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정리]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
최종 수정: 2023. 3. 11.
최근 수정/보완 내용: 비유클리드 기하학 관련 설명 보완
** 참조: 동영상 강의
“선험적 종합판단”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순수이성 비판>을 읽기 위해 필요한 개념이다. 여기서 ‘비판’은 ‘한계’라는 뜻으로, 우리 인식(순수이성)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이성은 한마디로 인간이 지닌 판단 능력인데, 칸트는 판단을 두 종류로 나눈다.
분석판단(분석명제) ↔ 종합판단(종합명제)
분석판단: 명제 자체 분석만으로 가능한 판단, 주어 안에 술어 개념이 포함됨. 즉, 동어반복.
종합판단: 명제 외부의 추가 정보나 확인이 따로 필요한 판단, 새로운 정보를 알려줌.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 (분석판단)
한반도의 한여름에는 장마가 온다. (종합판단)
선험적 앎 ↔ 경험적 앎
선험적: 인간의 (경험적) 인식 능력과 상관없이 항상 보편적인…
경험적: 인간의 (경험적) 인식 능력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선험적 앎: 수학 지식, 논리학 지식…
경험적 앎: 동식물학 지식, 천문학 지식, 역사 지식…
* 선험적/경험적 x 분석판단/종합판단 경우의 수는 다음 4가지
1. 선험적 분석판단: 우리 (경험적) 인식과 상관없으며, 명제 자체로 판단 가능.
– “삼각형은 세 각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다.”
2. 경험적 분석판단: 의미 없음. ‘분석판단’은 항상 참이므로 ‘경험’과 무관함.
3. 경험적 종합판단: (경험적) 인식 능력이 필요한 판단, 확인 후 참거짓 판단.
– “매년 7월경 한반도에는 장마가 온다.”
4. 선험적 종합판단: (경험적) 인식 능력과 상관 없이 항상 보편적으로 성립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판단.
– “7과 5의 합은 12다.”
** “7과 5의 합은 12다.”라는 명제가 왜 분석판단이 아니라 종합판단인지 살펴보자.
12라는 수 자체에 계산(합)의 경우의 수까지 포함된 것이 아니므로, 칸트는 계산과 관련한 지식은 모두 ‘종합판단’이라고 본다.
11 다음에 오는 자연수는 12다. (선험적 분석판단)
6과 6의 합은 12다. (선험적 종합판단)
8과 4의 합은 12다. (선험적 종합판단)
9와 3의 합은 12다. (선험적 종합판단)
10과 2의 합은 12다. (선험적 종합판단)
11과 1의 합은 12다. (선험적 종합판단)
–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다.” (선험적 종합판단)
– “물질계에서 물질량은 불변이다.” (선험적 종합판단)
– “모든 물체는 무게를 지닌다.” (선험적 종합판단)
– “운동에서 작용과 반작용은 항상 동일하다.” (선험적 종합판단)
** 결국 ‘선험적 종합판단’은 수학/기하학/물리학 지식 등을 가리킨다.
*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바로 <순수이성 비판>의 집필 동기다.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에 해당하는 앎이 철학(새로운 형이상학)의 토대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 분석판단은 항상 참이지만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앎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학문은 인간의 앎을 넓혀주어야 하므로, 학문은 일단 ‘종합판단’ 위에서 성립해야 한다. 새로운 앎을 제공해주는 ‘종합판단’ 중에서 경험적인 것은 인간의 인식에 의해 참거짓이 바뀔 수도 있으므로 학문의 근본 토대로 삼기에는 미흡하다. 우리 경험과 상관없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선험적’인 앎인데, 그렇다면 종합판단 중에서 ‘선험적’인 것만 골라내서 학문의 토대로 삼으면 어떨까? 즉, ‘선험적 종합판단’인 앎이 학문의 토대가 돼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바로 수학 명제와 물리학 명제다.
칸트는 수학과 물리학 지식 안에 ‘선험적 종합판단’이 있다고 보았으며, 철학이라는 학문 역시 그러한 수학과 물리학 지식과 같은 기반 위에서 성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철학 분야의 뉴턴이 되고자 했다. 칸트는 영원불멸한 진리를 추구했던 기존의 형이상학을 폐기하고, 과학적 방법으로 철학(학문)의 토대를 완전히 새로 마련하고자 했다. 그는 보편타당한 지식 기반 위에 새로운 경험을 종합하면 인간 앎의 한계를 확장할 수 있다고 여겼다.
* 보편타당한 지식(기반) + 새로운 지식(확장) = 학문이 가야 할 방향
* 경험과 무관한 선험적 앎을 인식 토대로 → 합리론(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 감각 경험으로 얻는 앎을 인식 토대로 → 경험론(로크, 버클리, 흄)
* 칸트는 합리론(선험적)과 경험론(종합판단)을 통합하여 인식론을 혁신하고자 했다.
선험적 인식이 가능하려면
우리 안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 형식이
누구에게나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으로 세계를 파악하는데,
우리가 갖추고 있는 그 인식 형식이 ‘직관’이다.
우리는 직관에 의존해 대상들을 받아들인다.
직관으로 받아들인 앎의 재료들은 정돈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다. 이것들을 잘 간추리는 체가 있는데,
그것을 ‘범주’라고 부른다.
