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팔머(Richard E. Palmer), 이한우 옮김,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문예출판사, 2001(1998).

이 연구는 원래 문학이론에 대해 불트만의 성서해석이론이 지니는 의의를 밝히기 위한 전문적인 기획에서 비롯된 것이다. – 머리말


가다머 vs. 베티 논쟁

에밀리오 베티는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를 계승했다. 인간 경험의 대상화가 해석의 문제이며, “역사의 객관성”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E. D. 허쉬가 베티를 계승한다. “해석학의 목적은 객관적 해석을 위한 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역사적 현실과 무관하게 항상 적용될 수 있는 원리를 찾는 것이다. 이들에게 하이데거, 가다머 추종자들은 의미 혼란을 유발하는 객관성의 적이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가다머는 이해 자체가 무엇인지 따진다. 모든 것은 항상 현재성과 관련되며 역사를 벗어난 객관성은 불가능하다. 모든 이해 작용은 존재를 기술하는 것이다. 즉 해석학은 방법론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계승자: 에벨링, 푹스)은 탈신화화를 강조하는데 그에게 탈신화화란 신약의 신비적 요소를 척결하거나 우상 파괴 도구로 삼자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본래적이며 구원적인 의미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즉 성서를 상징으로 간주하고 신성에 이르는 문으로 보자는 것이며, “숨겨진 의미를 회상”해보자는 것이다. 즉, 성서에는 항상 해석의 여지가 남는다. 불트만의 하이데거적 영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단순 정보로 사용된 언어와 인격적 의의를 갖고 강제력을 지닌 언어를 구별하라.
2. 신(존재)은 말씀(언어)으로서 인간과 만난다.
3. 말씀으로서의 <케뤼그마>(복음 선포)는 실존적 자기 이해에 관한 것이다.

신약성서 말씀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언급한 양심의 호소를 구체화한 것이다. 불트만의 의도는 철저한 복종과 더불어, 은총에 대한 개방성, 신앙의 자유 요청 등이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그는 해석학을 주석을 이끌어야 하는 (역사 인식이 개입된) 철학으로 간주한다. 해석학의 핵심은 텍스트에 관한 이해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일이다. 불트만에게는 “전수된 역사 자료들 이해”가 중요하다. 전승이 가진 context를 철저하게 따진다. 그러다보면 “신비적 요소의 척결”이 발생하기도 하며 바로 여기서 Karl Barth와 대립되는 지점이 생긴다. “역사적 인식의 성격” 문제에 의존하다 보니 (예외적으로) 베티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불트만의 역사 해석은 일정한 ‘관심’에 인도되고 ‘선이해’에 근거를 둔다. 해석학적 문제는 관심과 선이해에서 생기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해석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선취(Vorhabe), 선견(Vorsicht), 선파악(Vorgriff) 등과 연결된다.

완전한 객관성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역사가가 역사 속으로 들어가 역사에 참여한 경우에만 의미를 획득한다. 콜링우드 말처럼 “역사적 사건은 주관적인 한에서만 객관적이다.” 이는 당대의 하이젠베르크 이론(불확정성 원리)과 맥락이 비슷한데, 관찰자의 관찰 행위가 전자 위치에 미세하게 영향을 끼치므로 정확한 전자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원론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사의 주체와 대상은 서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불트만에게는 종말론적 기독교 신앙이 현재와 역사에 참여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주관성 때문에 역사의 객관적 의미는 불가능하다. 이 점이 베티와 상반되는 지점이다.

에벨링과 푹스는 언어의 직역주의를 비판하고 말씀의 고유한 힘을 회복하고자 불트만을 계승한다. 말씀을 넘어 언어 자체를 더 철저하게 해석한다. “행해진 말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에벨링과 푹스 모두 언어 사건을 신학적 사유의 중심에 두었다. 그들의 신학은 “언어 사건의 신학”이라고 불린다. 역사에 대해 올바로 질문하려면 “이 사실은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는, “이 사실에는 무엇이 표현돼 있는가?” / “진정으로 매개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야 한다. (‘무엇’, ‘매개되는 것’은 바로 상징을 의미한다.)

