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번역팀, «후설», 한국고전번역원, 2013.
* 책 내용을 기초로 요약한 것임
인류 역사상 분량이 가장 방대한 문헌은 세계기록유산인 <승정원일기>로서 2억4300만 자에 이른다. 총 분량은 3245책(현대적 개념으로는 3245권)으로서 전란이나 화재 등으로 소실되지 않았다면 원래 분량은 6400여 권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그 중에서 1623년~1910년의 기록만 남아있다. 반 정도가 소실됐는데도 그 기록 분량은 압도적인 세계 1위다.
이 책에는 총 3245책(권) 분량으로 나오는데, 국보 제303호로 지정된 문헌 분량은 3243책(권)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 문의해서 공동 저자의 답변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있어야 할 자료들이 유실되었기에 시기별로 확인된 문서 분량이 다르게 파악되었다고 한다. 당시 ‘3245책’으로 파악한 상태에서 책을 썼으나 현재로서는 서울대 규장각에서 현재 소장하고 있는 원본 기준으로 본 3243책으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두 번째로 분량이 많은 문헌은 세계기록유산인 5400만 자 분량의 <조선왕조실록>이다. 즉, <승정원일기> 분량이 <조선왕조실록> 분량의 5배에 이른다.
<조선왕조실록>이 왕의 사후에 편찬된 것에 비해 <승정원일기>는 매일 바로바로 기록되고 한 달에 한 번씩 펴낸 것이기에 당시 상황이 훨씬 더 생동감 있게 기록돼 있다. 책은 한 달에 한 번 1책(1권)으로 제작됐는데 분량이 많으면 2책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날그날의 살아있는 기록이면서 동시에 후대에 길이 남길 기록이었기에 각 권의 표지는 천년을 견딘다는 재질인 삼베를 썼다.
“후설”(喉舌)은 <시경>에 나오는 구절로서 ‘목구멍과 혀’를 뜻하는데, 임금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승정원을 일컫는 별명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는 일기 내용을 바탕으로 조정의 소식지인 “조보”를 작성하여 이튿날 아침 배포했고, 역로를 통해 보름 내에 전국에 배포했다. <의궤>가 왕의 행차 모습을 이미지로 기록한 것이라면, <승정원일기>는 왕과 관련한 일의 세부 과정을 시간순으로 묘사한 기록 영화의 시나리오 원고에 해당할 것이다.
승정원에는 6인의 승지가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업무를 각각 맡아 임금과의 소통 창구 역할을 했다. 승정원의 책임자는 도승지로서 왕과 신하들 사이의 소통 창구이자 때로 중재자 역할까지 수행했다. 궁궐의 문을 처음 열고 마지막에 닫는 열쇠와 자물쇠의 관리자이기도 했다. 궐 문이 닫힌 야밤에 궁 안팎을 드나들 수 있는 권한도 승정원에 있었다.
‘주서’는 기록관의 직책으로서 2인으로 운영되다가 영조 대에 3인으로 증원되었다. 업무 강도가 너무 세고 심적 부담도 너무 커서 한 달을 채 못 채우고 그만두는 경우가 빈번한 극한직업이었다고 한다. 주서 임무를 잘 수행하면 승지로 승진한다.
<승정원일기>는 날씨와 천문 현상이 시간대별로 기록돼 있을 정도로 자세하고 생생하다. “오경[오전 3시~5시)에 유성이 남두성 위에서 나와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주먹 모양처럼 생겼고, 꼬리의 길이는 3, 4자 정도이며 붉은색이었다.” – 1726년(영조 2년) 음력 3월 26일
후대의 천문학자들이 동시대 다른 문헌들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1759년 조선 밤하늘에 관측되었던 혜성이 핼리혜성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76년 주기 혜성인 것을 고려하건대 1726년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혜성은 핼리혜성이 아니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데이터들을 분석하면 기후 변화라든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다양한 자연현상들을 알아낼 수 있고, 서서히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상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왕의 일과는 5시에 어의가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일로 시작된다. 설사가 잦다든지 변을 하루에 몇 번 보았는지 어의와 주고받는 말도 나온다. 8시 조강(오전 공부)을 비롯해 밤 10시 상소문 읽기까지 쉼 없이 빡빡한 일정이 진행되며 밤 11시에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일과가 끝난다. 1725년(영조 1년) 6월 기록을 보면 “상이 책상을 치고 큰소리를 내어 하교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일기의 앞뒤 맥락까지 살펴보면 상소문을 올린 유생이 임금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꼬치꼬치 따지는 모습, 임금(영조)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발끈하며 책상을 내려치고 화를 내는 모습, 이를 말리고 중재하는 신하들의 모습 등이 시나리오 대본처럼 생생하게 적혀 있다.
영조 7년 11월 17일 일기에는 “박문수가 아니면 누구에게 곧은 말을 듣겠는가.”라는 임금의 말이 적혀 있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강직한 인물 박문수는 임금에게도 직언을 하기로도 유명했다. 임금 영조는 박문수가 자신에게 쓴소리를 하자 다른 신하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승정원일기>는 임금의 공개 일지로서 임금이 특정 내용을 넣고 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상세히 기록한 날의 기록을 지워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역사적 사실은 실록이나 다른 문헌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승정원일기에는 비극적인 그날 기록을 빼달라고 요청을 했고, 영조가 받아들이고 승정원이 동의함으로써 해당 부분이 빠졌다.
<승정원일기>가 초서로 작성되었기에 번역에 큰 어려움이 있다. 1960년부터 1977년까지 영인본 141책에 해당하는 분량이 초서에서 해서로 고쳐졌고, 1993년부터 본격적인 번역이 시작되었다. 매년 총 분량의 1퍼센트 정도를 진척시키고 있는데, 최근에는 AI를 투입하여 번역 속도를 높이는 중이다. 요즘 AI의 발전 속도를 보건대 <승정원일기>의 완역 시기는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