범주를 이용하여 앎을 정돈하는 것을 ‘개념’이라고 한다.
그 최종 결과물이 ‘인식’이다.
즉, 직관 → 범주 → 개념 → 인식 순서가 된다.
그런데 개념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서 원재료가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직관으로 받아들인 내용이 범주의 도움을 받아 정돈되고 종합돼야 ‘인식’이 나온다.
직관만 제 역할을 하고 개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인식은 어수선한 인식이다.
개념이 제 역할을 해도 직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인식은 껍데기만 남은 인식이다.
둘 다 불완전하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순수이성 비판>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 Kritik der reinen Vernunft
* 학문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칸트가 보편타당한 토대로서 ‘절대불변’하리라 여겼던 전제들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는 점이 밝혀졌다.
뉴턴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시공간
유클리드의 절대적 기하 공간 ↔ 로바쳅스키, 보여이, 가우스, 리만 등의 비유클리드 기하학
(케이스 데블린, <수학의 언어>에서 발췌)
논리학/수론의 완전무결함과 보편성 ↔ 모든 체계에는 자체 증명 불가능한 명제 존재(괴델, “불완전성 정리”)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속적 운동, 인과율의 세계 ↔ 미시세계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음, 양자역학은 확률로만 설명 가능
- 순수하게 ‘선험적’인 지식은 없다. 모든 것은 인간이 규정한 앎이다.
- 선험적 종합판단도 결국 경험적 종합판단의 일부다.
- 확고부동한 인식 토대 같은 것은 없으며, 모든 앎은 잠정적으로만 진리다.
- 우리는 기존의 경험 지식을 총동원한 ‘경험적 종합판단’으로 인식 지평을 조금씩 넓혀간다.
* 참조
칸트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종류의 기하학, 즉 수학적 기하학과 물리학적 기하학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기하학은 확실히 선험적이다. 따라서 그 정리들의 진리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수학적 기하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세계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그것의 도움으로 우리는 실제의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측정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라는 말을 덧붙인다고 해보자. 그 경우에 우리는 다른 의미의 기하학으로 무심코 슬쩍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물리학적 기하학에 대해서, 그리고 실제의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적 기하학은 선험적이다. 그리고 물리학적 기하학은 종합적이다. 어떤 기하학도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일 수는 없다. … 경험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지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윤용택 옮김, «과학 철학 입문», 서광사, 2012, pp. 235~237
칸트는 … 데카르트의 사조와 로크와 버클리의 사조의 결합을 시도했고, 여기서 독일 관념론이 탄생했다. 그의 철학 중 현대 물리학의 결과와 비교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부분은 <순수이성 비판> 속에 집약되어 있다. 그는 지식을 경험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근원에서 가져올 수 있는지 질문한 다음, 우리의 지식이 부분적으로는 경험으로부터 유추한 것이 아니라 ‘선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그는 ‘실증적’ 지식과 ‘선험적’ 지식을 구분하며, 동시에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도 구분한다. … 칸트는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유도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 명제에 … 필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선험적’ 지식이 필요하다. 경험만으로는 정의에 완벽한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해가 뜬다’는 문장… 우리는 이 법칙이 어긋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 예외를 상상하는 일이 불가능하려면 ‘선험적’ 지식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분석적 정의는 항상 ‘선험적’이다. … ‘2 더하기 2가 4다’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경험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반면 실증적 지식은 종합적이다.
그러면 종합적 지식이 선험적인 경우가 가능할까? … 공간은 다른 모든 외부 지각의 기본 가정인 필수 조건이며, 따라서 선험적이다. 공간이 없는 경우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공간은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직관이라 할 수 있다. … 물리학에서 칸트는 공간과 시간 외에도 인과율과 물질이라는 개념도 선험적이라 생각했다. … ‘선험적’이라는 표현이 칸트가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여기까지 칸트의 뜻을 받들려 하는 물리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학에서 칸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선험적’이라고 받아들였다. … 칸트의 교리를 현대 물리학과 비교해 보자면, 첫눈에도 그의 ‘선험적인 종합적 명제’라는 중심 개념이 우리 세기에 이루어진 여러 발견들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대성이론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서, 시공간의 완전히 새로운 성질을 드러내 보였다. 순수한 직관으로 이루어진 선험적 형식에서는 이런 성질을 찾아볼 수 없다.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으며, 기본 입자에는 물질 보존의 법칙 또한 진실이 아니다. 칸트가 이런 새로운 발견을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개념들이 ‘훗날 과학이라 불리게 될 미래의 형이상학의 근간’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으니, 여기서 그의 주장이 어디서 틀렸는지를 확인해 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 현대 물리학은 칸트가 주장하는 선험적인 종합적 명제를 형이상학적 명제에서 실용 속의 명제로 바꾼 것이다. 따라서 선험적인 종합적 명제는 상대적 진리라는 성질을 지니게 된다. 칸트의 ‘선험적’이라는 성질을 이런 식으로 재해석하면, 물질과 감각을 분리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어진다. … 그러나 훗날에는 현재의 지식 수준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의 적용 한계가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조호근 옮김, «물리와 철학», 서커스, 2018, p.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