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마루의 산들바람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회고록인 <자서전 비슷한 것>에 보면, 힘든 조감독 생활 중에 처음으로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된 어느 시점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그 순간을 ‘고갯마루의 산들바람’으로 표현했다. 과연 제대로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인지도 확신이 들지 않는 힘들고 막막한 등산길에서 어느 순간 얼굴에 산들바람이 느껴진다. 고갯마루를 타고 저쪽에서 넘어온 바람인데 그것은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다.
그렇지만, 등산하면서 나무들이 가리고 있던 하늘이 갑자기 환하게 열린다고 해서 거기가 정상은 아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이제 됐다!’ 하는 짜릿한 순간이 온다. 그건 정상이 멀지 않았다는 신호다. 그런데 더 힘을 내라는 격려로 받아들여야지, 문제가 해결됐으니 널리 알려도 좋다고 받아들이면 안된다. 지금 나는 여러 등성이들 중 하나, 정상의 8부 능선쯤에 있는지도 모른다. 수학자 가우스의 모토를 떠올린다. “파우카 세드 마투라”(pauca sed matura), 적지만 충분히 무르익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