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머리히 코레트(Emerich Coreth), 신귀현 옮김, «해석학», 종로서적, 1988(1985).

* 요약

서문

해석학은 신학적 언어를 다루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문헌 이해에서 비롯하여 더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다. 그 전제들을 찾아내고 해명하는 것은 철학적 과제다. ‘해석학’Hermeneutik이란 용어는 희랍어 ‘헤르메네인’ἑρμηνυειν(언표, 알림, 번역)에서 유래했다. ‘헤르메스’ 신과의 어원적 유사성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신적 소명’(전령)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성서는 역사적 증거로 다루어지고 법학적 해석과도 연관돼 왔다. 이를 일반적인 철학적 전제의 배경에서 연구하게 된 것은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가다머 등에 의해서다.

‘해석학’의 의미는 역사적 배경이나 저자의 구체적 의향 등을 파악하려는 올바른 문헌 해석의 기술적 이론에서 시작하여, 점차 역사적 이해에 선행하고, 또 그것을 가능케 하는 더 원천적인 문제들인 ‘이해’ 자체, 즉 자기 이해와 존재 이해에 관한 의미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진리의 무제약적 요구(특정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진리의 보편성?)와 마주하게 된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신학적 문제들에 전제된 철학적 배경
제2장: 이해의 본질과 구조 해명
제3장: 역사적 이해에 적용, 광범위한 해석
제4장: 역사적 영역을 초월하는 진리의 형이상학적 문제

이 책의 목적은 신학이나 특수한 방법론으로서가 아니라 철학적 (보편적) 해석학의 선행 문제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제1장: 문제사 (1) 신학적 문제

해석학은 신학에서 유래했다. 신약성서가 나온 뒤에 구약성서를 예수와 관련하여 다시 이해하고자 했다. 신약 역시 ‘이해’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교부 시대 문헌 해석은 1)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와 2) 상징과 유추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나뉘었으며, 3)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둘을 통합하고자 했다. 스콜라 철학은 교부 시대 문헌 해석을 재검토하며 신학과의 연관 하에서 성서를 이해하고자 했다.

“성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기치를 내건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는 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나 성서 자체의 중요성을 촉구했다. 그렇지만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공의회를 통해 성서 해석은 교회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성서 해석의 경향은 ‘축자적 이해’와 ‘역사적 이해’라는 두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존 로크를 위시한 계몽주의 사상은 기독교를 자연적 이성 종교로 파악했으며 계시 등을 배제하였다. 이성적으로 파악 가능한 영역으로 한정지은 칸트는 <순수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 도덕적 의미로만 종교를 이해하고자 했다. 헤겔은 기독교적 신앙을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와 자기 계시의 계기로 파악했다. 즉, 철학적 진리 차원으로 환언하여 이해하고자 했다.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생애>에서 신화적 내용의 극복을 요구했으며, “역사적-비판적 방법”의 시발점을 제공했다. 이런 흐름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하르낙이다. 그렇지만 케엘러는 이러한 객관적인 이해가 성서의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다고 보면서 “역사적 예수는 생생한 그리스도를 은폐시킨다.”라고 지적했다.

칼 바르트는 성서를 신의 말씀으로, 신의 계시와 구원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함을 강조했다. 불트만은 넓은 관점으로는 이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원문 탐구의 철저성이 결여되었다며 바르트를 비판했고, “역사적-비판적 방법”으로 회귀한다. 소극적으로는 “탈신화화”를 적극적으로는 “실존적 해석”을 추구한다. 하이데거(<존재와 시간>)의 인간 실존 해석이 성서 해석의 근거로 활용되어, 성서를 실존적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

이를 칼 바르트가 다시 문제 제기했다. 인간 이해가 우선인 불트만 같은 관점, 즉 인간 이해 지평으로만 보는 관점으로는 성서의 깊은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에게는 “신의 말씀”이 우선 문제다. 불트만의 제자이지만 바르트에 더 가까웠던 오트는 , 후기 하이데거 사상에 의거해 그 둘을 중재하고자 했다. 후기 하이데거의 관심은 인간에서 존재와 언어로 옮겨간다.

1943년 가톨릭의 대성서칙령은 과학적 해석에 문을 개방했다. 통일성 안에서 개방성을 수용한 것이다. 역사적 맥락과 떼놓기 어려운 “의미”의 문제가 늘 문제시되며 다양한 표현 형식의 언표 가치 역시 규정돼야 할 과제가 남는다. 이런 탐구는 더 근본적인 철학의 문제들을 요구한다.