에밀리오 베티는 <정신과학의 일반적 방법으로서의 해석학>에서 “해석의 객관성을 저해”하는 불트만과 에벨링을 포함한 가다머식 접근법을 비판한다. 당시 독일인들의 관심은 슐라이어마허에서 하르트만에 이르는 전통에서 벗어난, 하이데거의 언어철학과 현상학으로 쏠리고 있었다.

법률사가인 베티의 관심은 해석의 양식들을 분류하여 인간 행위와 대상들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기초 원리들을 정식화하는 것이었다. 주관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지만, 베티에 따르면 대상은 스스로 말하며 모든 의미는 대상 안에 들어있다. 베티는 그동안 독일 해석학의 풍조가 ‘의미부여’에만 몰두했다고 지적하면서, 의미부여와 해석의 본질적 차이를 밝히는 게 자신의 목적이라고 규정했다. 즉 원저자의 의도를 특수한 자료들을 이용하여 인식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해석학이다.

객관성이 우선이며 해석자는 자신의 주관성을 모두 대상에 성공적으로 투사해야 한다. 대상의 본질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이 해석의 첫째 규준이다. 둘째 규준은 개별적인 것이 항상 총체성 안에 있다는 원칙이다. 셋째 규준은 의미의 생동성을 인정하는 것인데 해석자 자신의 입장이 반영될 수 있다. 이 셋째 규준은 (베티가 비판하는) 불트만의 ‘선이해’와 어느 정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불트만은 ‘객관적 역사 인식’이 가능하다고 믿는 베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베티가 보기에 가다머의 현상학적 해석으로는 올바른 해석과 그릇된 해석이 구별되지 않는다. 해석의 기준도 없이 실존적 주관성에 함몰된다. 가다머는 베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방법론이 아니라 존재론을 연구한다고 해명한다. 자신(가다머)의 관심사는 이해의 존재론적 성격이고, 전승된 과거가 역사적 텍스트를 이해하는 작용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따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베티를 계승하는 E. D. 허쉬는 저자의 의도야말로 모든 ‘해설’의 타당성(validity)이 측정되는 규범이라고 선언한다. 저자 의도에 대한 해설이야말로 객관적 증거를 향한 실체가 되므로 보편 타당한 의미 규정도 가능해진다. 객관적 ‘의미’는 주관적 ‘의의’와 분리돼야 한다. 이 둘을 마구 섞은 혼란의 주범은 가다머와 불트만 같은 신학자들이다. 현대의 우리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지는 해석에서 중요치 않다.

해석학의 과제는 구절의 언어적 의미를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현대적 해석과 별개여야 언제든 의미를 객관적으로 동일하게 재생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석학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세심한 문헌학이 될 수밖에 없다. 가능한 해석들 중에서 가장 타당한 것을 판정하고 판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이데거적인 조류는 타당성을 취급하지 않으므로 해석학과는 다른 문학 비평의 분야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베티와 베티를 계승하는 이런 해석학의 태도는 언어 철학이 지닌 함축을 무시하고, 그 결과 해석학의 영역을 협소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해석은 인간이 살아가는 언어 세계에 비해서 훨씬 포괄적이다. … 다양한 비언어적 수준들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해석은 모든 인간 생활의 조직체와 서로 결부된다. … 언어란 우리가 살고 있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유지하는 “매개체”라는 사실은 아주 분명해진다. – 28

아리스토텔레스는 해석을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발화행위”라고 정의한다. (17a2) 해석을 이렇게 정의함으로써 수사학과 시학은 해석론의 전망에서 배제된다. 왜냐하면 수사학이나 시학은 청중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할 뿐 참/거짓의 판별문제와는 전혀 관계없기 때문이다. –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