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클라크(Christopher Clark), 이재만 옮김, «몽유병자들: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책과함께, 2019.

원제: The Sleepwalkers

옮긴이의 말

2017년 12월 초 북한을 방문한 제프리 펠트먼 유엔 사무차장은 리용호 북한 외무상을 만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3대 요구사항을 밝혔다. 요구 내용은 2009년 중단된 군 연락채널을 복원해 우발적인 전쟁의 위험을 줄일 것, 미국과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낼 것, 유엔 안보리의 비핵화 결의를 이행할 것이었다. 또 펠트먼은 외교 회담 자리에서는 이례적으로 역사책을 한 권 건넸다. 바로 이 책,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이다. 100년도 더 전에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의 원인을 다룬, 한국어도 아닌 영어로 쓰인 두꺼운 역사책을 북한 외무상에게 전달한 펠트먼의 행위에는 분명 외교적 메시지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이 책의 주제인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7월 위기’는 역사상 가장 복잡한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마저 무색케 하는 위기 중의 위기로 꼽힌다.

… 저자는 그들의 결정을 최대한 그들 자신의 위치에서 이해하기 위해 전쟁이 ‘왜’ 일어났느냐는 물음보다는 ‘어떻게’ 일어났는냐는 물음에 주목한다.

특히 저자는 다자간 상호작용을 도외시한 채 단 한 국가에 전쟁 책임을 지우거나 교전국들의 ‘유책 순위’를 매기는 견해가 증거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밀한 서술로 설득력 있게 입증한다.

전쟁은 불가피한 귀결이 아니라 그들이 내린 연쇄 결정의 정점이었다.

펠트먼에게 이 책은 ‘의도하지 않는 분쟁’의 위험을 일깨우는 데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집행부 전체를 놓고 볼 때 전쟁을 적극적으로 계획한 국가는 없었다. 그럼에도 믿음과 신뢰의 수준은 낮고(심지어 동맹들끼리도) 적대감과 피해망상의 수준은 높은 집행부들이 서로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속사포처럼 상호작용한결과, 사상 최악의 대참사가 일어났다. 핵심 의사결정자들은 자국을최우선하는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자신의 노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결코 전망하지 못했다. 요컨대 저자의 비유대로 “1914년의 주역들은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하고 꿈에 사로잡힌 채 자신들이 곧 세상에 불러들일 공포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이었다.”


유달리 복잡한 구조는 7월 위기의 또 다른 특징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도 매우 복잡한 사건이지만 주역은 둘(미국과 소련)뿐이었고, 나머지는 대리인이거나 종속적 행위자였다. 그에 반해 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려면 똑같이 중요한 자율적 행위자 5개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랑스, 러시아, 영국), 이탈리아까지 치면 6개국의 다자간 상호작용뿐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똑같이 자율적이었던 다른 주권적 행위자들, 이를테면 전쟁 발발 이전에 정치적 긴장과 불안정성이 높았던 발칸반도의 국가들과 오스만제국까지 고려해야 한다. … 상황을 더 복잡하게 하는 요소는 7월 위기에 휘말린 국가들 내부의 정책수립 과정이 대개 투명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