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플라톤(Plátōn), 박종현 역주, «국가·政體», 서광사, 2011.

* ( ) 안의 내용은 본문에 나온 말이고 [ ] 안의 내용은 앞뒤 문장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려고 역주를 참조하여 덧붙인 말이다.
* 본문은 대화체로 이루어졌는데 요약하면서 설명체로 바꾸었다. 서술자를 따로 밝히지 않은 문장은 모두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제1권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의 권유로 그의 집에 가서 그의 아버지인 케팔로스를 만난다. 노년 생활이 어떠한지 소크라테스가 묻자 케팔로스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큰 평화와 자유가 생겼는데 그것은 갖가지 욕망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활 방식 때문이라 답한다.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는 건 그런 생활 방식 때문이 아니라 많은 재산 덕분 아니냐고 소크라테스가 말하자, 케팔로스는 이에 동의하면서 많은 재산으로 덕을 많이 봤다고 대답한다.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 주고 신께 제물을 제대로 바칠 수 있으며 남에게 빚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친구에게 무기를 받았다가 그 친구가 미친 상태로 왔을 때 돌려주면 안 되듯, 올바름은 남에게 받은 것을 고스란히 되갚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게 아니라 말한다. 제사에 바칠 물건을 살피러 케팔로스가 자리를 뜨자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논의를 이어받는다. 폴레마르코스와 소크라테스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올바름이라고 시인 시모니데스가 말한 의도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일일 것이라는 데 일단 동의한다.

의술은 몸에 대해 합당한 약과 음식을 주는 기술이다. 요리술은 요리에 합당한 조미를 해 주는 기술이다. 이런 기술처럼 올바름이 친구에 대해 합당한 이득을 주고 적들에게는 합당한 해를 입히는 방책이라 규정하는 폴레마르코스에 따르면, 의사가 병든 친구에게 잘 해 주거나 병든 적들에게 잘못되게 해주는 데 가장 유능한 것처럼 올바름은 싸움이 일어났을 때 가장 유용할 것이다. 그러면 올바름은 평화시에는 쓸모없는 것이 되는데 폴레마르코스는 금전 거래와 계약에서 올바름이 쓸모가 있다고 말한다.

장기를 둘 때 쓸모있는 상대는 올바른 이가 아니라 기사다. 벽돌을 쌓을 때 쓸모있는 상대는 올바른 이가 아니라 건축가다. 그러면 올바른 이는 무엇을 할 때 쓸모가 있을까? 돈을 사용해 사거나 팔 때는 거래 대상을 잘 아는 전문가가 쓸모가 있지 올바른 이는 별로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정작 올바른 이의 쓸모는 돈을 쓸 때가 아니라 안전하게 맡겨놓거나 사용하지 않을 때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올바름은 쓰지 않을 때 쓸모가 있다는 말이니 다른 기술에 비해 그다지 요긴한 것이 못 된다.

질병을 막는 데 능한 이는 몰래 병을 생기게 하는 데도 능할 것이다. 유능한 수호자는 유능한 도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올바른 이가 돈을 간수하는 데 능하다면 훔치는 데도 능할 것이다. 그러면 올바름은 도둑질처럼 나쁜 것에도 관여하는 기술이냐고 소크라테스가 묻자, 폴레마르코스는 난처해하며 그럼에도 올바름이란 친구들에 대해서는 이로우나 적들에게는 해로움을 주는 것 같다 말한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건 모호하며 잘못된 판단에 따를 때가 많아서 실제로는 선량하지도 않으면서 선량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많지 않냐고 소크라테스가 지적하자, 선량하다고 여겨질 뿐 아니라 실제도 선량한 사람을 친구라고 다시 규정하자며 폴레마르코스는 다시 제안한다.

폴레마르코스에 따르면 실제로 좋은 친구에게 이롭게 하고 실제로 나쁜 적에게 해롭게 하는 것이 올바름이다. 어떤 것이든 해를 입으면 그 훌륭함은 나빠진다. 사람도 해를 입으면 인간적 훌륭함은 더 나빠진다. 올바름이란 인간적 훌륭함이다. 시가에 밝은 사람이 훌륭한 시가 기법으로 사람들을 비시가적으로 만들 수는 없듯, 훌륭한 사람이 훌륭함을 가지고서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진 못한다. 해를 입히는 것은 훌륭한 사람의 기능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자의 기능이다. 따라서 올바름이 적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됐다.

트라시마코스가 갑자기 야수처럼 끼어들어 소크라테스를 향해 스스로 대답하지 않으면서 남이 대답하면 그 주장을 붙들고 논박만 하고 있다며 올바름이 대관절 무엇인지 명확하게 답해달라 요구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시 트라시마코스로 하여금 먼저 말하게끔 한다. 트라시마코스가 보기에 현실에서 올바른 것이란 더 강한 자의 편익일 뿐이다. 나라마다 힘을 행사하는 것은 지배하는 쪽이다. 각 정권은 자기 편익에 따라 법률을 제정한다. 법을 제정하고 나면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 공표하고 법을 위반하는 자들을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질렀다며 처벌한다.

올바른 것이 아무튼 이익이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도 동의한다. 트라시마코스에 따르면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건 올바른 일이다. 그런데 통치자들도 실수를 하기에 어떤 법률은 옳지 못하게 제정되기도 한다. 법률에 복종하는 것이 올바름이라면 편익이 되지 않는 법률을 따르는 일도 올바르다. 이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의사가 의술의 전문가라 불리는 건 실수 탓이 아닌 것처럼 통치자도 최대한 실수하지 않고자 하고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제정하고자 하니 다스림을 받는 이들은 이를 이행해야만 한다고 해명한다.

참다운 의사는 자신을 위해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술의 대상이 되는 환자들을 돌보는 사람이다. 의술은 의술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기보다 몸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듯, 모든 기술은 그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기보다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한다. 모든 전문 지식이 그러하듯 통치술 역시 다스림을 받는 대상들의 편익을 염두에 둔다. 올바름이 강자의 편익이라고 한 자신의 주장과 반대 결론이 나오자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고 불평한다. 올바른 이는 올바르지 못한 이보다 항상 덜 가지며,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한 자는 행복을 누리지만 올바른 이들은 비참해진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올바르지 못한 짓이 큰 규모로 저질러지면 올바름보다 더 강하고 자유로워진다.

의술을 보수 획득술로 부르지 않고 조타술을 보수 획득술로 부르지 않는 것은, 전문가가 무상으로 일을 할 때도 그 일에 대해서는 이득을 주는 것처럼 전문가들이 이득을 보는 것은 보수 획득술이라는 추가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스리는 일을 맡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돈이든 명예든 벌이든 어떤 보상이 필요하다. 보상으로서 벌을 거론한 의도에 대해 글라우콘이 묻자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통치하려 하지 않는 이에게 가장 큰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하는 것이기에 훌륭한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통치를 맡는다고 설명한다.

참된 통치자는 본성상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지 않고 다스림을 받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한다. 올바르지 못한 사람의 삶이 더 낫다고 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서로 좋은 점들을 따져보고 판정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사람은 올바른 사람에 대해 굳이 그를 능가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한 가장 많이 취하려고 경쟁할 것이다.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은 동일한 일처리를 두고 자신과 같은 사람과 동일한 선택을 하지만 전문 지식이 없는 자는 모든 경우에 누구든 능가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이를 닮았으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못되고 무지한 이를 닮았다. 올바름은 훌륭함이며 지혜이지만 올바르지 못함은 나쁨이며 무지다. 올바름이 정녕 지혜이며 훌륭함이라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강한 것임도 쉽게 드러날 것이다. 어떤 집단이 올바르지 못하게 뭔가를 도모하면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올바르지 못함은 대립과 증오를 가져오는 반면 올바름은 합심과 우애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올바르지 못함이 한 개인 안에 깃들게 되면 갈등이 생기고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한결 유능하게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은 지혜로우며 훌륭한 이들이다.

눈말고 다른 것으로 볼 수 없고 귀 이외에 다른 것으로 들을 수 없듯 모든 기능에는 각각 가장 훌륭한 상태가 있다. 나쁜 상태를 지니고서 제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훌륭한 상태를 빼앗기면 제 기능을 잘못 수행한다. 우리는 모든 것에 이런 이치를 적용할 수 있다. 혼의 기능은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 심사 숙고하는 것 등이다. 즉 사는 것이라 말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면 혼의 훌륭한 상태가 있으리라. 혼이 훌륭한 상태를 앗기고도 자신의 일을 훌륭하게 수행할 순 없다. 올바름은 혼의 훌륭한 상태라는 데 동의했으므로, 올바른 사람은 어쨌든 행복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이는 그 반대일 것이다.


