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K. 딕(Philip K. Dick), 박중서(옮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폴라북스, 2020(2013).

여전히 나는 꿈을 꾸네, 그가 잔디밭을 지날 때
희미하게 이슬 속에 걷는 그에게
내 즐거운 노래가 스미는 꿈을.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행복한 목동의 노래>에서

- p. 9

“그 돈을 저축했더라면.” … “… 우리도 지금쯤은 진짜 양을 한 마리쯤 사서, 위에 있는 가짜 양을 대신할 수도 있었겠지. 기껏해야 전기 동물이라니.” – p. 14

“그리고 자신의 전기양이 풀을 뜯는, 지붕 달린 옥상 풀밭으로 올라갔다.” – p. 20

“당신의 양은 진짜인가요?’라고 묻는 것은, 누군가에게 당신의 차이나 머리카락이나 내부 장기가 검사를 통해 진짜인지 확인받았느냐고 묻는 것보다 더 무례한 행위였다.” – p. 21

이번에는 진짜 양을 사는 거야. 그는 속으로 말했다. 반드시 하나 살거야. 일종의 보상으로 말이야. – p. 269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나? 릭은 속으로 물었다. 그건 분명해. 그들이 때때로 주인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치는 이유도 그것이니까. 더 나은 삶, 노예 신세가 아니라. – p. 278

“… 우리는 기계죠. 병뚜껑처럼 찍어낸 존재예요. 내가 실제로, 개별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했던 거죠. 나는 단지 한 기종의 견본일 뿐이었어요.” 그녀가 몸을 떨었다. / 릭으로선 재미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레이철은 무척이나 감상적으로 침울해져 있었다. – p. 285


** 요약 정리

에르베 레닝이 지은 수학 교양서인 <세상의 모든 수학>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에서 공상과학소설 저자인 필립 K. 딕은 “로봇은 전자 양을 꿈꾸는가?”라고 자문했다.” 정신분석학자는 수학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10차원의 양을 꿈꾸십니까?” – p. 303

‘꿈꾸다’는 ‘꿈을 꾸는 상태에 있다’와 ‘간절히 바라다’는 두 뜻을 지녔지만, 앞에 목적어가 붙으면 ‘간절히 바라다’는 뜻이 되므로, 여기서는 문장이 약간 어색하다. 어감을 조금 살려서 이렇게 옮기면 어떨까.

“로봇은 전자 양을 꿈꾸는가?” => “안드로이드의 꿈에는 전자양이 나올까?”
“당신은 10차원의 양을 꿈꾸십니까?” => “수학자인 당신의 꿈에는 10차원 양이 나오나요?”

서양 사람들은 잠이 오지 않을 때 양을 한 마리, 두 마리… 세면서 잠을 청한다고 한다. ’sheep’(양)이 ’sleep’(잠)과 철자와 발음이 엇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인간을 쏙 빼닮은 로봇(안드로이드)은 사람처럼 양을 세면서 잠을 청할까, 아니면 자신을 기계로 인식하여 기계양(전자양)을 세면서 잠을 청할까.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소설은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지구에 남은 사람들과, 인간이 정한 규정을 어기고 탈출하거나 인간에게 해를 가한 안드로이드를 색출하는 현상금 사냥꾼의 이야기다. 진짜 동물과 구분이 잘 안 되는 전자 동물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감정을 지닌 안드로이드, 감정이 메말라버린 인간 등의 이야기를 통해 ‘진짜/가짜’의 경계에서 ‘인간다움’의 본질 문제가 제기된다. 진짜 생명체들이 희귀하기 때문에 지구에서 진짜 동물을 키우는 것은 마치 슈퍼카를 굴리는 것처럼 큰돈이 필요한 일이다. 주인공은 전자양을 키우고 있는데 현상금을 모아 진짜 양을 입양하고 싶어 한다.

소설 제목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으로서, 한국어판 제목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라고 번역한 판본도 있다. 전자가 조금 더 중립적인 번역인 반면 후자는 특정 해석에 약간 치우친 직접적인 번역 제목이다.

