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김정훈 옮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쌤앤파커스, 2018.

원제: Reality is not what it seems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테나로 곶에서 하데스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헤카타이오스는 테나로 곶을 찾아가, 실제로는 그곳에 하데스로 가는 지하 통로나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전설이 거짓이라고 판단을 내립니다. – 21

밀레토스인 중 아낙시메네스는 이 근본 물질이 응축되거나 희박해짐으로써, 세계를 구성하는 한 원소에서 다른 원소로 바뀐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으로 물리학이 싹튼 것이었습니다. – 24

데모크리토스 체계의 기본 발상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주 전체는 끝없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속에서 무수한 원자들이 돌아다닙니다. … 세계를 이루는 무한히 다양한 물질들도 오로지 원자의 이러한 조합에서 파생된 것이죠. … 알파벳 문자를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조합해서 희극이나 비극, 웃긴 이야기나 서사시를 쓰듯이, 한없이 다양한 세계도 기본적인 원자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집니다. 이 알파벳 비유는 데모크리토스 자신이 든 것입니다. – 24~

단테가 훌륭하게 노래한 중세의 우주 질서는, 당시 유럽 사회의 위계가 반영된 우주의 영적이고 위계적인 조직을 바탕으로 해석된 것이었습니다. … 그러나 루크레티우스가 노래한 데모크리토스의 세계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습니다. 신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세계에는 종말도 목적도 없습니다. 우주에는 위계가 없고, 지구와 하늘 사이에도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그는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 속에 평온하게 빠져들어 우리가 자연의 깊은 한 부분임을 인식합니다. 남자, 여자, 동물, 식물, 구름은 모두 위계가 없이 놀라운 전체의 유기적인 조각들임을 인식합니다. – 42

… 놀라운 것은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현상들은 중력과는 다른 단일한 힘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자기력’이라고 부르는 힘입니다. 물질을 뭉치게 하여 고체가 형성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힘이죠. … 우리 뇌의 뉴런 속에서 작동하는 것도 이 힘이고,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에 대한 정보처리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지배하는 것도 이 힘입니다. – 56

패러데이의 직관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뉴턴이 가정했던 것처럼 힘들이 떨어져 있는 물체들 사이에 직접 작용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공간에 퍼져 있는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것은 전기와 자기를 띤 물체에 의해 변형되고, 그 다음에 물체들에게 작용한다.’ 패러데이는 이 실체가 존재함을 직관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59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색으로 차 있습니다. … 색이란 … 빛이라는 전자기파의 주파수(진동의 속도)입니다. … 우리가 지각하는 색은 서로 다른 주파수의 전자기파를 식별하는 우리 눈의 수용체가 생성해낸 신경 신호의 심리물리적 반응입니다. – 63

어떤 사건의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어떤 ‘중간 지대’, 어떤 ‘연장된 현재’가 존재합니다. … 과거 속에도 미래 속에도 있지 않은 이 중간 지대의 지속 시간은 … 어디에서 사건이 발생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건이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연장된 현재의 지속 시간이 더 길어집니다. …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닙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최소 시간은 10분의 1초대이거든요. 그러나 달에서는 연장된 현재의 지속 시간은 몇 초 정도이고, 화성에서는 15분 정도입니다. … 아인슈타인은 ‘절대적 동시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우주에는 ‘지금’ 존재하는 사건들의 집합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죠. – 72~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 보존되는 것은 질량과 에너지의 총합이지, 각각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 76

… 중력장을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 … 뉴턴의 공간이란 무엇인가? … 여기에서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이 빛을 발합니다. 인류 사고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약이죠. 만일 중력장이 사실은 뉴턴의 신비한 공간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 뉴턴의 공간이 중력장일 따름이라면 어떻게 될까? 이 극도로 단순하고 아름답고 멋진 아이디어가 일반상대성이론입니다. / 이 세계는 공간 + 입자 + 전자기장 + 중력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세계는 입자 + 장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간을 추가 성분으로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뉴턴의 공간이 바로 중력장입니다. 혹은, 같은 얘기가 되겠지만, 중력장이 공간입니다. … 공간은 더 이상 물질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자기장과 유사한 세계의 ‘물질적’ 구성 성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간은 물결치고 유동하고 휘고 비틀리는 실재하는 존재자인 것입니다. – 83~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의 기묘한 구조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 전자의 궤도함수의 형태를 결정하는 양자역학 방정식을 살펴봅시다. 이 방정식에는 일정한 수의 해가 존재하며, 이 해들은 정확히 수소, 헬륨, 산소… 그리고 다른 원소들에 대응됩니다! … 주기율표는 이 해들에 정확히 들어맞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원소들의 속성과 여타 모든 것은 이 방정식의 해로부터 따라나온 것입니다! 달리 말해, 양자역학이 원소 주기율표 구조의 비밀을 완전히 해독해낸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물질들을 오직 하나의 공식으로 기술하겠다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오랜 꿈이 실현됩니다. 화학의 무한한 복잡성이 단일한 방정식의 해들에 의해 포착된 것입니다! 화학 전체가 이 단일한 방정식에서 나오지요. – 127

양자역학의 첫 번째 깊은 의미는 한 체계 내에 존재할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다는 것, 즉 존재할 수 있는 가능한 상태들의 수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 132

양자론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물들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는지’를 기술합니다. … 존재하는 사물들의 세계는 가능한 상호작용의 세계로 환원됩니다. 실재는 상호작용으로 환원됩니다. 실재가 관계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 사물이 있어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가 ‘사물’의 개념을 낳는 것입니다. … ‘사물’의 속성은 오직 상호작용의 순간에만, 즉 과정의 가장자리에서만 입자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것도 오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속성들은 단 하나로 예측할 수 없으며, 오직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습니다. – 135~

수 세기 동안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넓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더 멀리 보고 더 잘 이해하며, 세계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훨씬 더 다채롭다는 것에 놀라고 또한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이미지의 한계에 놀라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가 내놓는 세계에 대한 기술은 점점 더 단순해지고 있습니다. – 195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확실한 대답을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까닭은, 현재 우리가 가진 최선의 대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찾아낸 최선의 대답 말입니다. … 과학이라는 모험은, 그 뿌리는 기존의 지식에 두고 있어도 그 영혼은 변화 속에 있습니다. –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