제2권

글라우콘은 트라시마코스가 포기하다시피한 주장을 되살려 내면서, 소크라테스에게 올바른 것이 올바르지 못한 것보다 모든 면에서 더 나음을 진정으로 설득하고픈 거냐 묻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고 답한다. 좋음에는 세 종류가 있다. 결과를 바라서가 아니라 오직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있다. 결과가 좋아서 좋은 것도 있다. 그 자체도 좋을 뿐더러 결과도 좋은 것이 있다. 이 세 가지 중에 올바름은 어디에 속하냐고 글라우콘이 묻자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뿐 아니라 생기는 결과도 좋은 그런 종류에 속한다고 답한다.

글라우콘이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은 평판이나 명성 같은 결과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좋은 것은 까다롭고 기피해야 할 종류라 여길 뿐이다. 글라우콘의 관심사는 좋음들 각각에 어떤 힘이 깃들어있는지 아는 것인데,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되살려서 사람들이 정의하는 올바름과 그 기원, 사람들이 올바름을 실천하는 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렇게 마지못해 실천하는 올바름도 온당하다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해서 입는 나쁨과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름으로 얻는 좋음을 모두 경험한 사람들이 서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법률과 약정을 제정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이 법을 따르면 합법적이며 올바르다. 이것이 올바름의 기원이며 본질 같다. 가장 이득이 되는 경우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가장 손해가 되는 경우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하고도 보복을 할 수 없는 때다. 올바름은 그 극단의 중간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올바름을 실천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올바름을 실천하는 실제 까닭은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무능 때문일 것이다. 각자 욕망의 자유를 지닌다면 그 욕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게 해 주는 기게스의 반지를 올바른 사람과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각각 하나씩 낀다면 올바른 사람이라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휩쓸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올바름이란 자발적인 게 아니라 부득이하게 나오는 것일 뿐이다.

가장 올바른 이와 가장 올바르지 못한 이를 대비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이들이 각자 능력이 완벽한 사람이라 상정하자. 한쪽은 올바른 짓을 저지르면서도 가장 좋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며, 다른 한쪽은 올바르지 않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가장 나쁜 평판을 듣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절제와 올바름이 아름다운 것이되 힘들고 수고로운 것이며, 무절제와 올바르지 못함은 달콤하고 얻기 쉬운 것이되 수치스러운 것이라 말한다. 나쁨은 쉽게 취할 수 있지만 훌륭함을 얻는 길은 멀고 가파르다. 아데이만토스는 이런 점을 들어, 소크라테스를 향해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낫다는 원론적인 주장만 펼 게 아니라 당사자에게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밝혀달라 요구한다.

소크라테스가 설명하기를, 올바름에는 한 사람의 것도 있지만 나라 전체의 것도 있다. 더 큰 규모인 나라의 올바름을 알아내는 것이 올바름을 따지기에 더 쉬울 것이다. 그런 다음 규모가 작은 올바름을 검토하면 된다. 나라가 생기는 것은 사람들 각자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음식물, 주거, 의복 같은 것을 마련하려면 생활공동체가 필요하다. 우리는 성향상 다르게 태어나서 저마다 다른 일을 하는 데 적합하다.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에 종사하면 그 일을 훨씬 잘하게 된다. 점점 더 많은 장인이 필요하다. 나라에 필요한 것이 많아지면 화폐가 필요할 것이며 다른 나라와 교역이 필요할 것이다. 도매상과 소매상, 임금노동자가 출현한다. 이 사람들 상호 간에 어떤 필요에 의해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이 생겼을 것이다.

자급자족하는 ‘돼지들의 나라’(최소 국가)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호사스러운 나라’를 추구한다. 전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했던 영토는 작아빠진 것이 된다. 이 모든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온갖 것을 갖추려면 나라를 한층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 재화를 끝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에 자신을 내맡긴다면 모자른 땅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전쟁의 기원이다.

전쟁을 하려면 전투에 유능한 전사 집단이 필요하다. 이 수호자들은 격정적인 성품과 온순하면서도 대담한 성품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데 반대되는 두 성품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 얼핏 불가능해보일지 모르지만, 혈통 좋은 사냥개처럼 온순함과 용맹함을 동시에 갖추는 건 분명 가능하다. 이들은 격정(thymos)에 더하여 기질상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양육되고 교육받도록 할지 고찰하는 것은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이 어떤 방식으로 생기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몸을 위한 교육으로 체육이 있고 혼을 위한 교육으로 시가가 있다. 시가는 이야기에 속하는데 이야기에는 사실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이 있다. 어리고 연약할수록 설화들을 쉽게 받아들이므로 신과 영웅들에 관해 나쁘게 묘사한 설화나 신들끼리 전쟁을 일으키는 설화는 조심해야 한다. 이들이 처음 듣게 되는 이야기들은 가장 훌륭하게 지어진 것들이어야 한다. 신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 선한 것들 치고 해로운 건 없으며 해롭지 않은 것이 해치거나 나쁜 짓을 할 순 없다. 그러니 좋은 것이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 신의 선함과 훌륭함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적은 좋은 것들의 원인일 뿐이다.

몸이 건강하고 강하면 주변 영향들에 의한 변화를 덜 겪는 것처럼 혼이 가장 용감하고 분별 있는 경우에 외부의 영향이 혼을 변화시킬 가능성은 가장 적을 것이다.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은 다른 것에 의한 변화를 가장 적게 입는다. 신은 아름다움과 훌륭함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으므로 만일 변한다면 더 나빠질 뿐일텐데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자발적으로 속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혼이 속거나 속고서도 모르는 것을 몹시도 싫어할 것이다.

진짜 거짓은 신들뿐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미움을 산다. 말을 통한 거짓은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것으로 때로 유익하게 작용하기도 하지만 거짓말이 신을 유익하게 하는 경우란 없다. 그러니 우리의 수호자들이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 최대한 신을 경배하며 거룩한 이들이 되도록 하려면 시인들은 이 규범에 맞추어 이야기나 시를 지어야 할 것이며, 또한 법률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3권

신을 숭배하고 어버이를 공경하며 우정을 중시하는 건 기본 자질이다. 용감해지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끔 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운명을 비관하는 이야기, 이름난 인물들의 통곡이나 비탄을 다룬 이야기를 조심해야 한다. 훌륭한 이들에게 죽음은 무서운 일이 아니다. 자족하며 사는 사람은 자식이나 형제, 재화를 빼앗기는 것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소한 고난에도 애가를 부르며 통곡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며, 그렇다고 웃음에 사로잡혀서도 안 될 것이다.

참으로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은 정직이다. 그런데 거짓은 신에게는 무용하지만 인간에게는 약처럼 때로 유용하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통치자에게는 이것이 허용된다. 그 외에 거짓은 허용되지 않으니 젊은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절제가 요구된다. 흥분과 욕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언행으로 인내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젊은이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시인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신들이 나쁜 일들을 생기게 하며, 영웅들이 보통 사람보다 별로 나을 것 없다고 믿게끔 해서는 안 된다. 젊은이들 마음에 사악함에 대한 무관심이 생기게 해선 안 된다.

이제 남은 건 평범한 인간들에 관한 것일텐데 시인들과 산문 작가들이 가장 중대한 것들을 잘못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지금으로선 결정지을 수 없다. 이 작가들은 올바르지 못한 자들이 행복을 누리고 올바름은 손해를 끼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올바름이 어떤 건지, 올바름을 지니면 자신에게 본성상 어떻게 이득이 되는지 알아낸 후에야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와 관련한 건 이 정도로 일단락 짓기로 하고 이야기투에 관해 살펴보자. 모든 이야기는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이야기 진행이다. 단순한 이야기이거나 모방을 통한 이야기 진행이거나 그 둘을 모두 쓰거나 한다. <<일리아스>>의 첫 부분에서는 시인이 직접 이야기한다. 다음 부분에서는 시인이 아닌 크리세스가 이야기하거나 제관이 이야기하는 듯하다. <<오디세이아>>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등장 인물을 최대한 닮고자 표현한다는 점에서 모방을 통한 이야기 진행이다. 시인이 자신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할 때는 모방 없이 진행될 것이다. 시인의 말을 모두 제거하면 등장 인물의 대사만으로 이루어진 전적인 모방으로 채워질 것이다.

앞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고찰했다면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하는지 고찰하려 한다. 과연 무엇을 모방의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또 무엇을 그래선 안 되는지 결정해야 한다. 이를 수호자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수호자의 자질은 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훌륭히 수행하는 데 있다. 수호자는 자신이 기여하는 것 외에 어떤 것에도 매달려선 안 되며, 용감하고 절제있고 경건한 사람들만 모방해야 한다. 젊은 시절의 모방은 성향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절도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의 말투나 행동을 모방하고자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모든 것을 무조건 따라하려 들 것이다. 이런 이들은 분별 없이 이것저것 모방하므로 이야기로 진행하는 부분은 적을 것이다.

