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트럼 헌트(Tristram Hunt), 이광일 옮김, «엥겔스 평전», 글항아리, 2013(2010).

원제: The Revolutionary Life of Friedrich Engels

마르크스가 중년 이후 경제이론에 몰두하는 사이 엥겔스는 정치, 환경, 민주주의의 문제 등에 대해 자유로운 사고를 펼쳤다. 이런 쪽 사상이 오히려 지금도 유효한 부분이 많다. – 54

그는 실천의 힘을 믿었고, 자신의 혁명적 공산주의 이론을 온몸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 54

정신의 역사를 추동하는 과정은 인간사에서 자유의 이념이 구체화되는 과정이고, 그런 자유의 성취야말로 정신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었다. 본질적으로 역사의 과정은 자유와 이성이 문명을 통해 목적론적인 방식으로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그 최종 단계는 정신의 완성이었다. 헤겔의 말로 하면 “세계사는 자유 의식의 발전에 다름 아니다”. 역사는 물론 심히 변덕을 부릴 때도 있고, 영 희망이 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각 단계마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107

엥겔스가 특히 좋아한 것은 현대적 범신론이라는 관념으로 신성이 진보하는 인간성과 하나 되는 것이었다. – 108

베를린 대학… 셀링이 계시철학을 강의하는 곳 말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폰셀링같은 오만한 철학자도 그 강의는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수강생들의 면모가 여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재능을 가진 다양한 인물이 많았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6호 강의실에는 19세기의 준재들이 집결했다. 독학을 한 엥겔스는 맨 앞줄에서 열심히 강의를 받아 적으며 기꺼이 “청년 철학 독학도”를 자칭했다. 옆으로는 곧 예술사가이자 르네상스 연구가로 대성할 야콥 부르크하르트, 미래의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있었다. – 113

셸링은 신이 역사에 직접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주장하면서 헤겔 철학의 오류를 낱낱이 밝혀내고자 했다. 시간이 갈수록 강의는 헤겔과의 대혈투로 번졌다. 계시와 이성의 투쟁이었다. – 114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베를린 대학 교수가 저지른 치명적인 잘못은 개혁 시대의 프로이센을 이성의 역사에서 정점에 도달한 시기로 봤다는 사실이다. – 121

빅토리아 시대 분위기에서 “면직도시” 맨체스터는 현대의 모든 끔찍함의 대명사였다. 그것은 산업혁명의 참상을 보여주는 “충격의 도시”… 1833년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 현지에서 민주주의를 연구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이 신종 저승으로 향했다. 맨체스터 초입에서 토크빌은 “언덕 위에 솟은 30~40개의 공장” 이 역겨운 매연을 내뿜고 있다고 썼다. – 162

엥겔스에 따르면 칼라일의 결정적인 약점은 독일 문학은 읽고 독일 철학은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 없는 괴테는 그저 산만할 뿐이었다. 그러나 엥겔스는 칼라일의 비범한 산문 스타일-”칼라일은 영어를 자신이 완전히 새롭게 주조해내야 할 순수한 원료처럼 다뤘다” 과 자본주의 사회가 야기한 참상에 대한 강렬한 규탄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찬사를 보냈다. – 183

축축한 지하실에 수백 명씩 떼로 모여 살며, 아이들은 거기서 돼지와 같이 살았다. 철길이 동네를 가르지만 옥외 변소와 하천과 먹는 물은 하나로 뒤섞이는 것 같았다. 치명적이었다. … 더 열악한 곳도 있었다. 맨체스터 남단, 옥스퍼드로 바로 건너편에는 아일랜드계 이민자 4만 명이 바글바글 모여 사는 구역이 있었다. … 가장 심한 착취와 혹사, 저임금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프롤레타리아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층인 것이다. – 196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는 단순히 문학적 서술이 아니라 정치적 설득을 목표로 한 유연한 선전 작업이었다. 풍경, 사람들, 산업 등등 모든 부문에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부여했다. – 207

… 마르크스는 천재였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기껏 재능이 있는 정도였다. … 어떻게 천재를 시기할 수 있겠나… 시기한다면 끔찍한 소인배가 되는 수밖에 없다. – 220

포이어바흐는 관념론 철학ㅡ즉 헤겔주의 – 이 기독교 신학보다 나을 게 별로 없다고 주장했다. 둘 다 인간이 인간 외부에 있는 뭔가를 섬기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 뭔가란 헤겔이 말하는 정신일 수도 있고 기독교의 하느님일 수도 있다. 따라서 둘 다 인간의 영적 상태를 빈곤화시키기는 마찬가지라는 얘기였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해결책은 인간이 “인간성을 섬기는 것”이었다. – 235

