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독]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정신현상학》 서문
** 강유원 선생님 강독 요약 정리
“헤겔은 자기 자신 새로운 체계를 창안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이미 있는 체계를 완전히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 이석윤,〈Hegel에 있어서의 사변의 본질〉
“정신현상학은 두 서술자의 관점으로 기술되었다. 진리의 전 체계를 모두 알고 있는 절대적 정신의 관점, 그리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정신, 개인)의 관점. 가령 “진리는 전체다.”과 같은 언술은 전자가 하는 말이고, “교양은 직접성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또는 “정신은 …하려고 한다.” 같은 언술은 후자의 관점일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언술은 [완성되지 않은] 하나의 계기,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 강유원
“정신현상학 서문은 정신현상학의 서문이면서, 또한 헤겔 철학 전반에 관한 서문이다.” – 강유원
내용 정리
단언은 학적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다.
특수한 것을 보편성으로 포섭하려는 것은 철학적 사색의 본질이다.
단언에 집착하는 태도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지만 성급한 태도다.
단언과 같은 태도인 사념은 찬반을 판단하려고만 하고 또 [비교]평가하려고 한다.
사념은 철학적 체계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념
진리값을 지니지 못하는 의견이다. 플라톤의 ‘억견(Doxa)’에 해당한다. 참/거짓을 쉽게 판단하려하고 찬성/반대를 규정하려고 하는 것이 사념이 하는 일이다.
이러한 태도는 체계 안의 필연적 계기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단초인 교양은 우선 실체적 생의 직접성에서 벗어나려 한다.
즉, 규정성에 따라 내용을 파악하려고 한다.
규정성
엄밀함, 명확성을 가리킨다. 체계가 되려면 우선 형식의 완비, 규정성이 요구된다.
실체적 생의 직접성
실체(가령 신, 아래 설명 참조)를 세우는 태도는 직접적이다. 매개(근거)가 필요없다. 실체는 절대자인데, 이에 대립하는 것은 반성(Reflexion)이다. 반성은 매개적 태도다. 이렇게 실체와 반성은 일면 대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절대자를 매개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매개된 절대지’는 일견 모순돼 보인다. 나중에 나올 ‘개념의 운동’도 그러하고, 헤겔의 ‘현실적 사변’적 태도도 그러하다. 부정이 긍정이 되는 이 모순적 과정은 실로 변증법적이다. 모순율(어떤 명제와 그것의 부정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에 기반한 학에 대한, [모순을 부정하지 않는(모순을 인정하는)] 극복이자 종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양
정신이 자기를 도야하는 과정
교양은 충실한 생활의 진지함에 자리를 내준다.
즉, 충실하게 경험을 쌓는 엄연한 생활 세계가 교양의 우선 대상이다.
진리가 현존하는 참된 형태는 오직 학적 체계다.
현존
정재와 같은 뜻이다. 굳이 말을 만들자면 ‘정재함’ 정도 될 것이다. 그럼 정재는 무엇인가. 이데아 같은 절대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생활 세계, 자연을 가리킨다. 정재와 절대자를 구분하는 것이 이원론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현실을 매개로 한, 이러한 정재들을 자각적으로 파악하여 절대적 정신에 이르려는 것이 정신현상학의 과제(과정)다.
진리는 결과나 성과가 아닌 인식 전 과정을 통해 파악된다.
진리는 전체의 체계이며, 따라서 진리는 전체다.
진리는 이 체계에서만(체계를 모두 거쳐야만) 비로소 현실적이다.
학은 정신의 현실성이다.
따라서 앎은 체계, 즉 학이어야 한다.
철학은 “앎에 대한 사랑”[단계]에서 더 나아가 “현실적 지”로 이행해야 한다.
그러려면 학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전통적 의미의 철학을 학에로 고양할 때가 된 것이다.
