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철학 고전 강의〉 읽기
인문학 공부는 자기반성에서 시작하여 세계에 대한 호기심, 무한한 것을 향한 갈망으로 나아간다. 무한한 것은 진리일 수도 있고, 어떤 올바름일 수도 있고,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신적인 어떤 대상일 수도 있다.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라고 적었는데, 그것은 매일매일 독서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반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가시 돋친 말을 내뱉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먼저 성찰을 하는 것이 독서보다 훨씬 중요하다. 물론 성찰의 매개로 독서만큼 좋은 것도 드물 것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따져묻는 태도가 철학적 태도다. 책을 펼쳐서 글자들을 읽을 때 해당 구절의 뜻을 파악하는 행위,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텍스트의 맥락과 상징을 이해하려는 행위, 또 그보다 더 근원적인 바탕은 무엇일지 생각하며 책을 읽는 것, 그것이 인문학 공부의 바람직한 태도다.
아무 책이나 그런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 앞서 그런 사유를 오랜 세월동안 연습하고 연마하고 아름답게 다듬어온 사람이 쓴 글이라야 가능하다. 인문학의 영역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을 따져묻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일컫는다. 근본적인 것이라 하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의 근원은 무엇인가, 생명은 어디서 왔는가, 죽음을 알 수 있는가, 삶의 본질은? … 세상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 세계를 이루는 기본 요소? 그리고 우리를 구성하는 정신과 물질… 앎의 원천, 진리…
이 책 <철학 고전 강의>의 표지에 철학적 태도를 집약한 문구가 부제로 달려 있다.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무슨 뜻일까요? 유한자는 어떤 한계 안에 있는 존재, 저와 여러분, 우리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시간이라는 한계 안에 있고, 세계라는 공간의 한계 안에 있는 유한한 존재 말이다.
자,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 구절 한 구절 차근차근 살펴보겠다. 여기에 ‘사유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달려 있다. 우리는 한계 안에 있지만 끝없이 ‘사유하는’ 활동을 함으로써 그 한계 밖의 것에 관심을 가진다.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신이 인간에게 내린 ‘끝없이 사유하라’는 명령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근원적인 것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불변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변화하는 세계의 불변하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불변하는 것을 향한 호기심은 무한한 존재를 향한 외경심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의 의미일 것이다.
책을 얼른 읽지 않고 책 표지에 머물면서 부제를 천천히 곱씹어 보는 까닭은, 그것이 이 책이 알려주는 철학 공부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되물으며 읽는 것, 우리는 그것을 비판적인 독서라고 부른다.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철학적 태도다.
계속 근원적으로 자문하다 보면 더 이상 해명하기 어려운 곳에 이르게 된다. 철학적 사유는 거기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우리의 공부는 거기서 멈추거나, 또는 지적인 도약을 이루거나, 둘 중 하나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기에 선택할 수 있다. 과감하게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용감한 지적 도약, 그것이 철학이 우리에게 불어넣는 앎의 태도다. 11쪽에 나오는 말처럼, 철학을 한다는 것,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변함 속의 인간이 변함 없음을 향해 가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유한자이지만 경이롭게도 우리가 지닌 정신은 무한함에 가깝다. 따라서 ‘사유하는 유한자’는 ‘무한자를 닮은 유한자’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한 탐구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지, 그 안에서 자신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를 막연하게나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막연하게나마’라는 표현은 모호하고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매우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중의적이며 반어적인 표현이다. 철학적 태도를 지닌 자의 정신 안에, 어슴푸레 밝아오는 진리의 여명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15쪽에 철학을 가리키는 ‘필로소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 철학을 의미하는 ‘필로소피’라는 말은 ‘사랑한다’라는 뜻을 가진 ‘필리아’와 ‘지혜’라는 뜻을 가진 ‘소피아’가 합해진 것입니다. 필리아는 공부하는 태도나 방법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소피아입니다. … 지식/지혜라는 말 자체가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태도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따라서 철학과 존재론은 근원적으로 같은 말이다. 철학적 태도는 더 근원적인 것을 보고자 하는 태도이며, 부분이 아닌 전체를 바라보려는 태도다. 따라서 철학적 태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탐구하는 태도인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유한한 우리가 무한을 사유할 수 있는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6부로 구성된 책의 내용을 개괄해 보자.
제1부. 희랍 철학의 시작: 세계 전체에 대한 통찰
부제의 키워드는 ‘전체’일 것이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후대의 기준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신화와 비유로 서술되었다 해도, 세계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합리적 관점으로 해명했다는 점에서는 철학적 사유의 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코페르니쿠스와 지동설이 체계를 바꾸기 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우주를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체계적 이론이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 원리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 원리에 주목했다. 세계의 필연적 법칙을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더 많다고 하겠다.