제1장: 문제사 (2) 철학적 문제_a. 이해의 문제

철학적 문제와 관련한 문제는 슐라이어마허에게서 나타난다. 성서 해석에서 출발하여 이해 지평의 확장을 모색했다. 그에게 해석학은 이론지식이 아니라 ‘이해 기술’, 즉 기술론이다. 따라서 ‘이해’가 문제시되고 해석학은 근본 관심사와 근본 개념을 따지게 된다.

그는 ‘생활 연관성’ 전체에서 생기는 개별 사상이나 표현을 이해하고자 했으며, ‘예감적 이해’(친근한 대상/감정이입, 직접 이해)와 ‘비교적 이해’(사태, 문법적/역사적 지식 연관성, 매개된 이해)를 구별했다. 그러면 그 둘을 오가는 해석학적 순환이 나타나는데 ‘예감적 이해’가 먼저 이루어진 다음 ‘매개된 이해’가 이루어진다.

이 둘을 통합하여 해석학을 정의하자면, “주어진 말을 역사적이면서도 예감적으로,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으로 잇따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저자 속으로 ‘파고 들어감’과 저자의 표상 세계를 ‘감지함’이 요구된다.(추후 가다머가 타당성을 검토함)

자연 과학적 방법론에서 역사학이 분리되면서 ‘이해’ 문제가 새로이 제기된다. 랑케가 시작한 이 경향은 드로이젠의 <역사적 강요>(Grundriss der Historik)에서 두드러진다. 드로이젠은 자연 과학적 방법과 역사적 방법의 차이를 ‘설명’과 ‘이해’로 구분했다. 설명은 개별을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인데 비해, 이해는 개별적인 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다. “개별적인 것은 전체적인 것 속에서 이해되고, 전체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이해된다.” 이것이 의미 이해의 보편적 순환 구조다.

딜타이는 슐라이어마허로 돌아간다. 그의 전기를 쓰면서 최초로 ‘자연 과학과 정신 과학’의 이원성을 규정한다. 자연 과학은 ‘분해하여 설명’하지만, 정신 과학은 ‘이해하며 기술’한다. 그가 창안한 ‘이해 심리학’은 인과적인 자연 과학의 심리학과 구별된다. “자연을 우리는 설명하고, 영혼 생활을 우리는 이해한다.” 그에게 과제는 전체 연관성 안에서 개별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생의 통일성’이 중요한 대상이다.

리케르트와 후설의 비판을 받아들이며 딜타이는 이해 이론의 전향을 모색한다. 객관적 구조의 법칙성을 중시하게 된다. 이해는 ‘생의 객관화’이며 헤겔 용어인 ‘객관적 정신’으로 표현 가능하다. 딜타이는 ‘체험’이 이해로 향하는 통로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해는 체험을 전제한다. 리케르트는 ‘정신 과학’이라는 명칭마저 거부했다. 그는 자연 과학 반대편에 서서 ‘역사적 문화’를 말한다. 자연은 법칙으로 설명되지만, 역사/문화는 ‘가치’로 이해된다. 개별을 이해하는 것은 전체성에 제약돼 있는데, 이것은 추후 훗설 하이데거가 연구하듯 ‘지평’ 개념에서 표현돼야 함이 전제된다.

19세기가 역사-비판적 방법이 자연 과학에 예속돼 있었다면, 정신 과학의 독자적 연구 방법이 구축되고 입증되면서 성서적-신학적 문제성으로 돌아와 정당한 해석이 다시 요구되었다. 하이데거는 이를 더 깊이 파고들어 <존재와 시간>에서 ‘이해’를 현존재의 실존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에게 이해는 ‘실존주의’다. 즉, 인간 현존재라는 전체적인 존재 상태의 구성적 요소로 ‘이해’를 바라본다.