계몽주의나 낭만주의는 엄밀히 보면 현실적 知로서의 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세우고, 지식으로 상상력을 붕괴하며, 오성으로 미신을 정복하려는’1) 태도가 계몽주의다. 진리의 원천을 신이 아닌 인간에게서 찾으려한 합리주의나 경험주의 위에 서 있다. 계몽주의는, 오성으로 사물을 분별하고 정리정돈하면 끝이라는 태도다. 오성은 유한자(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를 사유하고, 이성은 무한자(절대자)를 사유한다. 오성과 이성을 구별하여 사용한 것은 칸트이며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계몽주의의 완성자다. 계몽주의에는 목적이 없으며 이것은 가치의 세계를 배제한다는 뜻이다. 좋고/나쁨이 없다. 아는 것이 힘이며, 아는 것이 확장될 뿐이다. 아래에 ‘공허한 넓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런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1) M. 호르크하이머/Th. W. 아도르노(지음), 김유동 외(옮김), <<계몽의 변증법>>, 문예출판사, 1995, 23쪽.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세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태도다. ‘태도’가 중요하다. 낭만주의자들은 개념적으로 파악하려 하지 않고 다만 흔히 열광적 태도를 취할 뿐이다. 그 세계 안에 침잠한다. 아래에 ‘공허한 깊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런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신적 세계에서 인간 경험에 관한 관심으로 정신이 이행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정신은 너무 세속적인 것에 매몰돼 있다.
이 시대가 탄생의 시대요, 새로운 시기에로의 이행의 시대임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다.
공허한 넓이가 있듯 공허한 깊이도 있다. (위에서 설명)
이러한 극단을 보건대 곧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다.
이제 정신은 지금까지의 정재(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와 절연하려고 한다.
또한 정신은 표상의 세계와도 절연하려고 한다.
표상
감각과 개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상기와 상상력과 기억이 표상에 해당한다. 스피노자의 imaginatio와 유사하다. 표상은 감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진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출현한 정신은 아직은 직접적 형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전체에 대한 개념은, 비유하자면 건물의 전체 개념이지 건물 전체 자체는 아니다.
이때 ‘개념’은 개념적으로 파악된 전체로서의 진리라는 의미의 개념이 아니라 진리의 출발점이라는 뜻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학도 시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정신의 단초는 교양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단초는 각각의 계기들과 그 확장으로부터 자기에로 되돌아온 전체다.
이는 생성된 전체의 단순한 개념이다. 즉,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확실한 규정을 위해, 이때 중요한 것은 형식의 완비다.
형식을 갖춘 것, 완전히 규정된 것이라야 모든 사람들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
헤겔은 낭만주의자들의 철학적 태도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직접지에만 의존함으로써 학을 비교(秘敎)적 소유물로 전락시켰다. ‘
계몽주의는 사변을 배제한다. 절대지를 포기한다.
사변
‘일반적으로, 사변이란 감각이나 경험을 떠나서 단지 순수한 이성의 활동에만 의거하여 전체적 진리를 파악하려는 철학의 방법이다.’ 헤겔에게서 사변적 사유는 ‘변증법적 사유의 최종적 결과로서 처음의 두 계기를 자기 속에 종합 통일하고 있는 전체적 구체적인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자신의 사유방법을 변증법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즐겨 사변적 방법이라고 불렀다.’ (이석윤,〈Hegel에 있어서의 사변의 본질〉, 4~8쪽, 발췌 인용.)
헤겔이 보기에 칸트의 작업은 ‘사념을 단념한 것에 대한 정당화 작업이다.’ 헤겔은 칸트를 이렇게 비판한다. ‘상식만 있고 형이상학은 없는 인류를 만들었다.’
헤겔의 제자였던 미슐레는 헤겔의 사변적 자연철학을 ‘사변의 경험과의 화해’라고 해석했다.
낭만주의는 형식이나 규정성, 매개성을 결여하고 있다. 태도만 중시한다.
[기계적] 형식주의(기계론적 합리주의)는 추상적 보편성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합리주의
진리의 원천을 인간에게서 구하려고 했다는 면에서는 경험론과 같으나 진리 인식의 원천을 경험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서 찾으려 한 점에서 다르다.