적은 변화들만 갖는 이야기투가 있고 갖가지 선법과 리듬이 필요한 이야기투가 있다. 적절한 선법과 리듬을 부여한다면 옳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선법과 리듬으로 충분할 것이다. 대다수 군중들은 이것저것 모방하기를 원하겠지만, 우리는 이로움을 위해 훌륭한 사람의 말투만 모방하는, 한결 딱딱하고 덜 재미있는 시인과 설화 작가를 채용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노래와 서정시가 양식에 관련된 부분이다. 노래는 노랫말과 선법, 리듬으로 구성되는데 비탄과 한탄이 불필요하므로 비탄조 선법들도 불필요하다. 유약하고 술자리에나 어울리는 선법들도 전사들에게는 쓸모없을 것이다. 자신의 불운을 꿋꿋하게 막아내는 이의 어조를 모방한 선법이나, 절제있게 행동하며 결과에 만족하는 이의 어조를 모방한 선법은 남겨놓기로 하자. 노래와 서정시가에는 화려한 악기 대신 리라, 키타라, 피리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호사스런 나라’를 완전히 정화한 것이다.

복잡한 리듬과 온갖 운율 역시 추구해선 안 된다. 예절 바르고 용감한 사람의 말에 시각(詩脚)과 선율이 따르도록 해야지, 그 사람의 말이 시각과 선율을 따라선 안 될 일이다. 좋은 리듬과 나쁜 리듬은 각기 아름다운 말투와 그렇지 않은 말투를 닮고 따른다. 조화로움과 조화롭지 않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어법의 방식과 말은 혼의 성격을 따른다. 다른 것들은 말투를 따른다. 좋은 말씨와 조화로움과 우아함과 좋은 리듬은 좋은 성격을 따른다. 이는 단순함이 아니라 훌륭하게 갖춰진 사고를 뜻한다. 모든 기예와 작업과 생물의 구조는 이 조화로움과 조화롭지 않음으로 가득 차 있다.

시가를 통한 교육이 중요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리듬과 선법은 혼의 내면으로 깊숙이 젖어들어 그 사람을 우아하게 만들거나 그 반대로 만든다. 시가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교육을 받은 이는 훌륭하지 못한 것을 민감하게 알아보며 ‘옳게 싫어할 줄’ 안다. 문자와 관련한 것도 이와 같다. 시가 교육과 문자 판별은 동일한 전문 지식과 수련에 속한다. 문자에 대해 올바로 아는 자는 물이나 거울에 글자가 거꾸로 비친다 해도 이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절제와 용기, 자유로움과 고매함을 잘 알아야만 이것들과 반대되는 것들도 분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혼 안에 훌륭한 성격이 깃들고, 이와 조화되는 외모가 갖추어져 양쪽 모두 같은 원형에 관여한다면 가장 아름다운 광경 이자 사랑스러운 모습 아니겠는가. 바른 사랑은 본성상 질서 있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절제 있고 교양 있게 사랑하는 것이리라. 시가와 관련된 것들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으로 끝나야 할 것 같다.

젊은이들은 시가 다음으로 체육 교육을 받아야 한다. 건강한 몸이 훌륭한 혼을 만드는 게 아니라 훌륭한 혼이 몸을 최대한 훌륭하게 만들어 준다. 가장 좋은 체육은 되도록 삼간다는 점에서 시가와 유사하다. 시가의 다양성이 무절제를 낳듯 음식의 다양성은 질병을 낳는다. 무절제와 질병이 늘어나면 법정과 의원도 늘어날 것이다. 법정 웅변술이나 의술은 엄숙하고 진지한 체하지만 실은 자체 해결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들이다. 이들에 의존하는 건 교양 부족을 증명하는 일이다. 법정에서 피고나 원고 노릇을 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건 부끄러운 짓이다. 헤로디코스 등장 후 체육과 의술이 혼합돼 생명 연장술이란 것이 생김으로써 사람들은 일생 동안 병을 앓으며 치료받게 되었다. 의술의 목적은 건강한 이를 더 건강하게 하는 데 있지 병약한 이의 상태를 유지케 하는 데 있진 않다. 몸에 대한 지나친 보살핌은 삶에 지장을 주며, 공부나 자기 수련도 힘들게 한다.

훌륭한 의사와 훌륭한 판관 모두 필요하지 않냐고 글라우콘이 주장하자 소크라테스는 같지 않은 문제를 한 물음으로 제기했다 지적하며 각각 설명한다. 의사는 혼으로써 몸을 치료한다. 혼이 나빠서는 아픈 이들을 돌볼 수 없다. 판관은 혼으로써 혼을 다스린다. 훌륭한 사람들은 자신 안에 못된 사람들과 공유할 만한 본을 갖고 있지 않기에, 젊어서는 순진해 보이고 올바르지 못한 이들에게 잘 속기도 한다. 훌륭한 판관은 본성상 나쁜 것을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앎을 이용하여 안다. 못됨(나쁨)은 저 자신도 분별할 줄 모르지만 훌륭함은 교육을 받고서 시간이 지나 자신뿐 아니라 못됨에 대한 앎도 갖게 될 것이다. 의술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 성향이 나쁘고 불치 상태인 사람들은 스스로 죽게끔 놔두는 게 낫다.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적절히 받은 사람은 의술이 거의 필요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교육도 체육 교육도 결국 혼을 위해 제도화한 것이다. 사나움은 올바른 체육 교육에 의해 용감함이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조장하면 경직되고 거칠어진다. 온순함은 올바른 시가 교육에 의해 온순하고 단정해지지지만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워질 수 있다. 수호자들은 이 양면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이 둘이 조화롭지 못하면 자칫 비겁하고 사나워질 것이다. 어떤 이가 음악에 자신을 내맡긴다면 기개를 흐물거리게 만들 것이며, 어떤 이가 체육에만 힘을 쏟고 시가와 철학에는 무관심하다면 말을 통한 설득 대신 힘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다. 기개와 지혜라는 혼의 측면을 조화시키려고 이 두 교과목을 만든 것이다.

그러면 누가 다스리고 누가 다스림을 받아야 할지 정하자. 수호자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자가 돼야 할 텐데 이들이 전 연령 단계마다 신념과 소신을 잘 지키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어릴 때부터 신념을 명심하고 좀체 속지 않는 사람을 뽑아야 하며 많은 상황에서 시험해 보며 단정하고 조화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적합할 것이다. 이제껏 수호자들이라 부른 젊은이들은 실은 통치자의 신념을 보조하고 협력하는 이들이다.

통치자는 재산을 사유할 수 없고 마음대로 출입하는 거처도 소유해선 안 된다. 필수품을 절제해야 하며 일정한 보수를 받고 공동으로 식사하고 공동으로 생활해야 한다. 통치자는 자신의 혼 안에 신이 준 신성한 금은을 언제나 지니고 있기에 속인의 금은이 필요치 않다. 신이 준 소유물을 사멸하는 인간의 소유물과 뒤섞어 더럽히는 건 경건치 못하다. 이리하여 이들은 자신도 구할 뿐더러 나라도 구원할 것이다. 이를 법제화해야 한다.


제4권

아데이만토스가 말을 끊고, 통치자들은 혜택을 입는 게 없고 파수꾼 노릇만 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자, 소크라테스는 어느 한 집단이 행복하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게 이 나라의 목적이라고 답한다. 나라 전체가 훌륭하게 기반을 잡아야 각각 집단의 성향에 따라 행복에 관여하는 것이 허용된다.

