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정리] 메시지의 3가지 층위
* 참조: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까치) p. 220~
* 해설 영상
** 메시지의 3가지 층위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어진 어떤 원과 넓이가 똑같은 정사각형을 그리려고 오랜 세월 동안 노력했는데, 후대에 불가능하다는 점이 입증됐다. 원주율은 어떤 수의 제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지금은 러시아 영토가 된 옛 독일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 주민들은 자기들 마을에 놓인 7개 다리를 중복 없이 한 번에 건너는 방법을 오래도록 궁리했는데, 수학자 오일러가 답이 없음을 증명한 후로 도전할 필요가 없어졌다. 중학교 때 배우는 ‘한붓그리기’ 공식을 만든 수학자가 오일러다. 한붓그리기는 중복 없이 연속으로 한 번에 모든 경로를 지나는 방법인데 쾨니히스베르크 7개 다리에는 한붓그리기가 불가능하다.
정답을 알아내려면 일단 답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정해야 한다. 코르크 마개로 밀봉된 병이 해변가에 떠밀려왔는데 병 안에 종이 같은 것이 들어있다면 분명히 어떤 메시지가 들어있을 거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메시지의 존재’를 알리는 가장 바깥 형식을 ‘틀 메시지’(프레임 메시지)라고 부른다.
상자 포장 → 내용물이 존재함
상자 포장에 리본이 달려있음 → 내용물이 존재함 + 선물 등이 존재함
상자에 붉은색 해골 표시 그려져 있음 → 위험한 내용물이 존재함
틀 메시지를 벗겼을 때 드러나는 표현 형식을 ‘외부 메시지’라고 부른다. 유리병의 코르크 마개를 열고 종이를 펼쳤는데 히라가나로 적힌 글자들이 보인다면 그 히라가나 글자들이 외부 메시지다. 일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보았더니 연인에게 보내는 사랑 편지였음을 알아냈다면 ‘사랑 고백 내용’이 바로 해석의 최종 단계인 ‘내부 메시지’인 것이다. 사랑한다는 내용을 각각 여러 언어로 표현 가능하듯, 내부 메시지를 전달하는 외부 메시지의 형식은 무척 다양하고 많을 것이다. 문자뿐 아니라 이미지/영상/음악 등도 가능할 것이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중에 나일강 하류 로제타 지역에서 작은 비석이 발견되었다. 프랑스 포병 장교가 이 비석을 검토하면서 비문이라는 ‘틀 메시지’를 바로 알아채고 동행한 언어학자에게 보고했다. 언어학자는 비석에 새겨진 그리스 문자(외부 메시지)를 발견하고 바로 번역을 했는데, 외부 메시지처럼 보이는 다른 문자들(외부 메시지)은 해독하지 못했다. 영국의 과학자이자 고고학자인 토머스 영이 다른 한 문자를 해독했고,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이 나머지 문자까지 완전히 해독했다. ‘내부 메시지’는 이집트를 통치하는 그리스 황제의 새로운 정책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내부 메시지는 발견 당시 번역으로 바로 파악되었다. 나머지 문자 영역 역시 그 동일한 내부 메시지를 다른 형식으로 번역한 외부 메시지라고 추정되었는데 이미 알고 있는 그리스 문자들과 대응할 수 없었기에 같은 내부 메시지로 확정하는 데 수십년이 걸렸다. 문자의 일부는 표음문자로 또 일부는 표의문자로 표기되었다는 점을 샹폴리옹이 일일이 구별하여 밝힘으로써 해독이 완료되었다.
인류가 우주로 보낸 물체 중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이저1호(그다음은 보이저2호)인데 태양계 영역을 벗어났다. 보이저호에는 지구와 인류에 관한 정보가 새겨진 골든디스크가 장착돼 있다. 어딘가 존재할 지적생명체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메시지의 3가지 층위를 살펴보자.
