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정리] 리샤르 역설

** 영상 해설

* 역설이 중요한 것은, 기존 이론(표현) 체계의 한계를 찾아낼 수 있고, 그 모순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해결 방법이 고안되어 앎의 영역이 새롭게 확장되기 때문이다. ‘리샤르 역설’은 프랑스 수학자 쥘 리샤르가 제기한 역설이다.

수를 정의하는 무수한 명제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1과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수”
“제곱하면 나오는 수”
“홀수”
“짝수”
“첫 번째 자연수”

이 명제들을 오로지 글자 수로만 차례로 다시 정렬해보자. (원래는 단어/어절 단위로 정렬) 글자 수가 가장 적은 것에 1이라는 숫자를 부여하고 그다음 명제에 2를 부여한다. 만일 글자 수가 똑같은 명제가 있다면 가나다/ABC순으로 정렬하여 줄을 세운다. 그러면 이렇게 재배열된다.

“짝수”
“홀수”
“첫 번째 자연수”
“제곱하면 나오는 수”
“1과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수”

여기에 1번부터 고유 번호를 매긴다.

1: 짝수
2: 홀수
3: 첫 번째 자연수
4: 제곱하면 나오는 수
5: 1과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수

이제 왼쪽 숫자가 오른쪽 설명과 일치하는지 일치하지 않는지 검토한다.

1은 짝수? (아님)
2는 홀수? (아님)
3은 첫 번째 자연수? (아님)
4는 제곱하면 나오는 수? (맞음)
5는 1과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수? (맞음)

해당 수가 명제의 속성과 일치하지 않는 수를 ‘리샤르 수’라고 하자. 거의 대부분은 리샤르 수일 것이다. 해당 수가 명제와 일치하면 리샤르 수가 아니다.

1은 짝수? (아님) → 리샤르 수
2는 홀수? (아님) → 리샤르 수
3은 첫 번째 자연수? (아님) → 리샤르 수
4는 제곱하면 나오는 수? (맞음) → 리샤르 수 아님
5는 1과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수? (맞음) → 리샤르 수 아님

그러면 n이라는 수는 리샤르 수인가?

n이 리샤르 수라면(n=리샤르 수), 명제와 일치하는 수는 리샤르 수가 아니라고 했으므로, 리샤르 수라면 리샤르 수가 아니라는, 모순이 발생한다. n이 리샤르 수가 아니라면, 명제와 일치하는 않는 수는 리샤르 수라고 했으므로, 리샤르 수가 아니라면 리샤르 수라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래도 모순 저래도 모순인 이런 역설적 상황이 수학자/논리학자 쿠르트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구상하게 된 계기였다. 모순은 자기 자신을 언급하면서 발생했다.

리샤르 역설을 분석해 보면, 애초에 판단의 상황 자체가 애매하게 설정됐다. ‘리샤르 수의 속성’이라는 것을 어떤 특정한 수로 규정할 수 없다. 리샤르 수를 규정하고 판별하려면 외부의 다른 맥락이 필요하다. “저 가수 오늘 미쳤다.”라고 말할 때, 문장 자체만 분석하면 오늘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뜻이 되지만, 문장 외부 맥락까지 고려하면 오늘 엄청나게 멋진 공연을 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명제의 진위는 이 명제 자체로는 파악할 수 없다.

크레타 사람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 명제 자체로는 참거짓을 파악할 수 없고, 크레타 사람이 그 말을 하고 있다는 외부 상황이 고려돼야 역설적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까지 포함하는 명제를 분석하려면 항상 외부의 다른(더 넓은) 맥락이 필요하다.

송금 앱의 팝업창 문구를 문구 자체로만 분석해보자.
‘취소’하기 위해 ‘취소’를 누르면 ‘취소’가 안 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다.

송금을 취소하려면 ‘삭제’(예약해둔 송금 프로세스를 취소)를 눌러야 하는데,
이 팝업창 문구 분석만으로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고, 외부의 다른 맥락까지 고려돼야 한다.

즉 “예약된 송금을 취소할까요?”의 ‘취소’(송금 취소)와
아래에 “취소/삭제”라고 표기된 선택 버튼의 ‘취소’(팝업창 실행 취소)는
표기만 같을 뿐 기능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앱의 문구/메뉴를 만들 때 특정 단어는 오로지 한 가지 뜻만 지니도록,
즉 한 가지 역할만 하도록 모두 바꾸는 것이다.
예컨대 ‘취소’라는 단어는 오로지 팝업창 실행을 취소할 때만 사용하고,
‘삭제’는 오로지 팝업창 실행을 수행할 때만 사용하는 것이다.

(‘삭제’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다면(예: 실행) 그렇게 고치되,
팝업창 실행 이외의 목적으로 ‘실행’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

괴델은 리샤르 역설을 보면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1) 표기는 같은데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기호나 표현을 모두 바꾸어서, 표기와 기능이 1:1 대응하도록 변환한다.
2) 숫자 하나에 오로지 한 가지 기능만 부여한다.
3) 그 숫자는 소수(素數, prime number, 1과 자신으로만 나뉘는 자연수)를 활용해 만든다.
4) 아무리 복잡한 기능도 단순한 기능들의 조합으로 표현 가능하다. 소수는 소수끼리 서로 곱해도 소수가 나오기 때문에, 복잡한 기능은 단순한 기능들이 조합한, 즉 소수들끼리 곱해진 아주 거대한 소수로 표현된다.
5)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소수가 주어졌을 때, 어떤 소수들이 서로 곱해져있는지 알아내면, 즉 소인수분해를 하면 복잡했던 원래 명제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6) 수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보았더니 참인데도 증명 불가능한 것들이 있더라.

이것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아이디어다. 리샤르 역설은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추론하는 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리샤르 역설이 일어나는 원인과 해결 방법을 정교하게 분석하면서, 기존 수학(논리학) 체계를 전반적으로 검토하게 된 것이다. 괴델은 “불완전성 정리”로 아무리 완벽해보이는 수학/논리 체계라 해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항상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했다. 즉, 완전무결한 논리 체계는 존재할 수 없음이 확인되었다. 완벽한 수학 체계를 구축하려는 수학계의 시도는 좌절됐지만, 더 넓게 보면 오히려 그 계기로 인간의 인식 한계는 더 확장되었다.

* 수학이나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학 영역, 언어 표현 영역에서도 역설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인간의 삶은 온갖 모순적인 상황, 즉 역설적 상황으로 가득차 있으며, 그 모순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본질적 측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모순을 지양(止揚, 기존 것을 극복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믿기에, 우리는 차근차근 주어진 모순들을 극복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