근대의 경험론과 합리론은 접근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 진리 인식의 원천을 인간에게 둔다는 점에서 더 넓은 공통점을 지녔다.ㅍ동아시아의 심선설(성선설)과 정악설(성악설) 역시 인간의 올바름을 실현한다는 목적에서 공통점이 더 많은 것처럼 말이다.
제2부. 플라톤: ‘좋음’ 위에 인간과 공동체를 세우려는 노고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라는 저술에서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각주들 같다고 적었다. ‘좋음’ 위에 인간과 공동체를 세우려는 기획과 노고는 현실 세계에서 실현된 적이 없지만, 우리가 2천년 넘게 플라톤을 읽고 있는 것은 그가 우리 삶과 세계의 본질적인 것을 통찰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평생 동굴 벽에 온몸이 결박되어 한쪽 벽만 바라보며 살아가는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는 참된 진리를 얻고자 애를 쓰고, 동굴 밖 태양빛의 눈부심에 괴로워하다가도 이내 태양 자체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품는 존재다.
제3부. 아리스토텔레스: 희랍 형이상학의 체계적 완결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형이상학, 자연학,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 수사학, 시학에 이르는 학문의 전 영역을 아우르고자 했다.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근본 학문이 형이상학으로서, 그는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경험 세계에서 출발하여 사물의 근원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세계가 4가지 원인으로 굴러간다고 해명한다. 목적인, 형상인, 질료인, 작용인이 그것인데, 집짓기에 비유하자면, 집을 지으려는 의지와 용도(목적인), 설계도(형상인), 건축 자재(질료인), 노동력(작용인)이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모순 형용 같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부동의 원동자”라는 근본 원인으로서 자신은 생성되거나 변화하지 않으면서도 세계를 생성하고 변화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과 존재론과 신론을 통합하여 설명한다. 이성과 신앙을 조화롭게 해명하고자 했던 중세의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주목받았던 이유다.
제4부. 데카르트: 주체인 인간의 세계 구축
인간이 진리 인식의 주체라는 점을 표명했다. Cogito(나는 생각한다) 진리의 원천은 여전히 신이지만 진리 인식의 원천은 분명한 자기의식에 있다. 신이 보증하는 이성, 신을 닮은 인간의 의식으로 우리는 확실성을 얻을 수 있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되는 근대인의 자신감은 모든 앎을 아우르는 절대지를 얻어 신적인 인식에 이르는 헤겔의 기획이 그 종착점이라 하겠다. 확실성에 이르기 위해 데카르트가 채택하는 학적 방식은 수학인데 수학이 구축하는 형식 체계가 확고부동한 진리를 보증한다고 믿었던 20세기 초의 수학자 힐베르트의 야심은 유클리드와 데카르트를 거치면서 다져진 자신감의 소산일 것이다.
제5부. 칸트: 인간의 한계 자각과 ‘장래의 형이상학’
칸트는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나눔으로써 기존의 초월적 형이상학과 결별한다. (순수이성 비판)
그럼에도 도덕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초월적인 것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상정하고 또 요청한다. (실천이성 비판)
우리가 자유의지로 바라는 것이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문제도 궁리하였다. (판단력 비판)
제6부. 헤겔: 신적 입장으로 올라선 인간
헤겔은 형이상학에 시간과 역사를 불어넣었다. 헤겔에게 철학은 철학사이며, 진리란 모든 단계를 거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과정이다. 철학은 근본적인 것을 따져묻고 파고드는 학문이라고 했다. 학자마다 그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무한자를 알고자 하는 유한자의 노고’라는 관점에서 서로 묶여 있다.
소크라테스는 앎의 여러 단계 중 첫째가 ‘무지의 지’라고 말한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지의 지’는 밟고 지나가버려도 되는 계단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겹겹이 쌓여가는 다층적인 앎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가장 아래에 항상 깔려있는 바탕 레이어 같은 것 아닐까.
인간은 원자로 이루어지고 원자는 분자를 이루며 세포를 이룬다. 우리는 언제부터 인간으로서 ‘있는’ 걸까? 소립자 세계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서 전자는 양쪽에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있음’이란 무엇인가? 인간 지능이 인공지능과 구별할 수 없는 때가 온다면, 데카르트를 다시 꺼내 읽게 될까? 질량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습만 바뀔 뿐 총량은 항상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점을 학자들이 밝혔고, 그 후대 학자들은 에너지 역시 모습만 바뀔 뿐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점을 밝혔다. 그 후대 학자는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모습만 바꿀 뿐 동일한 존재임을 밝혔다. 변하는 것들에서 변치 않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과연 그것은 최종적 진리일까?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이 실은 하나임을,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직관으로 알았다. 있음이란 무엇이며 생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을 여전히 알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공부하고 철학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