또한 절대적인 것(신) 안에서 모든 것은 같다는 [셸링의] 소박한 인식도 있다.
깜깜한 밤에는 모든 소가 검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 절대적 현실성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진리는 체계 자체의 서술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종국의 단계에서 절대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진리를 실체로 파악하는 것과 더불어, 주체로서 파악하고 표명해야 한다.
그동안 유일한 실체로 간주돼 온 것은 구별 없고 운동 없는 실체였다.
[이를테면 파르메니데스의 一者]
실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실재하는 것이다. 가령 신이 실체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으며, 내가 보는 저 고양이가 실체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 실체가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파악할 수 없다는 입장, 실체가 있고 우리는 그 속성만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 그리고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만이 실체라는 입장도 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실체라고 규정한 것은 헤겔이 보기에 ‘추상적 보편자’(아래 설명 참조)일 뿐이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또 어떠한가. 나라는 존재가 자기동일성을 지닌 실체라고 보는 것은 소박한 주객미분의 인식이다. 자기를 외화하여(분열하여) 타자로(사유 대상으로) 삼고 반성을 통해 그것이 자기 안으로 귀환했을 때 우리는 나의 실체를 조금 더 잘 파악할 수 있으며, 우리의 의식은 고양된다. 진리는 이렇게 자신을 끊임없이(죽을 때까지) 생성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주체
실체가 본질적으로 추상적 보편성을 띠는 것이어서 매개를 도외시하려고 한다면, 주체는 ‘자기’라는 속성을 띠기에 필연적으로 매개적 속성을 지닌다. 문법적으로 보면 주체는 명제의 주어다. 주어를 술어로 설명하는 것이 사유일 것이다. 지금까지 실체는 ‘어쨌든 엄연히 있는 것’이었다. 직관에 의존하여 실체를 파악하려는 이들은 주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헤겔이 보기에 그들이 말하는 실체는 ‘추상적 보편자’일 뿐이며, 그것은 소박한 실재론이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실체는 ‘있든 말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진리가 주체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지양, 통일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개념의] 운동
“일반의 상식에게는 ‘개념이 운동한다’는 말이 납득되지 않는다. ‘운동’이라는 말이 가지는 일종의 물질성 때문일 것이다. 객관적 현실의 세계에서는 형식논리적 의미에서의 모순이 불가능하다. 어떤 것이 동시에 같은 곳에서 어떤 것이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반대’는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사유에서는 모순이 가능하며, 이는 모순의 긍정이 된다. 사유에서 모순이 긍정된다는 것, 이것이 개념의 운동이다. 인간은 어떤 것을 생각하다가 동시에 그와는 모순되는 것을 생각하기도 하며, 이처럼 모순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사유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운동)이다.” – 강유원,〈Hegel 철학 개념 일별〉
운동을 통해 사유의 대상이 되는 실체는 자기가 타자로 되는 한에서 주체적 존재다.
운동을 통해 사유의 대상이 되는 실체는 타자가 된 자기자신을 매개로 삼는 한에서 주체적 존재다.
운동을 통해 사유의 대상이 되는 실체는 그리하여 참으로 현실적인 존재다.
즉, 타자[가 된 자기]는 매개요, 자신으로 돌아와 현실적 존재가 되는 것이 진리다.
따라서 진리는 자기 자신의 생성이다.
운동의 과정이기에, 자신의 종국을 통해서만 현실성을 갖는 원환이다.
즉자는 추상적 보편자다.
즉, 보편적(절대적)이나 추상적이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그것에 구체적인 자기운동이 도외시되어 있다는 뜻이다.
추상적 보편자
구체적인 형식을 결여하고, 현실적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자, 혹은 완전하게 전개되지 않은 정신의 한 계기를 통칭.
즉자
즉자는 자기동일성을 지닌 실체, 그 자체다. 아직 매개되지 않은 상태다.
실재하려면 [본질적으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형식을 갖추어야 진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는 형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진리는 전체다. 그러나 이때 전체는 자기 전개를 통하여 스스로를 완성하는 실재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자란, 본질적으로 결과라고 말해야 한다.