일꾼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부와 빈곤인데, 부는 게으름과 무관심을 낳으며 빈곤은 제품을 볼품없게 만들 뿐더러 장인으로 하여금 제자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기르게 한다. 수호자들이 나라 안으로 숨어들지 않도록 감시해야 할 것 역시 부와 빈곤이다. 부는 사치와 게으름을 가져오고 빈곤은 노예근성과 기량 저하를 초래한다. 그럼 나라가 재물을 갖지 못하면 부유한 나라를 상대로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물론 한 나라를 상대로 싸우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와 같은 두 나라를 상대로 싸우기는 쉬울 것이다. 최상의 훈련을 받은 권투 선수가 부유하고 살찐 두 사람과 상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부유한 한 나라에게 사절을 보내 ‘우리와 한 편이 되어 싸우되 전쟁에서 이기면 상대국의 재물을 가지시오’라고 설득하면 부유한 나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수립하고자 하는 나라 외에 다른 나라를 ‘한 나라’로 부르는 건 적절치 않다. 이들은 이해관계가 여러 갈래로 뒤얽힌 ‘수많은 나라’이지 ‘한 나라’가 아니다. 이 나라들을 하나로 보고 접근하면 실수할 것이다. 한쪽의 재물과 세력, 인력을 다른 쪽에 넘겨주면 동맹군은 많아지고 적은 적어질 것이다. 절제있게 경영되는 한 이 나라는 가장 강대해질 것인데, 강대한 ‘한 나라’는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므로 이것이 통치자들을 위한 훌륭한 기준이다. 나라가 커지더라도 모든 시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한 나라’로 머물 수 있는 한도를 알아야 한다. 시민들이 저마다 타고난 성향에 따라 배치되게 하는 것이 수호자들의 임무이며, 이는 나라 전체가 자연적으로 ‘한 나라’로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큰 것이 아니라 충분한 것을 지킨다면 모든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으리라. 예비 수호자들이 훌륭하게 교육받음으로써 절도 있는 사람들이 되면 아내, 혼인, 출산 등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함을 간파할 것이다. 출발을 잘 하면 정체는 순환하듯 성장한다. 건전한 양육과 교육이 훌륭한 성향을 낳고 훌륭한 성향은 사람들을 더 낫게 만들며 이들은 더 낫게 양육하고 교육한다. 체육과 시가 교육은 기존 질서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전통을 되도록 그대로 지키게끔 한다. 사람들 마음을 쏠리게 하는 새로운 형식의 시가를 조심해야 한다. 가락을 어기는 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격과 관행에 쉽게 스며든다. 이는 계약, 법률, 정체로 서서히 옮겨가 결국 공사 간 모든 일을 뒤엎는다. 아이들은 준법적 놀이에 참여해야 한다. 이들이 자라면 조상들이 망친 자질구레해 보이는 관습을 찾아낼 것이며 어떤 것들을 입법해야 하는지 쉽게 찾을 것이다.

어디에 올바름이 있고 어디에 올바르지 못함이 있는지, 어떤 점에서 둘이 다른지, 장차 행복하게 될 사람은 어떤 것을 지니게 될지 생각해 보자. 훌륭한 나라는 지혜, 용기, 절제, 올바름을 갖추었다. 지혜는 앎의 일종인 분별인데 이는 부분적 기능을 갖춘 지식이 아니라 나라 전체와 관련한 지식이며, 통치자들은 지혜라 불리는 이 지식에 관여한다. 용기는 수호자 계급에 관여한다. 용기란 소신의 일종이다. 염색업자가 물을 들이듯 적성을 갖추고 적절한 양육을 받아야 소신이 짙게 물든다. 바르고 준법적인 소신이 용기다. 올바름에 앞서 절제를 먼저 고찰한다. 절제는 질서의 일종으로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 간에 같은 판단이 이루어지고 양쪽 모두 절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협화음이나 화성을 닮았다. ‘한마음 한뜻’이 되려면 성향상 어느 쪽이 지배해야 할지 합의해야 하는데 이것이 절제다.

이제 남은 하나는 ‘올바름’이 분명한데, 실은 올바름은 우리 가까이 있었다. 나라를 수립하기 시작한 때부터 언제나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올바름의 일종으로 성향상 적합한 일에 종사하는 것이다. 지혜, 용기, 절제 세 가지 모두 이 나라 안에 생기도록 하는 힘을 주고 생긴 다음에는 이들을 보전케 해주는 것이 올바름이다. 이들 중에 나라를 훌륭하게 만드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하는 것을 판정하기는 어렵다. 각자 제 것을 소유하고 제 일을 하는 올바른 상태는 지혜, 용기, 절제에 필적하며 교환이나 참견은 나라에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올바름이라는 개념(eidos)을 인간에게 적용하여 올바름인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되면 나라의 올바름과 개인의 올바름을 같은 것으로 인정하자. 올바름이라는 형상 자체의 관점에서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나라는 같을 것이다. 올바른 나라의 세 부류인 지혜, 용기, 절제가 개인의 혼 안에도 있는지 검토할 것이다. 우리 안에는 나라에 있는 것들과 같은 종류와 성격을 지닌 것들이 있다. 어떤 행위를 할 때 특정 부분이 그와 동일한 것을 하게끔 하는지 혼 전체가 관여하는지 결정짓는 건 어렵다.

분명한 건, 동일한 것이 동일한 부분에서 동일한 것에 대해 상반된 것들을 동시에 행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동일한 것이 정지해 있으면서 동시에 운동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수긍과 부인, 갖기를 갈구하는 것과 거절하는 것, 끌어당김과 떼미는 것은 반대된다. 욕구라는 한 종류가 있으며 이들 중 제일 두드러지는 건 목마름이나 굶주림이다. 이는 모두 마실 대상, 먹을 대상에 대한 욕구다. 욕구는 항상 ‘어떤 것’에 대해 더 큰 것이므로 상대적이다. 한결 더한 것은 한결 덜한 것에, 한결 무거운 것은 한결 가벼운 것에 대해 그러하다. 지식도 같은 식인데, 지식 자체는 배움 자체에 대한 지식이거나 특정 대상에 대한 지식이다. 특정 종류인 지식은 특정 종류인 대상에 대한 지식이다.

그런데 목말라하면서도 마시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들의 혼 안에는 마시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반면, 마시는 걸 막고자 하는 것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쪽으로 이끌리는 건 느낌들에 의한 것이지만 막는 건 어떤 헤아림에 의한 것이다. 이 두 종류는 모두 우리 혼 안에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면 격정은 저 둘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일까, 아니면 제3의 것인가? 레온티오스는 시체가 늘어선 사형 집행지를 지나며 한편으로는 보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외면하려 했다. 얼마 동안 갈등하다가 보고 싶은 욕구에 압도되자 시체를 바라보며 ‘보려무나, 너희 고약한 것들아!’라고 분노했는데, 이 이야기는 분노가 욕구와 별개라는 점을 암시한다. 마치 욕구에 맞서는 듯 이성과 한편이 되기도 한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다면 고귀한 사람일수록 격정은 줄어들며, 올바르지 못한 일을 당했다면 고귀한 사람일수록 격정은 커진다. 혼에는 헤아림을 보조하는 것으로서 격정적인 부분이 따로 있는 것이다.

헤아리는 부분은 지배에, 격정적인 부분은 복종과 협력에 적합할 것이다. 헤아리는 부분은 훌륭한 말과 학문으로 키워주고, 격정적인 부분은 달래는 말과 화성으로 순화해주어야 한다. 이 두 부분이 잘 양육되어 제 할 일을 배우면 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욕구를 지도하게 될 것이다. 개인이든 나라든 이성이 지시하고 격정은 이를 보전한다. 사람 안에 있는 세 부분이 제 할 일을 하는 것에서 올바름이 생긴다.

올바름은 여럿인 상태가 아닌 ‘하나인’ 절제 있고 조화된 사람을 만든다. 이 조화로운 상태를 돕고 그 행위를 관할하는 앎이 지혜다. 이 조화로운 상태를 무너뜨리는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관할하는 의견은 무지를 낳는다. 영혼의 세 부분이 내분과 참견을 일으키면 무절제, 비겁, 무지가 나온다. 훌륭함은 혼의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좋은 상태다. 훌륭함의 종류는 한 가지이나 나쁨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정체의 형태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혼의 유형도 그만큼 있다. 특출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왕도 정체나 최선자들의 정체가 한 종류다. 그리고 나쁜 유형 네 가지가 있다.


제5권

나라의 경영이건 개인의 혼이건 나쁜 상태에는 네 종류가 있다. [이 논의는 잠시 중단되고] 아데이만토스는 아이들 양육이나 공유 문제가 올바로 이루어지는 것을 명확히 규정한 다음 정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처자와 관련하여 ‘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것’이 옳다는 소크라테스에게 설명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처자 획득과 이용의 올바른 방법을 위해서는 처음 논의한 것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수호자 계급은, 암컷 감시견들이 수컷들과 더불어 같은 것을 함께 지키는 것과 비슷해야 한다. 같은 목적에 이용코자 하면 남자와 여자는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여성이 가령 옷을 벗고 도장에서 신체를 단련한다면 우습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말을 시작한 이상 농담이나 놀림을 두려워하지 말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옷 벗고 운동하는 남자들도 우스꽝스럽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천한 사람들에 의해 벗는 것이 더 나은 것으로 밝혀졌다. 눈으로 보는 우스꽝스러움도 이치로 따져서 드러난 더 좋은 것에 의해 사라진다. 나쁜 것과 다른 것을 우스운 것이라 여기는 자, 나쁜 광경이 아닌 모습을 보고 웃기려는 자, 좋은 것이 아닌 것을 목표로 정하고 진지해지는 자는 모두 실없는 사람들이다. 당장은 우스꽝스러울지 몰라도 여성도 남성이 하는 일에 얼마나 동참 가능한지 먼저 논의해야 한다.

