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의 묘

밥심과 똥

모든 준비물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강의 준비물은 든든한 식사다. 1-2시간 전에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해 두는 게 가장 좋다. 2시간을 권하는 것은 1시간쯤 뒤에 화장실 신호가 와서 볼일까지 보면 더 상쾌하게 강의에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한 식사가 필요하다고 적긴 했지만 긴장되는 강의를 앞두고 느긋하게 든든히 식사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는 소화가 잘 되면서도 열량은 높은 음식물을 조금이라도 먹어 두면 도움이 되는데 ‘바나나’가 무척 훌륭하다. 음악 연주자들이 공연 전에 바나나를 즐겨 먹는다. 나는 몸에 잘 맞지 않아서 별로 먹지 않지만 에너지바 같은 것을 먹어도 좋을 듯하다. 공복 상태에서는 머리는 맑지만 몸에 매가리가 없기 때문에 좋은 강의를 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아진다. 잘 먹지 않고 강의를 할 때 우선 발음이 부정확해진다. 강의에서는 필수적으로 일상어와 다른 개념어/전문용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때 또박또박 발음하지 않으면 청중에게 신뢰를 주기 어렵다. 에너지가 없으면 발음이 뭉개진다. 밥을 안 먹은 상태에서는 알고 있는 것도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알맞게 영양을 섭취한 상태에서는 기억이 잘 나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 사이의 연결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순간순간 위트 있는 말과 유머도 훨씬 잘 떠오른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곳이 있다면 이동 경로에 맛도 무난하고 소화도 잘 되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 식사 메뉴와 식당을 찾아서 정해두면 좋다. 기차로 이동한다면 기차역이나 역 주변, 자차로 이동한다면 고속도로 휴게소도 좋다. 나는 자차로 이동할 때는 강의 2시간 전쯤 보이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비빔밥을 먹는다.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 어디든 맛이 다 비슷하고 대체로 다 괜찮다. 주문하자마자 나오기 때문에 시간도 절약되고 채소가 많아서 그런지 똥도 잘 나오더라. 든든하게 먹고 여유 있게 볼일까지 잘 봤다면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강의를 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비포 앤 애프터

2011년쯤 EBS 수능논술팀에서 동영상 강의를 찍자고 연락이 왔다. 잘 준비한 것 같은데, 첫 촬영 때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시선이 탁자로 너무 자주 내려간다고 담당 PD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1회차 촬영을 겨우겨우 마치고 원래 그날 다 찍기로 했던 2회차 강의를 다른 날로 미루었다. 집에서 더 많이 연습을 했다.

2회차 강의는 무난하게 잘 마쳤다. 시선 처리도 훨씬 개선되었다. 3회차 강의는 2회차 때보다 여유가 생긴 탓인지 미소까지 지으며 잘 진행했다. 특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를 설명하면서 내가 보기에 왼쪽에서 오른쪽이 아닌 시청자가 보기에 왼쪽에서 오른쪽이 되도록 손으로 역방향 제스처를 취한 게 기특했다. 연습한 대로 몸이 딱 움직여주었다. 다른 것도 그러하겠으나, 새로운 강의 때마다 이전 강의보다 약간만 더 개선하면 결과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의 복기가 필요하다. 녹음해둔 것, 또는 기억을 짚어가며 일거수일투족을 다시 떠올려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춘천교육청에서 주관한 글쓰기 강의를 복기하려고 녹음한 파일을 찬찬히 들어보았다. 준비한 슬라이드 자료를 가리키며 “뒤에서는 잘 안 보이시겠지만…”이라고 말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2회차 강의 자료를 준비하면서 폰트 크기와 가독성을 대폭 개선하여 뒤에서도 잘 보이도록 슬라이드를 고쳤다. 그러고 강의 직전에 제일 뒷자리로 가서 잘 보이는지 확인까지 했다.

Before: “뒤에서는 잘 안 보이시겠지만…”
After: “잘 보이시죠? 제가 아까 뒤에서 보니까 잘 보이더라고요.”

첫 강의를 앞두고 하는 일

첫 만남은 언제나 긴장되고 떨리며 어색하기 마련이다. 강의도 마찬가지라서 처음 3분의 분위기를 잘 넘기는 게 강사와 수강생에게 모두 필요하다.

화천교육청 주관으로 화천 지역 초등학교와 중학교 여러 곳을 돌며 글쓰기 강의를 했다. 이때 한나절을 일찍 가서 화천 조경철천문대에 다녀왔고 첫 수업 때 그 이야기를 하며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풀었다. 삼척여고에서 글쓰기 강의 요청이 왔다. 렌터카로 다녀왔는데 강의 시작 4시간 전쯤에 도착하여 죽서루에 다녀왔다. 학생들을 처음 만나서 죽서루에 다녀온 이야기,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의 시비를 본 소감 등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재미있게 강의하고 집에 돌아왔다.

전주해성고에서 장기 프로젝트로 8주~16주에 걸치는 인문학/글쓰기 강좌를 열어주었다. <서유견문과 글쓰기>라는 강좌를 개설하였는데, 개강을 앞두고 경기도 하남에 있는 검단산을 다녀왔다. 검단산 중턱에는 유길준 선생의 묘가 있다. 유길준 선생께 현대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선생님의 책으로 강의를 한다고 알려드렸고, 강의가 잘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십사 하고 부탁도 드렸다.

제주 불기도서관에서 인문학/글쓰기 강좌를 열어주었을 때, 첫 강의를 앞두고 강의 시간보다 반나절 정도 일찍 제주에 갔다. 제주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는데 4.3 추모가 먼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택시를 대절하여 4.3평화공원에 다녀왔고, 첫 강의는 무사히 잘 마쳤다.

가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강의 요청이 올 때가 있다. 갤러리아백화점 진주점에서 연락이 왔는데 진주에는 꼭 한 번 다녀오고 싶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강의 반나절 전에 도착하여 국립 진주박물관에 다녀왔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시기 선조가 내린 국문유서가 소장돼 있다. (현재 김해한글박물관 소장) 강의 시작하며 박물관 다녀온 이야기를 하니까 수강생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더라. 강의는 부드럽게 잘 진행되었다.


** 중요한 첫 강의에는 몇 시간 전에 강의 지역에 도착하는 게 좋다.
** 강의를 시작하며 강의 목적, 목표, 방법을 간략히 제시해야 한다.
** 강의 도중에 목적과 목표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강의를 마치며 목표를 달성했는지 확인한다.
** 교재보다 더 재미있게 강의를 하는 건 가능하지만, 교재 수준보다 더 수준 높은 강의는 불가능하다.
** 강의 중에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미리 초반에 배경 장치들을 배치해 두어야 한다.
** 조명 아래에서 강의를 하거나 촬영을 할 때는 입술과 입안이 바짝 말라버리기 일쑤다. 이때는 미리 사탕을 좀 먹어두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