절대자의 본성은 주체이며, 자기 형성이다.
절대자가 결과라는 말은 외견상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만 숙고해 보면 모순이 아님을 알 것이다.
무매개적으로 언표된 최초의 절대자는 아직 고작 추상적 보편자다.
그것은 무매개적인 직관일 뿐이다.
그들은, 매개를 통해서는 절대적 인식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피는 매개의 본성과 절대적 인식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개는 스스로 [개념] 운동하는 자기자신과 동일하다.
매개는 자신에로 귀환하는 반성이다.
매개는 대자적으로(사유 대상으로) 존재하는 자아로서의 한 계기다.
그 계기가 반성이다.
대자
즉자가 [사유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대자적이다. 즉 쪼개짐이다. 순수한 부정성이다. 대자적인 대상이 내 안으로 귀환[반성]하여 나와 하나가 되면 즉자대자적이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여’
태아는 즉자적으로는 인간이지만 대자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이성이 자기를 즉자적인 것인 것으로 만들 때 태아는 인간이 된다.
이런 것이 이성의 현실성이다.
절대자를 주체로서 표상하는 [기존의] 명제들에는 주어만 있고 술어가 빠져있다.
즉, 설명은 없는 공허한 내용일 뿐이다. (위의 ‘주체’ 설명 참조)
지는 다만 학적으로서, 체계로서만 현실적이다.
철학의 근본 명제 또는 원리는 참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전개되지 않은 상태로 있으면 또한 거짓이다.
즉, 추상적 보편성을 띤 단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근본 명제는 부정될 수 있다.
체계의 근거 혹은 원리가 다만 체계의 단초라는 것이 지적될 수 있어야 한다.
정신적인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다.
즉, 개념의 운동을 통해 파악되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 정신적인 것은 즉자대자적이다.
그렇게 전개되어 자기를 정신으로 아는 정신이 학이다.
학은 정신의 현실성이다.
학은 정신이 자신의 고유한 장면에 세우는 왕국이다.
개인은 학에 이르는 사다리를 요구해야 한다.
[정신의 도정은] 개인의 측면, 세계 정신의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지나간 정재(전통, 역사적 사실)는 보편적 정신이 이미 획득한 소유물이다.
보편적 정신
[특수한] 개인들은 역사 속에서 보편적 개인이 된다. ‘인류’라는 말은 보편적 개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편적 정신이란 따라서 보편적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보편과 개별의 대립은 철학의 본질이거니와, 또한 이는 정신현상학의 기본 구조이기도 하다.
개인은 보편적 정신이 획득한 비유기적 자연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비유기적 자연
역사적 사실은 우리(인류)가 만들어놓은 사실들이다. 정재(생활 세계)다. 이것은 특수한 개인이 보편적 개인이 될 수 있는 교양(도야)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에게는 아직 비유기적이다. 즉, 엄밀히 말해 개인과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특수한 개인은 도야(교양)를 통해 보편적 개인이 된다.
개인은 내면화된 즉자를 외화하여 대자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내면화된 즉자
나와 상관없는 역사의 사실들을 인식하면 내 안에 들어와 즉자가 된다. 그것이 사유의 대상(대자)이 되어, 즉자대자적으로 그것을 파악한다면 진정한 내 소유물이 될 것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정재(역사적 사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은 그것을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익숙한 것은 사실 가장 적게 이해되고 있는 것들이다.
주관, 객관, 신, 자연, 오성, 감각 등이 음미되지 않고 그저 숙지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표상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지는 이러한 태도에 대립해 있다.
이러한 지는 보편적 자기(개인)가 도달해야 할 것이다.
표상에 대한 분석은 그런 숙지를 폐기하는 것이다.
하나의 표상을 근원적 요소로 쪼개는 것은 그 표상의 본질적인 계기를 파악하기 위함이다.
구체적인 것이 분할되어 비현실적인 것(원자 요소)이 되고 나서야 오성적 학이 시작될 것이다.