상대방 입장에서 이 주장을 반박해 보기로 하자. 앞서 개인의 성향에 따라 자신에게 적절한 한 가지 일만 하기로 합의했다. 여자는 남자와 성향이 다른데 어찌 같은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이런 반박에 적절히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반박술의 힘이 뛰어나 보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쟁론을 하면서 대화를 한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낱말 자체를 붙들고 고집하는 탓이다. 남녀를 먼저 나누고 성향을 짜맞출 게 아니라, 남녀 구분에 앞서 성향을 먼저 나눈 후 성별을 배정하는 게 옳다. 성향을 모든 면에서 거론하지 않고 일 자체에 국한하면 우스워진다. 남자 의사와 여자 의사는 혼에 있어 같은 성향을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조직과 관련된 것들 중 어떤 일과 관련해 남녀 성향이 다른지 검토할 것을 요구하는 건 타당하다. 모든 일은 성별이 아닌 성향에 따라 주어져야 한다. 여자가 여자이기에 여자인 일은 없고 남자가 남자이기에 남자인 일도 없다. 남자에 비해 체력이 더 약할 수는 있다 해도 수호자의 자질을 잘 갖춘 여자가 있으리라. 수호자들의 아내들에게 시가와 체육을 교육하는 것은 자연에 어긋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것들이 자연에 어긋난다. 최선의 남녀들이 나라 안에 생기는 것이 나라를 위해 가장 좋다. 수호자들의 아내들은 옷 대신 훌륭함을 걸칠 것이므로 옷을 벗어야 하며 이를 비웃는 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제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킬 문제가 나온다]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는 모든 아이들을 공유해야 하는데,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이 누구인지 모르고 어떤 아이도 자기 부모를 알지 못한다. 이것이 실현되면 나라와 수호자들을 위해 제일 유익할 것이다. 모든 즐거움과 고통을 공유하는 것이 나라를 단결시키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자식을 갖는 건 이를 해체한다. 어느 나라에서건 ‘내 것’이니 ‘내 것이 아닌 것’이니 하는 말을 다수가 동일한 것에 대해 똑같이 쓰는 나라가 가장 훌륭하게 경영될 것이다. 즉 한 사람에 가장 가까운 상태다. 이 나라에서 사람은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형제나 누이로서, 또는 아버지나 어머니로서, 아들이니 딸로서 만날 것이다. 이 나라의 수호자들에겐 사유 주택도, 토지도, 소유물도 없다. 이들은 수호에 대한 보수를 받아 공동으로 쓸 뿐이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공동 관여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 결정하자. 전쟁이 나면 전장에 건장한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간다. 이들로 하여금 성장한 뒤 해야 할 일을 미리 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면 그걸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들을 더 나은 이들로 만들어야 한다. 다만 안전을 위해 나이 많은 인도자들이 동행한다. 전장에서 비겁한 짓을 하면 장인이나 농부로 강등된다. 무공을 세운 자에게는 더 많은 혼인 기회 등 포상과 영예가 주어진다. 전장에서 죽으면 성스러운 수호신처럼 경배를 받을 것이다.

적군을 대할 때 헬라스 사람들이 헬라스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사자들을 약탈하는 군대는 모두 파멸했다. 혼백이 떠난 육신을 적으로 생각하는 건 소심한 짓이며 시체를 벗기거나 적이 시신을 거둘 때 방해하는 짓은 해선 안 된다. 동족끼리 불화는 내분이지만 이민족 간의 불화는 전쟁이다. 승자가 패자의 수확물을 빼앗는 것은 절도에 어긋나지 않지만 들판을 유린하거나 가옥을 불태우는 건 나쁜 짓이다. 장차 화해하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선의로 제정신이 들게 해 주어야지 예속하거나 파멸하려고 벌주면 안 된다. 불화의 원인이 된 소수의 적이 벌을 받는 시점까지만 동족들은 불화하게 될 것이다.

이 정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다시 논의할 것을 글라우콘이 요구하자 소크라테스는 가장 크고 감당키 어려운 문제가 나올 거라 말한다. 먼저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이 무엇인지 찾다가 여기에 이르렀음을 기억하자. 올바른 사람이 모든 면에서 올바름 자체와 같기를 요구해서는 안 되며 가급적 그것에 가깝다면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올바름과 완벽하게 올바른 사람이 생길 수 있을지, 생기면 어떤 사람일지, 그리고 올바르지 못함과 가장 올바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탐구한 건, ‘본’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행복과 불행 중 어떤 것에 관여하는지 보고, 우리 중에서 이들을 닮은 사람이 그 행복, 불행에 가장 닮은 ‘운명의 몫’을 차지할 것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기 위함이지, 올바름이든 올바르지 못함이든 그것들이 생길 수 있는지 입증하기 위함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가장 아름다운 인간에 대한 본을 그리고서 모든 걸 충분히 표현한 화가에게 그런 인간이 생길 수 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 하여 그를 훌륭하지 못한 화가라 말해선 안 된다. 우리 역시 화가처럼 훌륭한 나라의 본을 만들고 있다. 훌륭한 나라를 수립할 수 있음을 입증할 수 없다 하여 우리가 덜 훌륭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굳이 입증해야 한다면 합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 실천은 말보다 진실에 덜 미치는 본성을 지닌다. 완전한 실현보다는 언급된 바에 가장 가깝게 다스려지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오늘날 나라들이 왜 그런 식으로 다스려지지 않는지 보고, 가장 적은 변혁으로 아니면 되도록 적은 변혁으로 이 나라들이 그런 이상적 정체로 옮겨갈 수 있는지 보면 좋을 것이다. 한 가지 변혁을 통해서도 나라가 바뀌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나쁜 것들을 종식하려면 철학자들이 최고 권력자가 되고 정치 권력과 철학은 합쳐져야 한다.

통치가가 될 철학자를 정의해 보자. 어떤 사람이 뭔가 사랑한다면 일부가 아닌 전부를 좋아한다 말해야 한다. 소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소년의 생김새가 어떻든 온갖 핑계를 대고서라도 모두 그들을 사랑한다.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도 그와 비슷하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미천한 이들의 존경이라도 받고싶어 한다. 어떤 것을 바라는 이들은 그 종류의 모든 것을 바란다. 철학자는 지혜를 바라는 사람으로 모든 지혜를 바란다. 모든 배움을 맛보려 하고 현 상태에 만족할 줄 모르는 이가 있다면 그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추함에 반대되므로 이들은 각기 다른 것이다.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 좋음과 나쁨의 경우에도, 그 밖의 모든 형상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떤 행위나 물체가 결합하면 그 각각이 여럿으로 보인다. 듣기를 좋아하거나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온갖 것을 반길 뿐 아름다움 자체의 본성을 볼 수도 없고 반길 수도 없다. 아름다움 자체에 다가서 그걸 그 자체로 보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물을 믿으면서도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이들은 깨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꿈꾸는 상태일 것이다. 아름다움 자체를 보는 사람은 깨어있는 자다. 깨어있는 자의 사고는 인식이라 함이 옳고, 꿈꾸는 자의 사고는 의견이라 함이 옳다.

의견을 갖되 인식하지는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이들을 달래서 납득시켜야 할 것이다. 그에게 인식하는 자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자냐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 뭔가는 아마도 있지 않은 것이라기보다 ‘있는 것이리라. 완벽하게 있는 것은 완벽하게 인식될 수 있지만 있지 않은 것은 인식될 수 없다. 만일 어떤 것이 있으면서 있지 않기도 한 상태면 순수하게 있는 것과 어떤 식으로든 있지 않은 것의 중간에 위치할 것이다. 그런 것이 있다면 인식과 무지 사이에 놓인 어떤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의견이라 말한 것이 그것일텐데 그건 인식과 다른 능력이다. 의견과 인식은 각기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대상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능력이라 함은 ‘있는 것들’의 어떤 부류처럼 흔히 일컬어지는 듯하다. 능력 그 자체로는 아무 빛깔도 모양도 볼 수가 없다. [시각이라는 능력도 대상이 없으면 쓸모없다] 그 능력이 관계하는 대상과 그 작용만 주목하자. 인식은 일종의 능력이고 의견도 능력이다. 시각이나 청각처럼 이들은 각기 다른 대상에 관계한다. 있는 것이 인식의 대상이면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 의견의 대상일 것이다. 의견은 무지도 아니고 인식도 아니다. 그러므로 의견의 대상은 있으면서 있지 않은 중간 것이다.

