하는 행위다. 자연과학은 우리의 질문 방법에 의해 노출되는 자연의 일부를 기술하기 때문이다. … 결국 세계와 나의 명확한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97

… 미지의 영역으로 지식을 확장할 때는 … 결국 아직 제대로 정의되지 않아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실수를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 자는 결국 벙어리가 된다’는 옛 속담이 현대 물리학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103

이제 칸트의 교리를 현대 물리학과 비교해 보자면, 첫눈에도 그의 ‘선험적인 종합적 명제’라는 중심 개념이 우리 세기에 이루어진 여러 발견들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대성이론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서, 시공간의 완전히 새로운 성질을 드러내 보였다. 순수한 직관으로 이루어진 선험적 형식에서는 이런 성질을 찾아볼 수 없다.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으며, 기본 입자에는 물질 보존의 법칙 또한 진실이 아니다. 칸트가 이런 새로운 발견을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개념들이 ‘훗날 과학이라 불리게 될 미래의 형이상학의 근간’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으니, 여기서 그의 주장이 어디서 틀렸는지를 확인해 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 107


* 참조: F. S. C. Northrop, “서설 – 물리철학의 문제들”

아인슈타인이 존재론적 범주에서 양자역학을 반박한 것은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물질개념에 가능태의 개념을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반론의 비유를 썼다. 주사위 놀이는 우연의 법칙에 의존된다. 우연이라는 개념은 유한 인식자의 인식론적인 제약에 의한 것이지, 존재 그 자체의 불완전성에 기인한 것은 아니라고 아니슈타인은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인식자의 인식론적인 제약을 존재론적으로 대상 그 자체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 12

… “양자역학에서 인과율이 적용되는가?”하고 묻는다면, 질문에 대해 두 가지 모순된 답변이 나올 수 있다. “인과율”을 강한 의미로 사용하는 물리학자는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며, 약한 의미로 사용하는 또 다른 물리학자는 “그렇소”라고 분명하게 답할 것이다. … “인과율”의 의미를 분명하게 설정한 후에 질문과 답변이 이루어진다면 양자역학에 대한 답변도 명백해진다. – 17

… 일반인은 인과율을 두 사물간의 관계로서 보지만, 과학자들은 같은 사물의 서로 다른 상태간의 관계로서, 혹은 서로 다른 시점에서의 같은 사물체계간의 관계로서 보고 있다. – 17

… 양자역학에서는 필연적 관계를 찾아 볼 수 없고, 더구나 그 사이의 확률적 관련성이 있다는 것마저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단지 그것은 우연적인 연계성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현상의 이같은 성격은 흄에게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감각되어지는 두 자연현상 사이의 관계는 우연적일 뿐이라는 흄의 주장은 수긍이 간다. 흄이 지적한대로, 필연적 연결관계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며, 확률적 관계조차도 … 직접적인 파악이 불가능하다. … 그것은 사변적인 방법에 의해서 혹은 자명하게 연역된 과학적, 철학적 이론에 의해서 이룩될 수 있다. 그것은 감각경험 혹은 실험적 결과에 의해 직접적으로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연역적인 이론에 의해 간접적으로 증명된다. – 18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최종덕 옮김, «철학과 물리학의 만남», 도서출판 한겨레, 1986(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