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나야마 도루(船山徹), 이향철 옮김, «번역으로서의 동아시아», 푸른역사, 2018.

요컨대 불교는 단순한 종교라기보다 하나의 커다란 종합적 문화 체계였다. – 12

산스크리트어는 인도의 규범적인 언어이고 학술 언어의 역할을 해왔다. 유럽 역사에서 라틴어가 해온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면 된다. – 22

… 티베트는 자신들의 문자를 범어계의 문자를 모방하여 만들고 … 범어의 원활한 번역을 용이하게 하는 자국의 언어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 티베트어는 범어와 같은 굴절어가 아닌데도 우수한 인도 문화와 범어 문헌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들 언어를 범어와 대응시키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 한역 불전은 오랜 역사와 언어 체계의 차이에서 티베트로 전파된 경우와는 다른 양상을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머릿속에 넣어둘 필요가 있다. – 27

불교에서는 비교적 오랜 옛날부터 불교에 관한 문헌을 하나로 모아 전집 내지 총서로 묶어두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불서의 이러한 총서를 가리키는 유명한 말로서는 ‘삼장’, ‘일체경’, ‘대장경’ 세 가지가 있는데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말은 대장경이다. 그런데 인도 불교에 원래 있었던 표현은 ‘트리피타카’(tripitaka)다. ‘tri’는 세 가지, ‘pitaka’는 보물이나 꽃 등을 담는 바구니라는 의미다. 여기서 세 가지란 경, 율, 논으로, 순서에 따라 불타의 가르침은 기록한 ‘수트라’(sūtra), … 교단의 운영 규칙을 정한 ‘비나야’(vinaya), 수트라의 내용을 후세 사람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킨 논서를 의미하는 ‘샤스트라’(śāstra)를 말한다. 이 ‘트리피타카’의 한역이 ‘삼장’(三藏)인데 … ‘삼장’은 삼장에 모두 정통한 사람이라는 ‘삼장법사’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 32

구역과 신역을 대표하는 역자로는 … 5세기 초 무렵에 활약한 구마라집(鳩摩羅什, 쿠마라지바)과 7세기 중엽 당 태종시대에 인도 순례에서 돌아와 질적·양적으로 방대한 번역 작업을 수행한 한인 승려 현장의 이름을 드는 데 이견을 내세울 사람은 없을 것이다. … 각각 구역과 신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 45

구마라집의 번역 작업은 … 특히 대승의 ‘공’ 사상과 관련된 것이 중심이 된다. – 55

구마라집은 번역이면서도 한편으로 중국어로서 알기 쉬운 문장을 지향했기 때문에 때로는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충실히 새기는 축어역에서 벗어나 일부를 생략하거나 말을 덧붙여 알기 쉽게 하는 조작도 했다. … 스탠포드대학 폴 해리슨 교수는 구마라집 번역이 갖는 특징의 하나를 “마치 현대 연구자가 번역할 때 괄호를 사용하여 그 가운데 말을 덧붙여 자신의 해석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했는데, 다만 구마라집은 그것을 본문 가운데 괄호를 사용하지 않고 했다”고 표현한다. … 바로 이 점이 구마라집 번역의 <법화경>, <유마경>, <금강반야경>이 중국 불교사를 통해 후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계속 읽혀온 이유다. … 번역이란 타인이 씹다가 내뱉은 음식물 같은 것으로 보는 구마라집의 생각을 파고들면, 결국 타인의 한역을 읽기보다 범어를 배워 원전을 읽으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 145