아름다운 사물이라도 추해보일 수 있다. 올바른 것들도 어떤 면에서 올바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두 배에 해당하는 많은 양도 비교하는 대상에 따라 반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아름다움이나 다른 여러 가지 것에 관련된 다중의 많은 ‘관습들’이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의 중간 어딘가에 맴돌고 있는 것 같다. 이들과 관계하는 자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의견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일컬어져야 할 것이다. 각각의 실재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을 우리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이라 불러야 한다.


제6권

나라의 법률과 관행을 수호할 사람들을 수호자로 임명해야 한다. 무엇이든 감시해야 할 수호자는 눈먼 사람이 아니라 날카롭게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눈먼 사람들은 실재에 대한 인식이 없어 본도 지니지 못하기에 좋은 법을 제정하거나 보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다름없다. 그러면 실재를 인식하고 경험도 충분하며 다른 부분의 훌륭함도 뒤지지 않는 사람들을 수호자로 임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동일한 이들이 어떻게 두 특질(실재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충분한 경험)을 함께 지닐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요약주 : '동일한 이들이 두 특질을 동시에 지닌다'는 구절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가리킬 수도 있다. 뒷부분을 보면 훌륭한 혼을 지닌 이들이라 해도 환경에 따라 나쁜 면을 갖기도 하는데, 가장 좋은 성향을 지닌 이들은 나라에 가장 큰 해를 입힐 수도 있고 동시에 가장 좋은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들은 존재를 자신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배움을 언제나 사랑하며 또한 온 존재를 사랑한다. 이들은 진리를 좋아하므로 그와 동류인 진실함을 필연적으로 갖춘다. 욕구가 한쪽으로 쏠리면 다른 욕구는 약해지는데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육신의 즐거움과 욕구가 적고 돈에 대한 열의도 낮다. 이들은 고매함이나 일체의 존재에 대해 관상하며 세속적 삶이 대단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적다.

한 사람의 혼이 철학적인지 아닌지 검토하기 위해 그가 젊어서부터 올바르며 온순한지 살필 것이다. 기억력이 좋아 어떤 것을 쉽게 배우는가 하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교양 없고 꼴사나운 성향을 지닌 것은 과도함으로 이끌리지만 진리는 알맞은 정도와 동류다. 기억력이 좋고 쉽게 배우며 고매하고 정중하면서도 진리와 올바름, 용기, 그리고 절제와 친구인 그런 이들이 교육과 연륜을 통해 원숙해진다면 이들에게 나라를 맡겨야 할 것이다.

아데이만토스가 반박하며 훌륭하다 여겨지는 이들도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좋은 교육을 받고도 나라에 쓸모 없게 되는 일이 실제 일어나고 있으니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비유가 필요한 질문이라 말한다. [초월적인 개념을 쉽게 설명하려면 비유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항해로 비유를 들어 보자. 덩치나 힘이 다른 선원들보다 우월한 선주가 있다. 그런데 그는 약간 귀가 멀고 눈도 근시이며 항해술도 별로 뛰어나지 않다. 선원들은 서로 자기가 키를 잡고 배를 조종하겠다고 다툰다. 이들은 배를 모는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가르침에 의해 전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여긴다. 이들은 선주를 설득하여 배를 조종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 정작 항해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조타술에 능한 이가 있다 해도 이들은 쓸모없는 이들로 불리기 십상이다. 철학자들의 쓸모도 이와 마찬가지다. 최선의 활동도 그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성향을 지닌 이들이 나쁘게 전락하는 건 실상 좋은 것처럼 여겨지는 준수함이나 부, 체력과 세도 가문 같은 것들 때문이다. 동식물의 품종이 좋아도 적합한 영양이 공급되지 않거나 환경이 좋지 않으면 결핍으로 귀결되듯 성향이 최선이라 해도 맞지 않는 양육 상태를 겪으면 평범함보다 못하게 된다. 훌륭한 성향을 지닌 혼도 못된 지도를 받으면 타락한다. 소피스테스들이 타락시킨 젊은이들이 있다. 젊은이들은 민회나 법정, 대중 집회에서 극단적인 비난이나 칭찬에 휩쓸린다. 교육자들이며 소피스테스들인 이들은 말로 설득 못하면 강제로 제재하여 시민권을 박탈하거나 사형에 이르게 한다.

소피스테스들은 다중의 신념들을 가르치면서도 이것들을 지혜라 일컫는다. 힘센 짐승을 길들이듯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사람들이 성가셔하는 것을 나쁜 것으로 일컫는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많은 아름다운 것 아닌 아름다운 것 자체가 있다는 걸 대중은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게 된다. 이러한 대중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자들이 이들에게 비난 받는 것도 필연적이다. 철학자들은 군중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비난을 받는다. 좋은 혼을 타고난 이들은 친척과 시민들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이들은 지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공허한 자만심만 커져서, 노예처럼 수고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지성에 대한 조언을 쉽게 무시한다. 이들이 철학으로 이끌리는 것을 막는 이들이 있으며 젊은이들은 수많은 음모와 송사에 휘말린다. 철학이 가장 어울리는 이들은 이렇게 철학에서 이탈하여 진실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오히려 철학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철학에 접근하여 철학을 수치스럽게 만들며 지혜와 관계 없는 의견과 궤변들을 갖게 된다.

철학과 교류하는 참된 소수는 철학이 주는 축복을 맛보는 한편 다중의 광기도 목격하며, 결국 조용히 지내며 자신의 일을 하려고 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정체를 만난 게 아니므로 최대의 것을 성취한 것이 아니다. 철학과 어울리는 정체는 과연 무엇이냐는 아데이만토스의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어떤 것도 철학적 성향에 걸맞는 것은 없다 대답한다. 낯선 땅에 뿌려진 씨앗이 그 지역에 동화돼 자라듯 철학적 성향은 다른 성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가 철학을 파멸하지 않으려면 오늘날과 정반대 방법으로 해야 한다. 오늘날 철학에 손대는 자들은 유년을 갓 벗어난 젊은이들로 이 활동의 가장 힘든 부분에 접어들면 쉽게 이를 그만둔다. 그러면서도 철학에 통달한 것처럼 간주한다. 청소년기에는 교육과 철학을 받아들이되 육신도 보살펴야 한다. 혼이 성숙하는 시기에는 혼을 단련해야 한다. 은퇴기에는 완전히 철학에 몸을 맡겨야 한다. [즉, 평생 철학과 함께 해야 한다.] 트라시마코스 등 많은 이들이 반대할 것이라고 아데이만토스가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다시 태어나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줄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 답한다.

말과 행동이 가능한 한도까지 훌륭함을 닮고 동화된 사람이 권력을 장악한 사례는 아직 없다. 실제 일어나기 어렵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필연성에 의해 철학에서 정상급인 사람들이 통치하는 정체가 실현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이 무사(Mousa, 시의 신, 여기서는 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면 우리가 언급한 정체가 실현될 것이다. 다중을 설득하고 달랜다면 지금과는 다른 의견이 생길 것이다. 철학에 대해 다중이 거칠게 대하게 된 탓은 철학에 적절치 않을 짓을 일삼은 소수에게 있으므로 다중을 비난해선 안 된다. 실재들을 향해 참되게 가는 이에게는 인간들의 시기나 적대감을 살필 겨를이 없다. 철학자는 신적이며 절도 있는 것과 함께 지냄으로써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도까지 신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어떤 필연성이 철학자로 하여금 자신을 형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적으로도 인간들의 성격 속에 구현토록 단련한다면 그를 비난하진 못할 것이다.

철학자들은 화가처럼 인간의 성격들을 화판처럼 갖고서 우선 이를 깨끗하게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법률을 만들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정체의 형태를 윤곽으로 그릴 것이다. 본성에 있어서 올바른 것과 아름다운 모든 것을 인간들의 습속 속에 생기도록 할 것이다. 신을 닮은 인간의 모습을 혼성해 낼 것이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 화가가 철학자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실현되기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통치자 임명 문제를 제쳐둔 건 사람들의 반감 때문이다. 통치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제 나라를 사랑해야 하는데, 민첩하고 활발하며 당당한 성향은 조용하고 안정되며 절도 있는 성향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데 수호자는 상반돼 보이는 양쪽 성향을 훌륭히 겸비해야 한다. 그러려면 많은 교과를 배우며 단련받아야 한다. 이미 이룬 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가장 큰 배움의 목표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가장 큰 배움이란 ‘좋음의 이데아’인데 이 덕에 다른 것들도 유용하고 유익하게 된다. 좋음을 빠뜨린 채 어떤 것을 소유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다중에게는 즐거움이 좋은 것인 반면 세련된 사람들에게는 지혜가 좋은 것이다. 많은 이들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올바르고 아름답다 여겨지는 것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판단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실 그러한 것’을 추구할 것이며 의견을 경멸할 것이다. 혼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신념들을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신념을 말하지 못하는 건 옳지 않은 일 같다는 아데이만토스의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인식이 결여된 의견들은 모두 창피한 것이라 답한다. 글라우콘은 좋음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좋음 자체는 지금 상태로 두자고 제안하며, 대신 좋음에서 나오거나 그것과 닮은 것을 말하기로 한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아름다움이나 좋음 자체가 아닌] 아름답다거나 좋다처럼 ‘~이다’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각각에 한 이데아가 있어 이것에 따라 각각을 ‘실재하는 것’이라 일컫기도 한다.전자는 보이기는 하나 지성이라고 알려지지는 않는다. 후자는 지성에 의해 알게 되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감각으로 어떤 것을 지각하는데 감각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각을 지닌 자가 무엇을 보려면 빛이 있어야 가능하다. 시각은 빛을 낳는 태양과 이런 관계에 있이니, 눈은 자기가 갖는 이 힘을 태양에서 마치 넘쳐 흐르는 것을 받듯 분배받아 가진다. 태양을 좋음에 비유해 보자.

