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나야마 도루(船山徹), 이향철 옮김, «번역으로서의 동아시아», 푸른역사, 2018.

요컨대 불교는 단순한 종교라기보다 하나의 커다란 종합적 문화 체계였다. – 12

산스크리트어는 인도의 규범적인 언어이고 학술 언어의 역할을 해왔다. 유럽 역사에서 라틴어가 해온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면 된다. – 22

음역은 의역을 함에 따라 발생하는 의미의 왜곡을 피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외국어이기 때문에 원어 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는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데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커다란 결점이다. 새로운 음역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실제 용례가 축적됨으로써 많은 용례나 문맥적인 뉘앙스로부터 의미가 귀납법적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 286

문화대응형 역어는 추상적인 사상의 개념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하고 알기 쉬운 사례를 예로 들면, ‘나가nāga’를 ‘용’으로 번역한 경우다. 인도에서 ‘나가’는 실제 존재하는 생물로 뱀(코브라)을 말하고 여기에 더해 신화적 존재라는 의미도 있지만, 불전에서는 이것을 ‘용’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 엄밀하게는 ‘나가’와 용은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다. … 그러나 각 문화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감안하여 말하면 범어 ‘나가’의 가장 적절한 한역어는 ‘용’을 제외하고 따로 없다. 그 문화적 배경에는 ‘나가’의 신화적 뉘앙스나 신비적 힘을 표출하기 위해서 한어로는 ‘용’이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 291

‘수트라’sūtra의 역어인 ‘경經’은 극히 중국적인 문화 배경을 갖는다. 원래 중국에서는 유교의 근본 경전을 ‘경’이라고 칭했다. ‘經’이라는 글자의 본래 의미는 직물의 날줄이다. 한편 범어의 ‘수트라’는 원래 재봉실이나 띠를 의미하고, 거기서 파생된 의미로 중요한 것을 하나로 묶어 진수를 정리한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 ‘수트라’를 ‘경’으로 옮기는 것은 확실히 매우 잘된 번역이다. – 297

요컨대 불교 한어 ‘聖’에는 세 가지 얼굴이 있다. 범어 ‘아리야’의 역어라는 얼굴, 유교적 전통에 입각한 한어로서의 얼굴, 나중의 크리스트교 성자와도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얼굴이다. …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세하게 되는지는 그때 그때 문헌의 종류에 따라 혹은 문맥에 따라 바뀐다. … 범어 ‘아리야’를 한자 ‘聖’으로 표현한 그 순간부터 중국 불교의 ‘성’은 순순하게 인도적인 개념이 아니게 되고, 중국적 전통과의 관계성을 잘라버릴 수 없는 운명에 말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