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內田樹),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소통하는 신체», 민들레, 2019.
‘적당’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 가르쳐달라고 스위스에서 온 유학생 엘리자베스가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일본어로 “적당한 답을 고르세요”라고 할 경우의 ‘적당’은 ‘적절한’ 또는 ‘올바른’이라는 뜻이지만 “적당히 해”라든가 “적당히 다루지 마” 같은 말에서 ‘적당’은 ‘적절하지 않다’거나 ‘별로 올바르지 않다’는 뜻이다. 대체 일본인은 어떤 이유로 같은 단어를 정반대의 뜻으로 쓰는 건지 설명해달라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맞는 지적이다. 나도 별생각없이 쓰고 있었지만 실제로 ‘적당’이라는 말은 꽤나 ‘적당히’ 사용되고 있다. ‘적당히’는 ‘적절하게’라는 뜻보다 주로 ‘대충’ 혹은 ‘성의 없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엘리자베스에게는 결국 납득이 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이 의문이 계속 마음에 걸려 있었다. 왜 같은 단어가 반대 의미를 동시에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일까? 대체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 어떤 이익을 얻는 걸까? 또 그것이 그렇게 비합리적이라면 왜 그런 누습을 개선하려고 아사히신문이든 NHK든 문부과학성이든 제언하지 않는 걸까?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우리가 일상에서 쓰고 있는 표현 중에는 반대의 의미를 동시에 함의하고 있는 말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인칭대명사도 그렇다. – 19
물론 일본어에도 같은현상이 존재한다. 오래전에 본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인공 소년(마에다 코요)이 좋아하는 소녀(나카야마 미호)에게 “나 좋아해?”라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미호가 곧바로 “응, 좋아해” 라고 답하자 코요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그 ‘좋아해’가 아니라.” 인간은 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까. 그 장면을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었다(엘리자베스의 지적 이후 나는 이런 사례에 아주 집착하는 사람이 되었다). ‘좋아해’처럼 오해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말조차 말투를 가지고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뜻과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정반대의 뜻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 미호가 답한 ‘좋아해’가 ‘친구로서는 좋아하지만 이성으로서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임을 코요가 어떻게 단번에 알아챈 것일까?
이는 여러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코요가 미호의 “응, 좋아해”를 이성으로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라고 순간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좋아해?”라는 물음과 “응, 좋아해”라는 대답 사이의 ‘시간’이 그만큼 짧았기 때문이다. “나 좋아해?”라는 물음에 “친구로는 좋아하지만 남자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라는 뜻인 경우는 곧바로 “응, 좋아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성으로서 좋아해”라는 뜻인 경우는 “음… 좋아해”처럼 음…’이라는 약간의 주저함이 끼어든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물음과 대답에서 나타나는 미세한 시간 차이에 따라 그것이 이성으로서의 호감인지 친구로서의 호감인지를 식별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귀찮은 일이 아닌가! 왜 사람들은 “이성으로 좋아해(좋아해①)”와 “친구로서는 좋아하지만 이성으로서는 관심이 없어 (좋아해②)’에 각각 다른 동사를 쓰지 않고 대립하는 의미를 한 단어에 담는 것일까? 신조어가 넘칠 듯이 생겨나고 있는 마당에 왜 “좋아해” 와 같은, 잘못 해석하면 인생이 좌우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낱말에 대해서는 아무도 제언을 하지 않은 것일까? – 21
ken이 ‘크다’와 ‘작다’라는 뜻을 함께 내포하고 있고, 좋아한다는 말이 ‘좋아한다’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을 동시에 내포하는 식으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우선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그때그때 가장 적합한 한 가지 뜻을 지닌 기호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능력이 아니라 같은 말 안에서 서로 다른 레벨을 읽어내는 능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그때 가장 적절한 한 가지 뜻을 지닌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크다’와 ‘작다’를 같은 말로 표현하는 식의 불합리한 일을 할 리가 없다. 인류가 언어를 습득한 이래 수십만 년이 지났는데 굳이 이런 불합리한 행동을 그만두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온 것은 왜일까? 그것은 같은 레벨에서 서로 다른 항 사이의 차이를 검출하는 능력보다 같은 항에 내포되어 있는 레벨의 차이를 검출하는 능력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보다 유용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 29
우리는 유아기부터 이런 능력을 개발하는 쪽으로 집중적인 훈련을 받고 있다.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그 능력에 관해서는 실로 혹독한 시험을 거듭해서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끼리 어딘가로 가려고 의논하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지나가는 친구에게 “너도 갈거니?” 하고 말을 건다. 이때 “너도 갈 거니”가 말뜻 그대로의 의미인지 아니면 “나는 내키지 않지만 ‘같이 갈까’ 하고 물어볼 만큼 네 기분을 배려하고 있으니까 너도 너랑 가고 싶지 않은 내 기분을 배려해줬으면 좋겠어”라는 의미인지를 순간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아니, 이번엔 안 갈게”라는 대답이 적절한 타이밍보다 영점 몇 초 빠르거나 늦어도 그 시간차가 특별한 메시지(“나도 너랑은 가고 싶지 않아” 또는 “착한 척하는 거 아냐? 그만 좀 하지!”)를 전하게 될 위험을 숙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일상은 매일매일 이러한 시험으로 가득하다. 엄격한 시험이긴 하지만 인간은 유아기부터 이런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아마도 사회생활을 해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 29
그래서 우리는 대개 누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다 듣고 나서 “앞뒤가 맞지 않으니 이 말은 거짓말이야”라는 식으로 추론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입을 여는 순간 “아, 거짓말이군” 하는 식으로 알아챕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흥미를 갖고 있는지 또는 호기심이나 경의를 갖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에 감응하고 있기 때문에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54
조는 행위는 겨울잠을 자는 것과 비슷합니다. 일종의 가사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죠. 고통을 슬쩍 넘기는 일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졸린다는 것은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실제로 생명력을 좀먹는 경험이라는 것을 듣고 있는 사람이 생물의 본능으로 스스로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 57
정리되지 않은 채 찜찜하게 남아 있던 경험이나 이야기가 문득 ‘아아, 그런 것인가!’ 하며 가슴 깊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옛날에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없었다’는 느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보통, 인간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기억해 흡수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폐기하거나 잊어버리고 만다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해 못한 채, 제대로 씹지 못하고 삼키지 못한 것’이야말로 오히려 스멀스멀 우리의 신체 속에 저장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어느 날 ‘아, 그게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며 납득할 때, 신체 속 어딘가에 비어 있던 기왓장 한 조각이 맞아떨어지듯 ‘찰칵’ 하고 저장됩니다. –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