“철학은 지금까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만 해왔다. 그런데 요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1845년에 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88년)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 238

「공산주의 신앙고백 초안」과 「공산주의의 원리」는 문장이 거칠고 왕왕 무색무취했지만 이 둘을 토대로 『공산당 선언』의 물 흐르는 듯한 산문이 태어났다. 에릭 홉스봄은 “이상주의적 확신과 도덕적 열정,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분석, 그리고 – 특히 음울한 문학적 웅변이 완벽하게 결합돼 마침내 19세기에 가장 유명하고, 가장 널리 번역된 팸플릿이 탄생했다”고 극찬했다. – 259

가장 중요한 일은 마르크스가 돈 걱정 없이 『자본론』 집필에 전념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엥겔스는 그렇게 자신
의 경제적 안락함과 철학을 연구할 시간, 그리고 심지어 명예까지 모든 것을 내놓았다. – 310

어쨌든 당혹스러운 진실은 엥겔스의 고소득이 맨체스터의 프롤레타리아 노동력을 착취한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이었다. – 326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간결한 표현에 따르면 『자본론』은 “역사 발전 단계들에 관한 변증법적 이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여기서는 인류의 발전 과정에서 계급들 간의 투쟁이 헤겔식의 관념들 간의 투쟁을 대신한다),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경제학적 도덕적 비판(착취와 소외라는 명제에서 구체화된다), 자본주의는 결국 (그 모순 때문에) 붕괴한다는 경제학적 증명, 혁명을 위한 행동에 대한 촉구, 공산주의가 다음 차례의 그리고 최종적인 역사 발전 단계가 될 것이라는 예언(확약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을 한데 버무린 것이었다. 『자본론』의 지적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잉여가치설(엥겔스는 이를 사적유물론 다음으로 중요한 마르크스의 발견이라고 봤다)로 계급 착취가 자본주의 경제에서 정확히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는 연금술사의 방정식 같은 것이었다. – 392

바쿠닌은 귀족 출신에 평판이 좋지는 않지만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는 데다 낭만적인 행동파였다. … 그가 20세기 역사학자와 지식인들의 애정을 듬뿍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하나같이 바쿠닌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에 매료됐다. … 바쿠닌은 파리에서 1848년 봉기에 참여했고 … 체포됐다. …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야만적이기로 악명 높은 베드로 바울 요새로 끌려갔다. … 북부 시베리아의 나른한 관리들은 바쿠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861년 봄 바쿠닌은 아무르 강으로 탈출해 이 배 저 배를 옮겨 타며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영국 목사에게 300달러를 뜯어낸 바쿠닌은 미국 횡단쯤은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뉴욕으로 가서 런던행 배를 타겠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1861년 12월 마침내 바쿠닌은 런던에 다시 나타나 옛 동료 헤르센의 집 문을 두드렸다. 바쿠닌은 장기 투옥 생활을 함으로써 오히려 1848년 이후의 반동 열풍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혁명에 대한 열정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정치 무대에 복귀한 것이다. – 421

엥겔스가 식민지 자본가 혹은 주식중개인 집단의 일부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런 모순은 에르멘 앤드 엥겔스에서 퇴사하는 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 “주식 거래는 노동자들로부터 이미 빼앗은 잉여가치의 배분을 조정하는 것에 불과해.” … “누구나 주식중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자일 수 있지. 주식중개인 계층을 혐오하고 경멸할 수도 있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엥겔스는 그동안 충분히 모순적인 삶을 살아왔다. – 436

노먼 레빈의 혹평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처음으로 일탈한 사람은 엥겔스였다. 그런 식의 엥겔스주의야말로 미래의 교조주의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미구에 등장하게 될 스탈린의 유물론적 이상주의 말이다.” 이런 유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말년에 엥겔스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누차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을 그 증거로 든다. 엥겔스가 후기에 쓴 글들에 대해 마르크스는 절대 옳다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은연중에 거리를 두되 친구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불편한 주장에 대해 침묵했다는 것이다. – 485

마르크스의 위업은 엥겔스의 헌신적인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엥겔스가 그 오랜 세월 ‘빌어먹을 장사질’을 해서 돈을 벌어줬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흔들림 없이 필생의 과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