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원, «기록학의 지평», 조은글터, 2021.

제프리 여는 기록이 정보나 증거 외에도 매우 다양한 것들을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어포던스(affordance)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쉘렌버그가 사용했던 기록의 ‘가치’라는 용어도 있지만 그보다는 어포던스가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어포던스는 신조어로 “자원이 제공하는 특성과 기능” … 혹은 물건(object)과 사람 사이의 “특정한 관계에 따라서 제시될 수 있는 사용(uses), 동작(actions), 기능(functions)의 연계 가능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용자와 기록의 어떤 관계에 따라, 다시 말해 이용자가 기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기록의 다양한 어포던스가 생성될 수 있다. 그는 증거와 정보 외에 기록의 다른 어포던스를 “기억, 설명책임성, 권력의 합법화, 개인적·사회적 정체성과 지속성, 그리고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넘어 그것들을 소통시키는 것”으로 제시하며 이러한 해석을 통해 기록의 의미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증거나 정보 외에 기록이 주는 강력한 어포던스가 기억이다. 기록은 ‘기억의 원천’이라거나 “인간 기억의 확장”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 기록은 집단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기록은 한 인간의 정신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기록은 공동체와 그 일원인 개인이 기록이 아니었다면 잊혔거나 불완전하게 기억되었을 만한 것들을 떠올리게 해 준다.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에 대한 개인적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기록은 기억을 강화하거나, 기억에 대항한다. 후대 사람들에게 기록은 기억의 대체물로서의 역할을 한다. – 19

… 1681년 베네딕트 성인들의 삶을 편찬하던 생드니의 승려 장 마비용(Jean Mabillon)은 6부작 논문인 고문서론(De Re Diplomatica Libri)을 출판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마비용은 고문서학(Diplomatics)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진본 문서를 거짓 문서와 구분할 수 있고, 확실하고 진품인 문서를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문서와 구분할 수 있는 분명하고 정확한 조건과 규칙을 확립”하는 학문으로 정의했다. 마비용 논문의 앞부분에서는 고문서 비판의 원칙으로 특허장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식별하는 진단법을 명시했다. 제1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증서를 정의하고 문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주요 재료, 잉크, 필체의 종류를 조사했다. 제2부에서는 문서의 언어, 중세 특허장의 특징적인 부분, 인장, 그리고 문서의 연대 추정에 사용된 연대기 체계를 조사했다. 이 조사에 따라 마비용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무엇이 진짜 문서의 올바른 형태인지 밝히고, 고문서학의 일반 원칙을 제시했다. 논문의 3부에서 6부까지에는 이러한 원칙 및 그 원칙이 적용되는 방식에 대한 증명과 삽화가 실려 있었다. 6부에는 200개 이상의 문서 사본을 보여주면서 그 문서들을 왜 진본이라 간주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마비용 논문의 기본적인 가정은 “문서의 생산 맥락이 그 물리적, 지적 형식에 분명히 드러나며, 이러한 형식을 문서의 내용과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관청이 서로 다른 시기에 생산하고 공표한 문서를 비교하고 서로 공유하지 않는 속성과 공유하는 속성을 찾아냄으로써 진본 문서의 필요충분 요소를 제시할 수 있었다. – 82

영국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콜링우드(R. G. Collingwood, 1889-1943)는 “역사가가 어떤 자료에 담긴 진술에 대해 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은 진실인가 거짓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지적했다. 법률가와 달리 역사가들은 기록된 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기록이 신뢰할 수 없다고 밝혀졌다고 해서 역사적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 계몽주의시대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는 “아카이브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 배후의 진실을 찾아낼 수 있으며 거짓 진술이 담긴 기록에서도 진실을 들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때 ‘말하는 방식’ 자체가 사건이다. 파르주는 18세기 하층민들이 말하는 방식에서 진실을 찾고자 하였다. 이때 역사가의 임무는 아카이브에 좌초되어 있는 진실의 작은 조각들을 찾는 것이다. – 109

당대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원하는 기록에 접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이미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비공개나 비밀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침묵의 이유라기보다는 침묵의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 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