내부 메시지: 지구 주소, 인류 소개, 인류가 남긴 문화와 기술, 인사
외부 메시지: 숫자, 부호/그림, 각종 문자/음성(음악)
틀 메시지: 우주선에 단단히 고정되고 변색되지 않는 물질인 금 재질의 디스크
대면 의사소통이 아니라면 세 가지가 골고루 충족돼야 송신자의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수신자에게 전달되어 해석 가능하다.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책 <괴델, 에셔, 바흐>를 읽을 때도 이 3겹의 메시지 구조를 적용할 수 있는데, 난해한 구절을 만났을 때 송신자인 저자 호프스태터가 어떤 내부 메시지를 어떤 외부 메시지 형식으로 어떤 틀 메시지에 담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산스크리트어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번역자나 독자가 산스크리트어를 전혀 모른다면 외부 메시지 파악이 곤란해질 것이며 저자의 내부 메시지 역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괴델, 에셔, 바흐>에는 언어유희가 다양하고 풍부하게 등장한다. 그 중 한 대목을 보자. 대화자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떤 수학자의 이름을 떠올리는 중인데, 바꿔 말하면 저자가 독자에게 한번 맞혀보라며 퀴즈를 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어 번역: 쿠퍼괴델(첫 힌트) → 질버에셔(둘째 힌트) → 골드바흐(정답)
원문: Kupfergödel(첫 힌트) → Silberescher(둘째 힌트) → Goldbach(정답)
내부 메시지: 독일 수학자 골트바흐(Goldbach) 이름으로 해본 말장난
외부 메시지: 독일어 단어처럼 표기된 문자들(금은동에 해당하는 독일어 Gold, Silber, Kupfer를 책의 제목인 괴델, 에셔, 바흐와 결합하여 만들어본 말)
틀 메시지: 책
** Goldbach는 수학자 크리스티안 ‘골트바흐’인데 영어권 발음인 ‘골드바흐’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책은 영어권(미국) 독자를 위해 쓰인 것인데, 독자들이 영어처럼 생긴 단어와 독일어처럼 생긴 단어를 구별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저자가 가벼운 말장난을 시도한 것이다. 괴델(Gödel)이라는 단어에서 독일어 맥락임을 바로 알 수 있다. Kupfer/Copper, Silber/Silver, Gold/Gold … 이렇게 독일어/영어의 표기와 발음이 유사하므로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고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첫째 힌트: Kupfer-gödel = Copper (동, 구리) + 괴델
둘째 힌트: Silber-escher = Silver (은) + 에셔
그렇다면 동과 은이 이미 나왔으니 남은 것은 ‘금’일 테고, 괴델과 에셔가 이미 나왔으니 남은 것은 ‘바흐’다. 따라서 ‘Goldbach’가 답이 된다. 로마자를 공유하는 영어/독일어 독자와 달리, 한국어 독자에게는 한글로 표기된 외부 메시지(표기)와 내부 메시지가 직관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므로, 한글로 표기된 ‘쿠퍼괴델’과 ‘질버에셔’라는 힌트로 ‘골드바흐’라는 답을 바로 연결짓기가 어렵다.
기존 번역: 쿠퍼괴델 – 질버에셔 – 골드바흐
대안 번역: 코퍼괴델 – 실버에셔 – 골드바흐
여기서는 번역 문제를 짚으려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의 3가지 층위 중에서 이해를 어렵게 하는 둘째 층위인 ‘외부 메시지’의 예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물론 해독자 입장에서는 셋 다 어렵다. 과연 메시지가 들어있는지 없는지, ‘틀 메시지’ 존재를 알아내는 건 때로 너무나도 막막하고 어려운 일이다. 메시지라는 확신이 들어 막상 메시지를 펼쳐보았다고 해도 그 외부 메시지가 매우 낯선 표현 형식이라면 난독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외부 메시지를 파악했다고 해도, 작성자의 의도를 충분히 아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제임스 조이스 소설이 난해한 것은, 자기 의식에 떠오른 것을 썼기 때문에 본인 말고는 내부 메시지에 근접하는 게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내부 메시지 – 외부 메시지 – 틀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을 ‘해석’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