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토이(Richard Toye), 노승영 옮김, «수사학», 교유서가, 2015.

… 클렘페러는 이렇게 말한다. “나치즘은 단어와 숙어와 문장 구조를 수백만 번씩 반복하여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살과 피에 스며들었다.” 클렘페러는 나치의 수사학을 경멸하기는 했지만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거나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언어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지문이며, 해석하는 법만 알아낸다면 발언자의 정체를 – 그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 식별하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수사학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보아야 한다. … 연사가 아무리 목에 핏대를 세우더라도 소음 주위의 의미 있는 침묵, 즉 생략과 ‘말하지 않는 것’에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 8

알든 모르든 누구나 어느 정도는 수사학을 접하며 산다. … 이 책은 수사학의 긍정적 측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바탕은 수사학이 시민사회의 주춧돌이자 민주적 절차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민주적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설득력 있는 공적 발언을 주고받아야 하며, 이를 통해 신뢰와 사회적 결속을 다질 수 있다. – 11

무엇보다 수사학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생각을 생성하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14

지식의 한 분야로서의 수사학은 서기전 5세기 후반 아테나이에서 기원했다. 수사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소피스트라는 교사 집단이었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프로디코스, 히피아스, 트라시마코스는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주요 인물… – 18

플라톤이 소피스트를 증오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 <프로타고라스>에서 프로타고라스는 공동체적 삶과 공유된 가치를 토대로 덕을 옹호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윤리학과 지식에 대한 극단적인 상대주의자로 표현된다. 이에 반해 플라톤의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 소크라테스는 위 두 대화편에서 변증술을 올바르게 행함으로써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로 대표되는 상대주의적 도덕관념을 철저하게 반대한 듯하다. … 서기전 399년에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를 재판하고 처형한 것도 한몫했다. … – 21

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은 테크네(기술)가 아니라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 브라이언 비커스 말마따나 “플라톤은 수사학을 희화화함”으로써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소피스트의 명성은 “플라톤의 일격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 25

이소크라테스(서기전 436~338년)는 ‘아티카 10대 웅변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가 세운 수사학 학교는 수사학 규칙, 수사학의 실제, 실례의 사용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수사학 교육법으로 확립되었다. … 이소크라테스는 수사학과 내면적 정신 논리 사이의 연관성을 밝혀냈다. – 26

아리스토텔레스(서기전 384~322년)도 수사학을 옹호했지만, 수사학을 학문의 총체로 여기지는 않았다. … <수사학>으로 알려진 저작들에서는 … 수사학이 테크네라는 견해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수사술과 변증술은 짝이다”라는 첫 문장은 둘을 별개의 동등한 학문으로 간주한다. … 수사학은 “어떤 경우에든, 가능한 설득 수단을 찾아내는 능력”으로 정의되었다. … 상황을 파악하고,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사학의 요소를 가장 효과적으로 배열하는 법을 알고, 청중을 파악하여 그들에게 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사법적 수사학, 제시적 수사학, 토론적 수사학의 세 장르로 나누었다. 연설에 담길 ‘논거’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번째 종류는 연사의 개인적 성품에 달렸고, 두번째는 청중을 어떤 정신적 틀에 넣느냐에 달렸고, 세번째는 연설 자체의 논거에 달렸다.” 각각 에토스(성품), 파토스(청중의 감정, 또는 감정적 성품), 로고스(논리 또는 담화)를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 27~28

그리스 수사학이 언제 어떤 경로로 전파되었는가는 분명치 않다. … 훗날 그리스의 영향을 글로 남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서기전 106~43년)는 그 자신이 법률가이자 정치가로서 매우 뛰어난 웅변가였으며 역사가이자 수사학자이기도 했다. … 키케로의 시대에 공화주의자 엘리트 정치가는 대중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영향력을 끌어올리는 수단으로 대중 집회에서의 웅변을 활용했다. – 31

중세의 비합리성을 과장해서는 안 되듯 르네상스의 합리성과 ‘근대성’을 과장해서도 안 된다. – 40

<수사술>을 쓴 신교도 토머스 윌슨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빵을 주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한 것이 문학적 진실이 아니라 수사학적 상징이었다고 주장했다. – 41

프랑스혁명은 기존의 정치 구조를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언어 혁명도 꾀했다. 혁명가들은 언어에서 기독교의 잔재를 뽑아냈다. … 달의 이름조차 바뀌었다. … 영국에서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정치적 언어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다. … 보수파는 혁명의 이상을 공격했을 뿐 아니라 혁명이 표현되는 언어와 혁명이 전파되는 기법을 공격했다. 1791년에 에드먼드 버크는 … 혁명 세력의 “거짓 철학과 거짓 수사학”을 규탄했다. 급진적 언어가 자아낸 두려움은 극심했다. – 45~47