[태양-빛-시각 = 좋음의 이데아-진리-인식]

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곳에 혼이 고착하면 지성이 싹트지만 침침한 상태에서 지성은 없다.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주는 것은 ‘좋음의 이데아’다. 인식과 진리 모두 훌륭한 것이지만 좋음 자체는 아니다. 좋음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지위와 힘에서 존재를 초월하여 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두 종류 중 하나는 가시적 영역을 지배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영역을 지배한다. [이를 선분에 비유해 보겠다.] 선분을 비율을 달리 하여 두 부분(가시 영역, 지성 영역)으로 나눈다. 앞 선분과 뒷 선분을 앞서 나눈 비율대로 다시 각기 나눈다.

1) 가시 영역의 앞 부분은 대상을 비춘 영상이나 그림자에 해당한다.
2) 가시 영역의 뒷 부분은 이 영상이나 그림자의 원본인 실물들에 해당한다.
3)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셋째, 넷째 것 중 앞 부분은 가정에서 시작해 결론을 도출하는 기하학이나 각종 학술적 지식의 영역이다. 우리가 누구나 알고 있다고 전제하는 공리 등을 활용한 추론적 지식으로 알 수 있다.
4) 지성에 의해 아는 넷째 부분은 [논리적 추론이 아닌] 변증술적 논변의 힘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으로 이데아나 형상들에 해당한다.

|–(모상)–|—–(실물)—–|—-(추상적 대상)—-|————-(형상)————-|
|–(상상)–|—–(믿음)—–|—-(추론적 사고)—-|————-(직관)————-|

추론적 사고로는 근본 원리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가정들을 추론을 위한 원리가 아니라 근원으로 가는 출발점으로 삼되 이성 자체가 변증술적 논변으로 이 원리(좋음의 이데아)를 파악(직관)하면 모든 것을 이 형상들만 이용하여 해명 가능하게 된다. [이 근본 원리에서 모든 것이 연역돼 나올 것이다.] 명확성에 관여하는 정도에 따라 지적인 상태인 네 부분에 상상, 믿음, 추론적 사고, 지성에 의한 앎(직관)을 배정할 수 있다.


제7권

교육 및 교육 부족과 관련된 우리 성향을 이런 처지에 비유해 보자. 동굴 속에서 입구 쪽 불빛을 등지고 몸이 결박된 사람들이 있다. 동굴 안쪽 벽에 그림자 극처럼 자신들 모습이 비치고, 뒤에서 사람들이 인물상이나 동물상 등을 쳐들고 지나간다. 평생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면 이들은 벽에 비치는 것을 실물이라 생각할 것이며 소리가 들리면 그림자가 내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그런데 이들 중 누군가 풀려났다고 생각해 보자. 목을 돌리고 불빛 쪽으로 가도록 강요당한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눈부심 때문에 실물을 잘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불빛 자체를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림자 아닌] 실제 지나가는 것들을 보게 되면 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 참된 것이라 믿게 될 것이다. 누군가 그를 동굴 밖으로 끌어낸다면 눈이 부셔 처음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겠지만 높은 것들을 보기 위해 차츰 빛에 익숙해질 것이다. 먼저 그림자를 보고 비친 것(상)을 보게 되며, 실물을 본 다음에는 하늘 자체와 해 자체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갇혀 있던 거처를 생각하며 그 처지에 있는 이들을 불쌍하다 여길 것이다. 벽에 비치는 상을 잘 예측하여 명예와 상을 받는다 해도 이 사람은 의견만 지닌 그런 삶보다는 이 모든 과정을 겪어내는 쪽을 택할 것이다. 이 사람이 전에 있던 곳으로 가면 눈은 어둠으로 가득 찰 것이며, 앞서 말한 그런 경합에 맡겨진다면 적응하지 못하는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자기들을 풀어주어 위로 인도하려는 자를 붙잡아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전체 비유를 앞서 언급한 비유들에 적용해 보아야 한다. 시각을 통해 드러나는 곳을 감옥에, 감옥 속 불빛을 태양의 힘에 비유하자. 위로 올라 높은 곳의 것들을 보는 건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곳으로 혼이 등정하는 일이다.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서 각고 끝에 보는 것이 ‘좋음의 이데아’다. 이 경지에 오른 사람의 혼은 인간사가 아닌 더 높은 곳에서 지내기를 열망한다. 이들이 올바름 자체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는 건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지각 있는 이의 두 곤혹스러움은 ‘빛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길 때 일어남을 기억하라. 혼도 마찬가지여서 혼이 혼란스러우면 둘 중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 살펴야 한다.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혼란에 대해서는 행복하게 여기되 반대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길 것이며, 혼이 웃고싶은 심정이 된다 해도 위쪽에서 경험한 웃음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게 진실이라면 교육이란 혼 안에 지식을 넣어주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 논의는 각자 혼 안에 [이미 갖고] 있는 이 힘과, 각자 이해하려고 사용하는 기관을 혼 전체와 함께 생성계에서 전환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렇게 전환하는 방책이 있음직하다. 그것은 보는 능력을 생기게 해 주는 게 아니라 이미 그 능력을 지녔으되 보아야 할 곳을 보지 않는 자에게 적용할 만한 방책이다. 혼의 다른 훌륭함들은 신체적 훌륭함처럼 전에는 없었으나 습관과 단련으로 나중에 생긴다. 그러나 [이데아를 보는] 똑똑함의 훌륭함은 [선천적인 것이기에] 더 신적이다. 그 힘은 전환의 방향에 따라 유익하게도 되는가 하면 해롭게 되기도 한다. 이런 성향이 어릴 적부터 다듬어져서 생성과 동류인 것이 잘려나간다면 참된 것들을 가장 날카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은 목표가 없기에, 교육만 받느라 소일하도록 허용받은 자들은 스스로 축복받은 것이라 여겨 안주할 것이므로 자진해서 통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가장 큰 배움인 좋음을 보게끔 하고, 그 오르막을 오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며, 그것을 충분히 보고 나면 이제 이들이 허용받은 특권, 즉 거기에 머물면서 죄수들에게 내려가 노고를 나누려 하지 않는 마음을 더 이상 허용해선 안 된다. 그러면 이들에게서 더 좋은 삶을 삶을 뺏는 게 아니냐고 글라우콘이 묻자 소크라테스는 법이란 한 부류가 아닌 온 나라에 올바름이 실현되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었음을 상기해야 한다고 답한다.

법은 시민들을 설득과 강제로 화합시키고 각자 공동체에 이롭게 하는 이익을 나눌 수 있게끔 만든다. 철학자들에게 이것을 강요하는 건 이들에게 올바른 걸 말해주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생긴 정체에서는 양육에 대한 빚이 없으므로 [시민에게 베풂으로써] 그것을 갚으려는 열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하는 나라는 지도자들을 여느 시민들보다 더 훌륭하고 완벽하게 교육시켰으며 양쪽 생활에 모두 잘 관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순수한 것 속에 머물지 않을 것이며 나라는 훌륭하게 경영될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황금이 아닌 훌륭함과 슬기로운 삶으로 풍부한 자들이 통치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관직을 깔볼 줄 아는 철학자의 삶이어야 그게 실현될 것인데 문제는, 지하 세계에서 신들의 세계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이들처럼 그런 이들을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기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밤처럼 어두운 낮에서 진짜 낮으로 향하는 혼의 전환이자 실재를 향한 등정일 것이다.

