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Carl Schmitt), 김남시 옮김, «땅과 바다», 꾸리에북스, 2016.
내 딸 아니마에게 이야기해주다
인간은 땅의 존재, 땅을 밟고 있는 존재다. – p. 7
우리는 땅의 자식들일까, 아니면 대양의 자식들일까? – p. 12
인간은 탄생과 더불어 재탄생의 가능성도 알고 있는 존재야. … 인간은 그의 정신, 틀림없는 관찰과 추론, 그리고 결단을 통해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구해낼 수 있어. – p. 15
세계사는 땅의 힘에 대한 대양의 힘의 투쟁, 대양의 힘에 대한 땅의 힘의 투쟁의 역사란다. – p. 17
** 요약
땅과 바다는 인간 실존을 가능케하는 두 원소다.
그렇지만 인간은 환경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존재다.
우리에겐 자유의지와 의식이 있으므로 원소까지 선택할 수 있다.
‘베헤모스’는 땅의 힘을 상징하고, ‘리바이어던’은 대양의 힘을 상징한다.
역사는 베헤모스와 리바이어던이 충돌하는 에너지다.
페르시아와 아테나이, 스파르트와 아테나이,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립.
비잔티움은 해양의 원소를 지닌 제국이었다.
베네치아는 대양의 원소를 지닌 공화국이었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에스파냐와 베네치아 연합은 투르크를 격파했다.
해적들이 전면에 나섰던 시기는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마감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재위 14년차가 될 때까지도 자국 해적들의 약탈과 불법을 묵인했다.
킬리그류 가문은 그 시대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때는 영국이 땅에서 바다로의 원소적 전환기다.
바다 연결로의 지배권을 쟁취한다. 즉,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공간 혁명이 이루어진다.
중요한 역사적 변화는 새로운 공간 의식을 의미한다.
알렉산드로스 정복이 그렇했고, 1세기 로마, 십자군 전쟁이 그러했다.
하천 문화(고대 문명)이 연안 시기(베네치아)를 거쳐 해양 문화(에스파냐)로 발전했다.
네덜란드는 고래잡이와 조선술, 항해술을 발전시켜 유럽의 운송업 주도권을 쥐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공간 혁명에는 전 분야가 기여했다.
지구가 구형임은 오래 전부터 모두 인지했다.
브루노가 촉발한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뉴턴에 이르러 ‘비어있는 공간’에 대한 우리 인식을 바꾸어놓았다.
르네상스 회화가 등장하며 고딕의 예술 공간은 무화된다. 원근법은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세계사는 땅을 취득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 1494년 토르데시야스 협약, 신세계 분배
-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반발 계기
- 가톨릭과 반가톨릭 갈등 제공
1550년 바야돌리드 논쟁
-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5세(이사벨라 손자)가 주관
세풀베다(아메리카는 에스파냐 소유) vs. 라스 카사스(군사적 정복은 부당)
프란치스코 데 비토리아, <인디오에 대한 강의>(1538)
- 자연법에 기초한 식민 지배 합리성
- 인디오 인권 보호, 국제법 요청(강대국 횡포 방지, 국제법 탄생 계기)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협약으로 종교 선택권 인정, 단 제후가 선택한 종교를 믿지 않으면 이주해야 함.
가톨릭에 반대한 두 세력인 루터파와 칼뱅파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확장
- 루터파는 보수적, 나라에 종속, ‘목사’ 한 직책만 허용, 예수상 허용
- 칼뱅파는 급진적, 목자/교사/장로/집사 체계, 우상숭배 금지, 제네바를 신정 국가로 건설하려는 야망
영국의 바다 권력 획득
- 영국은 ‘섬’이자 ‘배’
- E. 버크, “에스파냐는 유럽 해안에 좌초한 거대한 고래.”
- 1856년 파리회담에서 영국의 대양 지배는 정점에 이름.
- 산업혁명으로 리바이어던은 기계로 변신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 영국과 미국의 통합 예상
- ‘섬적인’ 토대 위에서 두 나라가 연맹하고 통일해야 함을 주장함.
세계대전을 지나며 ‘하늘’이라는 새 공간이 열림.
[참조 자료]
BARTOLOMÉ DE LAS CASAS, A Short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1552)
edited and translated by NIGEL GRIFFIN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
아메리카는 1492년에 발견되었고, 이듬해 에스파냐인들이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그 땅에 처음으로 정착했습니다. 그 후 49년에 걸쳐 에스파냐인들의 이주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스파니올라라는 커다랗고 비옥한 섬으로, 해안선 둘레는 600레구아에 이르고 여러 커다란 섬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모든 섬들을 직접 보니 세계 다른 곳만큼이나 많은 원주민들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섬에서 가장 가까운 아메리카 대륙 땅은 250레구아 떨어져 있고 매일 더 많은 곳이 발견되는데, 1541년까지 탐사된 해안은 1만 레구아가 넘습니다. 그곳 역시 사람들로 가득하고, 이제까지 탐사된 지역으로 미루어 보건대 마치 하느님이 많은 인류를 여기에 거처하도록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 1레구아는 도보로 1시간 걸리는 거리, 4-5Km.
이스파니올라 섬
우리가 알고 있듯 기독교인들은 처음으로 이스파니올라 섬에 들어갔고, 그곳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 그들은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아무데서나 닥치는 대로 어린이, 노인, 임신부, 심지어 막 아기를 낳은 산모까지도 마음대로 죽였습니다. 그들은 축사에 기르는 양처럼 칼로 주민들의 배를 가르고 살을 토막냈습니다. 에스파냐인들은 자신들이 단칼에 사람을 두 동강 낼 수 있는지, 창으로 단박에 머리를 자르거나 배를 가를 수 있는지 내기를 하곤 했습니다. 젖을 먹고 있는 아기의 발을 잡고서 어머니의 품에서 떼어내어 바위에 머리를 내동댕이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갓난아이를 뒤로 강에 던져버리고는 웃고 조롱하면서 “발버둥쳐 보렴, 이 가여운 애새끼야”라며 소리쳤습니다. 다른 이들은 자기 앞에 있는 갓난아이들을 그 어머니와 함께 칼로 찔렀습니다. 구세주와 12사도를 기념하여 거의 땅에 발이 닿도록 13개씩 교수대를 설치해놓고 장작에 불을 지펴 산 채로 태웠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몸을 마른 짚과 함께 묶고는 불을 질러 태웠습니다. 살려둔 채로 보낼 때는 그들의 손목을 잘라서, 잘린 손이 덜렁거리며 매달려있게끔 만든 다음 “똑똑히 전해”라고 말했습니다. 산에 숨어든 사람들에게 그 꼴을 보이라는 경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