오성은 아름다움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한다.
오성은 부정적 원리다. 가령, 낭만주의는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기력한 아름다움이다.
정신의 생은 죽음(부정적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신의 생은 죽음을 견디고 죽음 안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생이다.
정신은 분열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때만 자신의 진리를 획득한다.
정신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고 그것에 침잠할 때만 그러하다.
이러한 침잠은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환하는 마력이다.
이 마력은 위에서 주체라 불렸던 것과 같은 것이다.
표상된 것이 자기의식의 장면 속으로 들어오는 것, 즉 보편적이 된다는 것은 아직 완성된 교양이 아닌 교양의 한 측면일 뿐이다.
고대의 자연에 대한 의식은 철저히 이 교양 단계에 머물렀다.
반면 근대의 개인은 추상적 형식이 이미 마련돼 있음을 발견한다.
여기서 근대는 데카르트에서 칸트까지를 가리킨다. 근대의 개인은 구체적인 것을 보편적으로 추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계몽주의를 겪은 지금] 이제 해야 할 과제는, 고정된 사상을 지양함으로써 보편적인 것을 현실화하고 정신화하는 일이다. (오성을 이성으로 고양해야 한다.)
그러나 고정된 사상을 유동화하는 것은 감각적 정재를 유동화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자기 정립의 이러한 고정성을 포기하고 자신을 다시 유동화해야 한다.
고정성
감각적 정재를 유동화하는 것은 오성의 성과다. 인간의 인식을 하나의 고정된 점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고정성은 데카르트의 ‘본유관념’과 칸트의 ‘오성의 카테고리’를 가리킨다. 데카르트는 내용적 측면에 머물러 있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칸트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12가지 오성의 카테고리라는 형식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해소하였다.
이러한 유동화를 통해 오성은 개념(이성)이 된다.
그러면 비로소 순수사유는 ‘정신적 본질태’가 된다.
정신적 본질태
범주의 체계, 사유의 기본 형식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헤겔이 내놓은 것이 논리학이다.
이러한 순수 본질태의 운동이 학문성(논리학)의 본성 일반을 구성한다.
개념의 운동을 통하여 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아직] 정신의 무매개적 정재인 의식은 두 계기를 지닌다.
1) 앎(지)의 계기와, 2) 지에 대해 부정적인 대상성의 계기.
정신이 스스로를 전개하면 이 두 계기는 모두 의식의 형태들로서 등장한다.
이러한 도정의 학(정신현상학)은 의식의 경험의 학이다.
(실체는 의식의 경험, 대상으로 나타난다.)
의식이 이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은, 정신적 실체 또는 대상으로서 실체일 뿐이다.
정신은 스스로에게 타자가 되고(외화하고) 타자존재를 지양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이 경험이다.
자아와, 자아의 대상인 실체 간에 일어나는 부등성은 부정적인 것 일반이다.
부정적인 것이 결함으로 간주될지 모른다.
이 부정적인 것이 양자의 영혼(진정한 원리)이요, 양자를 운동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몇몇 고대인은 허공(비어있는 것)을 운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파악했다.
부정적인 것은 처음에는 대상에 대한 자아의 부등성으로 나타난다.
부정적인 것은 실체 자신의 실체에 대한 부등성이기도 하다.
이것은, 실체가 스스로 본질적으로 주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체와 주체
앞서 나왔듯, 주체는 ‘자기’라는 속성을 띠기에 필연적으로 매개적 속성을 지닌다. 그동안 실체는 우리와 동떨어져 엄연히 존재하는 것, 즉 물자체(Ding an sich)였다. 실체가 주체라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매개적 속성을 띠게 된다. 자아와 실체가 서로 맞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체와 실체 자신과의 부등성이다. 실체는 주체인 것이다.
실체가 주체라는 것을 보여주면, 정신은 자신의 정재를 자신의 본질과 동등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 지(앎)와 진리가 분리돼 있다고 하는 추상적 장면도 극복된다.
존재는 절대적으로 매개되어 있다.