하이데거에게는 현존재라는 존재와 더불어 주어지는 근원적 이해가 문제다. 그에게 해석학이란 신학 연구, 언어와 존재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됐는데 근원적으로 인간적인 자기 이해와 존재 이해를 해석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선후를 따지기 어려운 장 안에서 움직이므로 모든 이해는 순환구조를 띤다. 그러면 (해석 대상인 세계의 전체 모습인) ‘지평 구조’가 주어지는 것인데, 하이데거 용어로는 ‘세계-내-존재’가 그것이다. 이해와 해석의 본질적인 ‘지평 구조’는 선후 관계도 알 수 없고 현존재와 구별이나 분리도 할 수 없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는 세계를 자기 이해의 지평으로서 설계한다. 이것은 하이데거 초기 견해인데, 후기로 가서는 세계를 역사적으로 계시되거나 숨은 존재로 파악했으므로, 인간은 그 안에서 조명돼야 한다는 쪽으로 견해를 바꾸었다. 후기 하이데거의 역사적 이해 인식은 분명 언어에 정초한다. 이 언어 속에서 존재가 말하므로 언어 속에서 근원적 존재 이해가 역사적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더 이상 해석학에 관해 말하지 않고 언어에만 집중하여 존재를 해명하고자 하는데, 결과적으로 새로운 해석학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해의 철학 이론을 완성한 것은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의 공적이다. ‘해석학적 순환성’ 문제를 다시 거론하면서 선이해라는 ‘편견’의 긍정적 효과를 강조한다. (잠정적으로) 타자를 이해하며 제안된 자신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평의 융합도 가능할 것이다.

가다머와 쌍벽을 이루는 학자는 에밀리오 베티인데 법학사적 해석학에서 출발해 정신 과학 전반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베티가 해석학적 전통에 있고 철두철미 규범적 해석학에만 집중했다면, 가다머는 현상학을 파고들었고 베티보다 광범한 분야를 다루었다. 우리의 향후 논의는 가다머에 가깝다. 그 중심 주제인 언어 문제를 앞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제1장: 문제사 (2) 철학적 문제_b. 언어의 문제

언어철학은 언어학과 분리된 사건을 통일성, 근원성에서 파악한다. 하만과 헤르더에서 시작되고 훔볼트에서 완숙 단계로 가는 언어철학은 슐라이머마허의 해석학적 물음이 제기한 것과 같은 영역에 속하는데, 당시의 정신 영역은 칸트와 사변적 관념론 철학과 낭만주의의 유기체적 세계관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초기 희랍 시대부터 퓌시스와 로고스가 구별되었는데, 이것은 현실성과 언어 표현의 구별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legein(표현)과 logos(이성)를 언어에 관한 것으로 모두 사용했는데, 그 이원성은 (분리되지 않은 채로) 긴장의 통일성 안에서 유지되었다.

플라톤의 <크라튈로스> 이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저술에서 언어는 공동체의 기호 체계로 간주하는 견해가 지배적이 되었다. 낱말은 개념에, 언어는 사물의 본질에 관계한다. (영원불변에 관계되는) 이성의 순수한 사고는 (변화무쌍한 세계에 관계되는) 언어의 로고스보다 우위를 갖는다. 근원적 의미에 접근되지 못하는 언어관이 서양 철학 전통 속으로 파고든다.

스토아학파의 철학과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도, 그리고 중세 보편논쟁에서도 언어에 대한 이성의 우위는 유효하다. 언어를 단순한 지칭으로 보는 태도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같은 보편 수학적 합리주의에서도 극복되지 못한다. 로크와 버클리의 경험주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근대의 기호 이론은 존재로부터 본질에로의 사고 변천과 결부되기 시작했다. 기호로서의 낱말은 순수한 본질의 문제가 된다. 유기적이며 근원적으로 총체적인 언어관이 18세기와 19세기 초 비코에 의해 마련되었고, 하만 헤르더 훔볼트 등에 의해 뚜렷이 부각되었다.

하만은 기독교적 로고스 이론을 배경으로 역사 인식을 결합하였다. “언어는 이성과 계시의 어머니”, “이성은 언어, 로고스다.” 그의 사상에는 칸트를 향한 비판이 포함돼 있는데, <순수이성 비판에 대한 비판>를 쓴 헤르더는 선험적 철학이 언어의 본질을 파고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인식가능성에 선행하는 것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헤르더의 언어관은 개인의 감정에 토대를 둔다. 내용과 형식의 상호 침투를 중시한다.

훔볼트는 언어의 생생한 통일성을 위해 노력했다. 개인은 언어적 공동체(객관적 정신)로 매개되는 존재다. 언어는 인식되지 못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으로, 항상 전체성에서 고찰돼야 한다. 훔볼트는 언어가 질료와 형상의 종합이라고 파악한다. 칸트에게 인간의 보편적 순수통각으로 종합적 인식(판단)이 가능하다면, 훔볼트는 언어적 사건과의 의미 연관성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추가한다. 질료와 형상, 수용성과 자발성은, 개별/보편 주관/객관의 대립처럼 결합돼 있다.

그러나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선험적 관념론의 전통에서 하만, 헤르더, 훔볼트의 언어관은 수용되지 않았고 철학의 가장자리에 머물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