19세기 말엽에 영국 총리를 네 차례 지낸 W. E. 글래드스턴은 언론을 교묘하게 주무른 좋은 예다. … 글래드스턴이 승리한 것은 … 언론의 성장 덕분이었다. … 온 국민이 글래드스턴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글래드스턴은 고전 교육의 기둥이자, 참정권 확대의 새 시대에 대중 집회의 개척자였다. 그는 장황한 연설을 일삼는 웅변가였으며 열성 숭배자를 거느렸다. – 50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수사술은 당면한 상황에서 기회를 찾는 것이지 맥락을 무시하고 연설 자체를 위해 문체를 조합하는 것이 아니다. – 58

흔히 수사학에는 다섯 가지 규범이 있다고 말한다. (1) 발상(invention/discovery) (2) 배열(arrangement) (3) 표현(style) (4) 기억(memory) (5) 발표(delivery)다. – 62

사법적 연설이든 제시적 연설이든 토론적 연설이든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대략적으로 각각 성품, 감정, 논리에 해당한다)에 호소해야 한다. 이 범주를 구분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에토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파토스) 자신에게도 최선일 것입니다(로고스)”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둘 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방법도 있다. – 71

말하는 법은 보는 법을 반영하며 이에 영향을 끼친다.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은유적 관념이 다양한 세계관의 토대라고 주장한다. … 삼절문은 언제 써도 효과적인 기법이다. 프랑스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나 미국 독립선언문의 ‘생명, 자유, 행복 추구’라는 구절이 가진 힘을 생각해 보라. – 77

… 생략삼단논법이 있다. … “반젤리스가 경주에서 우승한 것은 아테네 출신이기 때문이다”라는 진술을 살펴보자. … 청중이 아테네 사람이라면 아테네 운동선수가 뛰어나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 아테네에서 연설하던 중에 앞의 발언을 했다면 박수갈채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발언을 스파르타에서 했다면 어땠을까? 가정이 다르면 청중이 생략 부분을 채워넣는 방식도 달라진다. 이를테면 스파르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반젤리스가 경주에서 우승한 것은 그가 아테네 출신이고 아테네 사람은 모두 속임수를 쓰기 때문이다.” … 따라서 수사학을 분석할 때 “모든 청중이 알거나 믿는다고 연사가 가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 85

<정치와 영어>(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는 정치 연설에 담긴 “완곡어법과 논점 회피, 그리고 순전히 아리송한 표현법”을 공격했다. 오웰은 글이 명료하지 못한 것은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진짜 목적과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이 다를 경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오웰에게 정치적 언어는 “거짓을 사실처럼 만들고 살인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순전히 헛소리를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 98

저자가 의도한 바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할까? 텍스트 바깥의 근거는 인정될 수 있을까. 텍스트는 맥락 정보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까? … ‘신비평’은 후자의 입장에 섰다. … 시인에게 이 시행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시인의 답변이 시행 자체보다 의미를 더 효과적으로 드러낸다면 애초에 그렇게 써야 했을 테니 말이다. 이렇듯 저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해석의 권위를 가지는 신탁 사제가 아니다. … 텍스트 바깥의 근거는 ‘연설가가 무엇을 의도했는가’라는 질문에 최종적 해답을 주지 못하지만, 조사의 노선을 암시하고 부적격 후보를 걸러낼 수는 있다. – 100

처칠은 총리로서 빼어난 웅변가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이 어려움을 이겨냈으나, 한 사람의 재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영국이 수사학이라는 무기를 사용하는 데 비교적 성공을 거둔 이유를 이해하려면 개인의 천재성과 더불어 제도적·기술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전 세계 라디오를 감청하는 장비와 제국 곳곳을 연결하는 광대한 유선 통신망을 비롯한 통신 능력 덕에 영국은 외국의 연설에서 정보를 뽑아내고 자국의 수사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할 수 있었다. … 중립국 정부들은 처칠의 연설을 꼼꼼히 읽으며 영국의 힘과 전략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려 애썼다. 미국은 참전국 중에서 전쟁 초기(1939~1941년)에 자국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전쟁중에 총선을 치른 유일한 나라였다. 물론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고립주의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루스벨트의 명연설 “영원히 불명예로 기억될 날 date that will live in infamy”은 미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 처칠과 마찬가지로 루스벨트의 연설도 사실을 취사선택하여 어떤 것은 전달하고 어떤 것은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