존재는 실체적 내용이다.
내용은 마찬가지로, 무매개적으로 자아의 소유물이고, 자기적이며, 개념이다.
이로써 정신현상학은 완결된다.
정신은 지의 장면을 마련한다.
지의 장면에서 정신의 계기들은, 자신의 대상이 자기 자신임을 하는 단순성의 형식을 취하며 전개된다.
정신의 계기들은 [모두] 진리의 형식 안에 있다.
계기들이 서로 다른 것은 그 내용상 다를 뿐이다.
계기들이 [유기적으로] 조직되는 운동이 논리학 또는 사변철학이다.
정신의 경험의 체계는 허위적인 것에 관여한다.
허위인 부정적인 것에 관한 표상들은 진리로의 접근을 방해한다.
여기에서 ‘표상’은 일반적인 통념을 가리킨다.
[그 표상에 의해] 참과 거짓은 서로 다른 고유한 본질로 간주된다.
[그러나] 허위가 있지 않은 것은 악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둘 다 고유한 본질을 지니지 않는다.)
악과 허위는 악마처럼 사악하지는 않다.
그것들은 다만 보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허위는 실체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실체는 그 자체 본질적으로 부정적이다.
실체는, 내용을 구별하고 규정하는 것의 부정적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부정적인 것으로서 오성의 힘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물론 잘못 알 수 있다.
잘못 알려진다는 것은 지가 자신의 실체와의 부등성에 있음을(어긋나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부등성은 구별에 따르는 일반적인 것이요, 반드시 필요한 계기다.
이 구별에서 지와 실체의 상등성이 생긴다.
그 상등성이 진리다. (상등성을 생성하는 과정이 진리다.)
이 부등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부등성은 진리 그 자체에 여전히 무매개적으로 현전한다.
그렇다고 하여, 허위가 진리의 계기이거나 구성요소인 것은 아니다.
참과 거짓은 완전한 타재이므로, 지양/통일된 경우에는 이 말이 사용돼서는 안 된다.
완전한 타재
서로 뒤섞이지 않는 것들, 단지 외면상으로만 결합돼 있다.
주관과 객관, 유한자와 무한자, 존재와 사유 등등의 통일이라는 표현에도 부당한 점이 있다.
마찬가지로, 허위라는 말도 허위 자체로는 진리의 계기가 아니다.
독단론은 진리를 고정된 성과로 파악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른바 진리의 본성은 철학적 진리의 본성과는 다르다.
역사적 진리들은 개별적 정재에 관계하고 내용의 우연성에 관계한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들조차 자기의식의 운동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과 비교하거나 저서를 찾아보거나, 어떤 식으로든 탐구되어야 한다.
성과(결과) 만이 문제가 된다고 해도 근거들이 있어야 참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유클리드 정리를 외적으로 [암기하여] 안다고 해도, 내적으로 알지 못하면 기하학자로 간주되지는 않을 것이다.
수학적 인식에서, 증명의 의미와 본성은 성과에 이르러 이미 사라져버리고 만다.
물론 그 정리는 성과로서는 참이라는 것이 통찰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증명은 정리의 내용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관에 대한 관계에만 관여한다.
수학적 증명은 대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외면적인 소행이다.
가령 수학적 명제를 증명하려고 작도를 하면, 직각삼각형의 본성이 그 차체 분해되는 것은 아니다.
작도의 성과에 이르는 전 과정이 인식의 도정이요 수단이다.
철학적 인식에서도 정재의 생성은 본질의 생성과 서로 다르다.
철학적 인식은 그 둘(정재의 생성, 본질의 생성)을 포함한다.
이에 비해 수학적 인식은 정재의 생성 만을 서술한다.
철학적 인식은 그 두 운동을 통일한다.
실체의 내적 [본질의] 생성은 정재에로의 이행이다.
정재의 생성은 본질로 자기를 귀환시키는 것이다.
이 두 생성은 [각각] 자기 스스로를 해소하고, 스스로를 전체의 계기로 만듦으로써 전체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