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라티오, 2022.

이 대화편 전체가 ‘올바름’에 관한 것이며, 그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의견(doxa)을 검토하면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의견’은 대체로 ‘진리 아닌 것’을 가리킨다. 진리 아닌 것이니 당장 내다버려야 할 것 같지만 대화는 어쨌든 이것들을 검토하면서 시작한다. 어쩔 수 없다. 진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이렇게 길게 대화할 필요도 없고 좋으련만 세상 일은 그렇게 만만치 않은 것이다. – 서문

<국가>는 ‘대화를 통한’ 설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설득은 철학자의 과제다. … 물론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소피스테스들의 목적도 설득에 있다. 플라톤은 그들의 설득과 자신의 설득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하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인다. – 27

폴레마르코스는 적과 친구를 구별해서 대한다. 적에게 손해를 끼치고 친구에게 이익을 주는 것, 이것을 올바름이라 하는 것은 인간 집단에서 별다른 이견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사회문화인류학에서는 ‘내집단內集團 편향偏向’(inner circle bias)이라 부르는 것이다. 내 편에게는 잘해 주고 다른 편에게는 잘해 주지 않는다. 인간 존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내집단 편향을 거의 본능처럼 가지고 있다. 이 본능을 완전히 배제하고 올바름에 대한 보편적 규정에 이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 40

전문적 지식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약한 자, 관리를 받는 자의 편익을 생각하며 지시한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술은 관여하는 대상의 편익을 고려한다는 것을 도출했다. 올바른 것의 정의가 정반대의 것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처음에 트라쉬마코스는 올바름이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 했는데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하다 보니 그것은 ‘더 약한 자의 이익’으로 바뀐 것이다.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정의가 논박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첫 단계 대화가 끝났다.

트라쉬마코스는 느닷없이 소크라테스에게 보모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걸 묻는 까닭이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를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으로 몰아가려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어떠한가. 올바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크게 해먹느냐가 중요하다. 크게 해먹으면 행복한 사람, 축복받은 사람이 된다. 올바르지 못한 짓이라 해도 그게 대규모로 저질러지면 그걸로 충분히 칭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궤변을 늘어놓은 후 트라쉬마코스는 올바름에 관한 자신의 정의를 확언한다. “올바른 것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지만 올바르지 못한 것은 자신을 위한 이득이며 편익입니다.” 이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하려던 말이었다. 이 말을 한 다음 그 자리를 떠나려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를 붙잡았고 그는 남았고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 62

그에 대비되는 이는 “단순하고 고귀한 사람으로서, 아이스퀼로스의 표현대로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기 (생각되기: dokein)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훌륭한 사람이기(einai)를 바라는 사람이다. – 79

플라톤의 대화편 주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