… 중국 불교사에 … 아이러니한 결과가 발생했다.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장 번역은 학술적인 가치는 인정받았다고 할지언정 그 후에도 사람들이 즐겨 읽은 것은 다름 아닌 구마라집 번역이었던 것이다. … 현장 번역은 중국인의 금강경 이해와 관련하여 결국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 비판과는 별도로, 현장에게는 ‘오종불번’으로 불리는 번역이론이 있었다… 의역하지 않고 음역에 그치는 편이 좋은 다섯 가지 장르를 열거한 것이다. … 첫째, (음역 그대로 놓아두는 쪽이) 선업을 낳게 하므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불타’(buddha)는 깨달음이라는 의미인데 … 범어 그대로 남겨둔다. 사람들의 선업을 낳게 하는 데 의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비밀로 하기 때문에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다라니 등과 같은 주문의 가르침은 범어 그대로 암송하여 부처의 가호를 빌면 즉각 효과가 나타나지만, 중국어로 번역하면 조금도 영험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복수의 의미를 내포하므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박가범’(薄伽梵, bhagavān)은 한 단어에 … 여섯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 하나의 의미로 옮기면 나머지 다섯 가지 의미가 모두 사라지고 말기 때문에 … 넷째, 예로부터 써내려온 관습에 따르므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 다섯째, 중국에 없는 사물이므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염부수(閻浮樹)는 그림자가 달에까지 드리워져 달의 모양을 만들고 … 항아리만 한 크기의 열매가 열리는데, 이 나무는 중국에 없으므로 번역할 수 없다. – 153~155

‘문’과 ‘질’은 전통적인 표현이다.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 “‘질’이 ‘문’을 넘어서면 곧 조야해지고, ‘문’이 ‘질’을 넘어서면 곧 지나치게 화려하게 된다. 문질 빈빈해야 군자라 할 것이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라는 문장이 나오듯이, … ‘문’과 ‘질’의 한쪽으로 편향하지 않는 중용을 좋다고 생각한다. … 원전에 충실하고 동시에 명료 간결하며 자연스럽게 술술 머리에 들어오는 번역(文質彬彬)이 이상적이겠지만 그러한 번역을 실현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 162

음역은 의역을 함에 따라 발생하는 의미의 왜곡을 피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외국어이기 때문에 원어 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는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데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커다란 결점이다. 새로운 음역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실제 용례가 축적됨으로써 많은 용례나 문맥적인 뉘앙스로부터 의미가 귀납법적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 286

문화대응형 역어는 추상적인 사상의 개념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하고 알기 쉬운 사례를 예로 들면, ‘나가nāga’를 ‘용’으로 번역한 경우다. 인도에서 ‘나가’는 실제 존재하는 생물로 뱀(코브라)을 말하고 여기에 더해 신화적 존재라는 의미도 있지만, 불전에서는 이것을 ‘용’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 엄밀하게는 ‘나가’와 용은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다. … 그러나 각 문화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감안하여 말하면 범어 ‘나가’의 가장 적절한 한역어는 ‘용’을 제외하고 따로 없다. 그 문화적 배경에는 ‘나가’의 신화적 뉘앙스나 신비적 힘을 표출하기 위해서 한어로는 ‘용’이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 291

‘수트라’sūtra의 역어인 ‘경經’은 극히 중국적인 문화 배경을 갖는다. 원래 중국에서는 유교의 근본 경전을 ‘경’이라고 칭했다. ‘經’이라는 글자의 본래 의미는 직물의 날줄이다. 한편 범어의 ‘수트라’는 원래 재봉실이나 띠를 의미하고, 거기서 파생된 의미로 중요한 것을 하나로 묶어 진수를 정리한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 ‘수트라’를 ‘경’으로 옮기는 것은 확실히 매우 잘된 번역이다. – 297

요컨대 불교 한어 ‘聖’에는 세 가지 얼굴이 있다. 범어 ‘아리야’의 역어라는 얼굴, 유교적 전통에 입각한 한어로서의 얼굴, 나중의 크리스트교 성자와도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얼굴이다. …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세하게 되는지는 그때 그때 문헌의 종류에 따라 혹은 문맥에 따라 바뀐다. … 범어 ‘아리야’를 한자 ‘聖’으로 표현한 그 순간부터 중국 불교의 ‘성’은 순순하게 인도적인 개념이 아니게 되고, 중국적 전통과의 관계성을 잘라버릴 수 없는 운명에 말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