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진석용 옮김,《신기관》, 한길사, 2001.

1권 : 파괴편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전적 세계관과 결별하고 새로운 학문 탐구 방법을 제시하려고 했다. <신기관>(Novum Organum)이라는 제목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Organum, 논리학을 가리킴)을 겨냥한 것이다. 이 책은 ‘파괴편’과 ‘건설편’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권에서 파괴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들이다. 학문의 혁신을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을 유린하는 우상과 그릇된 관념들을 제거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에는 네 가지가 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성 그 자체에, 인간이라는 종족 그 자체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우주를 인간 중심으로만 파악하려고 하는 데서 나온다. 표면이 고르지 못한 거울은 사물을 본 모습대로 비추지 못한다. 인간의 지성도 그와 비슷한 면이 많다.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우상이다. 각 개인은 자연의 빛을 차단하거나 약하게 만드는 동굴 같은 것을 마음 속에 갖고 있다. 선입관이나 편견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인간 상호 간의 교류와 접촉에서 생기는 우상이 있는데 ‘시장의 우상’이다. 인간은 언어로써 의사소통을 하는데 그 언어는 일반인들의 이해수준에 맞추어 정해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말이 잘못 만들어지면 지성은 심각한 방해를 받는다. 언어는 지성에 폭력을 가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공허한 논쟁을 일삼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철학의 다양한 학설과 그릇된 증명 방법 때문에 사람의 마음 속에 생기게 된 우상이 있는데 ‘극장의 우상’이다. 지금까지 고안된 철학 체계들은 연극 대본과 같은 것이다. 그릇된 논증의 규칙에 의해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주입되고 때로 그들에 의해 신봉되기도 한다. 속담에 이르기를, 절름발이도 길만 바르면 헤매는 준족보다 빠르다고 했다. 길을 잘못 접어들었을 때에는 걸음이 빠르면 빠를수록 정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법이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극장의 우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우상 중에서 가장 성가신 것은 시장의 우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이 언어를 지배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언어가 지성에 반작용하여 지성을 움직이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에 철학이나 여러 학문들은 궤변으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무겁다’ ‘가볍다’ ‘희박하다’ ‘빽빽하다’처럼 성질을 가리키는 말들에서 잦은 실수들이 유발된다. 인간의 지성은 무엇이든 추상화하는 본성이 있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의 것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인간 정신은 어떤 것이든 곧바로 일반적 명제로 비약하여 그곳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지식이 곧 인간의 힘이다. 참된 지식의 성립을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다. 삼단논법은 명제로 구성되고, 명제는 단어로 구성되고, 단어는 개념의 기호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개념들이 모호하거나 함부로 추상화된 경우, 그런 개념들을 기초로 하여 세운 구조물은 결코 견고할 수 없다. 따라서 참된 귀납법만이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감각과 개별자에서 출발하여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상승한 다음, 궁극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명제에까지 도달하는 방법이다.

철학이 저지르는 무절제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독단이요, 다른 하나는 아무 목표 없는 연구 태도다. 전자는 지성을 억압하고 후자는 지성을 약하게 만든다. 인간의 감각이나 지성은 연약하기 때문에 언제나 도움이 필요하고 철학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시간은 강물과 같아서 가볍고 동동 뜨는 것들만 실어 나르고, 무겁고 견고한 것은 가라앉히고 만다. 모든 징후 중에서 그 결과보다 더 확실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다. 결과와 성과야말로 철학의 진리성을 보장하는 보증인이다. 고대에 대한 무조건적 숭상과 철학계 거장들의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일반적 동의가 학문의 진보를 더디게 한다. 고대인은 우리와 비교하면 연장자들이지만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우리보다 더 어린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고대보다 더 많은 나이와 더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진리는 시간의 딸이지 권위의 딸은 아니다.

지적인 문제에서는 만장일치로 내리는 결론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대중의 찬성은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통속적인 개념의 끈으로 지성을 꽁꽁 묶어놓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적 동의를 얻어 지금까지 군림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또한 논박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학문의 진보를 방해한 것이 많았다고 해서 희망을 잃을 필요는 없다. 그것이 많을수록 앞날의 희망의 근거도 그만큼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발견은 자연의 빛에서 구할 것이지 옛 시대의 암흑에서 찾으려 할 것이 아니다.

학문의 진정한 목표는 여러 가지 발견과 발명을 통해 인간 생활을 풍부하고 윤택하게 하자는 것이다. 올바른 순서를 알고 그것을 따를 때에 학문의 진보가 이룩된다. 우리의 주장은 인간의 감각을 깔보자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자는 것이며, 인간의 지성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버리는 일, 그리고 적당한 시기가 될 때까지 성급한 일반화의 유혹을 물리치는 일, 이 두 가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2권 : 건설편

베이컨은 <신기관> 1권 ‘파괴편’에서 인간 정신을 미혹하여 지식 발전을 저해하는 우상들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권 ‘건설편’에서 다루는 것은 우상을 파괴하는 것과 더불어 수행해야 할 인간 지식의 수립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학자는 우연히 얻은 경험이 아닌, 계획된 실험을 통해 얻은 경험에서 1차적인 공리를 이끌어 내고 이 공리에서 다시 새로운 실험을 전개해야 한다. ‘원리나 핵심 공리’를 전제한 삼단논법의 결론은, 베이컨이 보기에는 자연에 대한 예단에 불과했다. 모든 탐구에서 어둠과 난관을 물리치는 밝은 진실의 빛은 오로지 1차적인 공리로부터 나온다. 1차적인 공리란 바로 사물의 형상을 발견하는 데에 필요한 중간 수준의 공리(intermediate axiom), 즉 실험과 경험을 통해 매개된 결론을 가리킨다.

인간이 규명해야 할 것은 사물의 형상, 즉 사물의 법칙이다. 사물의 본성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아야 어떤 물체에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거나 추가할 수 있다. 즉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신기관>의 부제는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이다.

인간의 힘과 인간의 지식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이 해야 할 일은, 어떤 물체의 본성의 형상이나 그 본성의 진정한 종차(種差), 그러한 본성을 낳은 본성, 그러한 본성이 유래되는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용인(efficient cause)과 질료인(material cause)이 형상을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과정, 즉 모든 물체의 생성과 운동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 과정을 발견하는 것이며, 운동하지 않고 정지해 있는 물체에 대해서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의 본성을 알아내기 위해 베이컨은 열의 존재표, 열의 부재표, 열의 비교표를 꼼꼼하게 작성한다. 이 세 가지를 견주어 봄으로써 열의 본성을 귀납적으로 추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중간 수준의 공리를 수립하는 방법을 시연한다.

형상을 발견하기 위해 참된 귀납법이 먼저 해야 할 일은 (1) 탐구대상본성이 존재하는 사례들을 놓고 보았을 때 그 사례에서 발견할 수 없는 어떤 본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2) 탐구대상본성이 부재하는 사례들을 놓고 그 사례들 중에서 발견되는 어떤 본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3) 탐구대상본성이 증가하는데도 감소하거나 혹은 그 반대현상을 보이는 어떠한 본성들이 있는지를 살펴본 다음, 이러한 본성들을 찾아내어 제외하거나 배제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한 번에 직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으로서 공리를 파악하는 것은 형상의 부여자인 하느님이나 할 수 있는 일이며, 인간은 그러할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부정적 사례에서 출발하여 하나씩 그것들을 배제함으로써 긍정적 사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귀납 추리의 단점은 새로운 사례가 등장할 때마다 매번 다시 검증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절대적 기준에 대한 회의적 태도이지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과학의 개방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