* ‘안드로이드’는 그리스어 ‘안트로포스’(인간)와 ‘에이도스’(형상)을 결합하여 만든 용어로 ‘인간의 모습을 빼닮은 로봇’(인간형 로봇)이라는 뜻이다.

‘전기양’이라고 보통 번역되는 ‘Electric Sheep’은 진짜 양을 본뜬 기계 양, 즉 전기 공급으로 유지되는 전자 장치인 양을 가리키는데, 정부/전자정부, 우편/전자우편, 책/전자책, 계산기/전자계산기… 등의 친숙한 켤레 개념들을 참조하건대 한국어로는 동력원인 ‘전기’라는 용어보다는 실물(원본)에 쌍을 이루는 개념인 ‘전자’(본뜬 것)라는 용어를 활용해 ‘전자양’이라고 옮기는 게 조금은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작품에도 다양하게 등장하듯, ‘전기 동물’이라 아니라 ‘전자 동물’이라고 부르는 게 위화감이 적다.

작품 제목은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다.

1.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세면서 잠이 들까? dream = go to sleep
2.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이 나오는 꿈을 꾸는가? dream = experience an dream
3.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사서 키우는 꿈을 꾸는가? dream = hope
4. 안드로이드는 차라리 전자양처럼 되기를 바라는가? dream = fantasize

1번, 2번, 3번은 ‘인간처럼’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문장이고, 이 작품에 줄곧 제기되는 주된 문제의식인 ‘인간이냐/기계냐’에 해당한다.

3번처럼 ‘꿈을 실현하는 것’으로 제목을 해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는 278쪽에 나온다.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나? 릭은 속으로 물었다. 그건 분명해. 그들이 때때로 주인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치는 이유도 그것이니까. 더 나은 삶, 노예 신세가 아니라. – p. 278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나? 하는 첫 문장에서 독자는 수면 상태를 먼저 떠올리고 동시에 ‘소망’에 대한 가능성도 조심스레 함께 떠올리게 될 텐데, 뒷부분을 읽어나가면서 ‘간절한 바람과 소망’의 뜻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진다.

4번 해석인 “안드로이드는 차라리 전자양처럼 되기를 바라는가?”에는 ‘인간에게/인간에 의해’라는 수식어가 생략돼 있다. 이것은 일종의 확대 해석에 해당한다. 전자양은 인간들이 키우는 펫(애완동물)으로서, 자유는 없지만 인간의 보살핌을 받으며 안전하게 살아간다. 제거의 표적이 되어 쫓겨다녀야 하는 안드로이드 입장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면서 차라리 전자양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심리 상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의 도입부를 보면, 현상금 사냥꾼 데카드의 아내 아이랜이 “불쌍한 앤디들”(andys, 안드로이드의 애칭)이라고 일컫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이 보기에 안드로이드들은 불쌍한 존재들이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꿈’(dream)에는 수면 상태의 경험인 ‘꿈’과 이루고 싶은 ‘꿈’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중복돼 있다. 꿈은 잠이 들어야 꿀 수 있는데, 간절히 이루고 싶은 것들이 그 꿈속에 자주 등장한다. 따라서 1번(잠을 청함)과 2번(수면 상태의 꿈)이 이어져 있고 2번(수면 상태의 꿈)과 3번(간절한 꿈)이 이어져 있다. 3번은 4번(다른 종류의 소망)과 이어져 있다. 그렇지만 1번(잠을 청함)과 3번/4번(간절한 소망)이 바로 이어지진 못한다.

“안드로이드는 전자양 꿈을 꾸는가?”

이 정도가 여러 해석에 골고루 두루 미칠 수 있는 중간 지점인 듯하다.

인간처럼 양을 세며 잠을 청한다는 뜻도 되고,
인간처럼 양이 등장하는 꿈을 꾼다는 뜻도 되며,
인간처럼 양을 간절히 갖고 싶다는 뜻도 될 뿐더러,
인간의 보살핌을 받는 양처럼 되고 싶다는 뜻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