교과들 중에 생성되는 것에서 실재를 향해 혼을 끌어당기는 교과는 무엇인가. 이들은 체육과 시가 교육을 이미 받았다. 그런데 체육은 신체의 성장과 쇠퇴를 관장하므로 생성과 관련된 교과이고 시가는 체육과 상관적인 습관을 가르치므로 역시 실재에 해당하는 교육은 아니다. 모든 기술은 [생성과 관련되는] 수공적인 것 같다. 수와 계산은 모든 지식과 기술에 관여하는데 본성상 ‘지성에 의한 이해’로 인도하는 것들 중 하나인 듯하다. 팔라메데스가 수를 발견하고 아가멤논에게 새로 가르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아가멤논은 이미 산술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실재를 향해 인도하는 것들과 인도하지 않는 것들을 나누어 보자. 1) 감각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한 것들은 지성에 의한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반면 2) 어떤 것들은 지성에 의한 탐구를 전면적으로 권유한다. 멀리 보이는 것들을 음영 화법으로 [정도만 달리 하여] 그려진 것들과 같은 거라 글라우콘이 확신하자, 소크라테스는 전혀 적중하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대립되는 감각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들은 지성에 의한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손가락을 우리가 바라보면 시각은 그것이 손가락임을 알려줄 뿐 손가락이 아니라는 점은 알려주지 않는다. 시각은 손가락들이 위치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는 점을 충분히 볼 수 없으며, 다른 감각들도 도톰함/가느다람, 부드러움/단단함 같은 대립되는 것들을 부족하지 않게 밝혀주지는 않는다. 동일한 대상에 대해 감각이 단단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다고 지각하면 혼은 난감하게 될 것이다. [감각 정보를 넘어서 이것을 판단하려면] 혼은 지성에 의한 이해를 일으켜서, 전달된 것들이 [동일한] 한 대상인지 [다른] 두 대상인지 고찰할 것이다.

크고 작음이 무엇인지 물었던 것은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처음 이루어졌다. 하나[the one]가 그 자체로 충분히 보이거나 감각으로 파악된다면 그것은 존재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사고 작용이 가동하여 하나 자체가 과연 무엇인지 묻게 되는 것이 실재 고찰로 이끈다. 글라우콘은 시각도 이런 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동일한 것이 동일하면서도 수에서 무한함을 우리가 본다고 말한다.

산술과 수론은 모두 수와 관련된 것이며 진리로 인도하기에 우리가 찾는 교과들에 속한다. 전사로서 전열 배치를 위해서든 철학자로서 존재를 포착하기 위해서든 이것을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 혼의 방향 전환을 쉽게 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 이 교과는 혼을 위쪽으로 인도하며 수 자체에 관해 토론하도록 만든다. 누군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체들을 제시하며 대화한다면 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보이지 않도록 이를 곱해버릴[합치려고 할] 것이다. 산술과 수론은 혼으로 하여금 지성에 의한 이해를 이용하도록 한다. 이해가 더딘 사람들도 이런 교육을 받으면 전보다 이해가 빨라질 것이다.

둘째로 적합한 교과는 기하학이다. 어떤 점에서 기하학이 좋음의 이데아를 더 쉽게 보는 데 기여하는지 생각해 보자. 기하학은 정방형을 만듦, 작도를 함, 합함 같은 [생성과 관련한] 용어를 사용하긴 해도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앎을 위한 것이지 생성이나 소멸에 대한 것이 아니다. 기하학은 혼을 진리로 이끌며 아래로 향한 철학적 사고를 위쪽으로 향하도록 만든다.

천문학을 셋째 교과목으로 정해야 하냐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글라우콘은 농사나 항해, 전략에 적절할 것이니 그리 하자고 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실용 차원에 머무는] 글라우콘을 향해 다중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지적하며 남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만을 위해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우리는 기하학 다음 것을 잘못 취했다. 평면에 관한 교과 다음에 입체에 관한 교과를 취하기도 전에 회전 운동을 하는 입체를 취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도 이 교과를 존중하지 않기에 이 어려운 교과는 빈약하게 탐구되고 있다. 나라가 이를 추구하면 성립하게 될 이 교과를 셋째로 하고 천문학을 넷째로 정하자.

천문학은 혼으로 하여금 위쪽으로 보도록 인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글라우콘이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남들을 철학으로 이끌어 올리는 사람들이 천문학을 다루며 혼을 완전히 아래를 향하게끔 한다고 비판한다. 인식 없이 위만 보는 건 소용이 없다. 오늘날 배우는 방식과 반대로 배워야 한다. [별자리 같은] 하늘의 장식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라 여겨지지만 그것이 참된 것에 미치지는 못한다. 참된 것이란 ‘실재하는 빠름’과 ‘실재하는 느림’이 참된 수와 참된 도형의 상호관계 속에서 운동하며 그 안에 실재하는 것들을 운동시키는 것으로, 이성과 추론적 사고에 의해 파악되지 시각으로 파악되는 게 아니다.

하늘의 장식은 배움을 위한 본보기만으로 이용해야 한다. [기하학에 익숙한 사람이 보기에] 장인이나 화가가 만든 [가시적인] 도식들에서 진리를 파악할 것처럼 고찰하는 건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천문학자는 제작물이 가능한 훌륭하게 구성되듯 하늘에 있는 것도 창조자가 [훌륭하게] 구성했으리라 여길 것이다. 그러니 눈에 보인다고 하여 한결같은 상태를 유지할 거라 믿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천문학이 유용한 것이 되려면 하늘에 있는 [가시적인] 것들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 천문학에 더하여 이것과 상관적인 것이 있다. 눈이 천문학에 맞춰졌듯 귀는 자매 관계인 화성적 운동[화성학]에 맞춰진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주장했듯 이 역시 [지성보다 감각을 내세우며] 소리를 측정하는 등의 헛수고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 한계를 넘는 일이라며 글라우콘이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우며 좋은 것을 탐구하려면 유용할 것이라 답한다. 우리가 다룬 모든 것의 탐구가 동류 관계에 이른다면 우리가 바라는 바에 기여할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본 악곡을 위한 서곡들이었다. 변증술적 논변이 이 악곡을 끝맺어줄 것이다. 지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을 시각은 흉내낸다. [그러나] 감각을 일절 쓰지 않고 이성적 논의로만 좋은 것 자체를 파악하고자 해야 동굴의 죄수가 가시적인 것의 끝에 이르른 것처럼 지성적 이해의 끝에 이르게 된다. 이 여정이 변증술이다. 기하학이나 이에 잇따른 것들은 실재에 관해 꿈을 꾸는 것이므로 [역설적으로] 깬 상태로는 볼 수 없다. 가정을 이용하되 그 가정을 증명하기는 어려우므로 이 가정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결론이나 중간항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변증술적 탐구만이 가정들을 폐기하고 원리 자체로 나아간다. [변증술적 탐구에 의한 앎은] 의견보다는 명료하면서 인식보다는 불분명한 것이므로 이를 가리키는 새 이름이 필요하다.

변증술은 갓돌처럼 다른 교과들 위에 놓인다. 이제 남은 일은 이 교과들을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우리는 앞서 통치자를 선발하면서 가장 견실하고 용감하고 되도록 잘 생기며 성격이 고귀하고 강건한 자들을 찾아야 한다고 했으며 또한 교육에 적합한 성향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적합한 인물이 철학을 다루어야 하는데] 철학에 오늘날 불명예가 생긴 건 무자격 상태인 자들이 철학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부지런함에서 절름발이여서는 안 되듯 진실함에서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절제나 용기, 고매함이나 훌륭함의 모든 부분에서도 적자인지 서자인지 감시하는 게 중요하다.

늙으면 달리는 게 어렵듯 배우는 것도 어려우므로 크고 많은 수고는 젊음이들의 몫이어야 한다. 변증술에 앞서 예비 교육을 할 때 아이들에게는 놀이삼아 하도록 해야지 강제로 시켜선 안 된다. 강제적 배움은 혼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예비] 기간을 거친 뒤에 스무살이 된 자들 중 선발된 자들은 더 큰 영예를 얻는다. 아이들 때 받은 교육에 따라 실재의 본성을 향한 교과 상호 간의 친근성을 파악하여 ‘포괄적인 봄’을 갖도록 해야 한다. 포괄적으로 보는 사람은 변증술에 능한 자일 것이다. 이들 중 그런 자질을 많이 보이고 법적 의무도 확고한 이들이 서른을 넘으면 다시 선별하여 더 큰 영예를 누리게 해야 한다. 이들이 감각을 이용하지 않고 실재 자체로 진리와 더불어 나아가는지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변증술적 논변은 나쁜 일과 관련되며 이를 행하는 사람들은 무법 투성이인 것 같다. 이것은 어떤 아이가 많은 재물을 가진 큰 가문에서 아첨꾼들이 섞여있는 대가족 사이에서 자란 다음, 나중에 자신의 부모가 친부모가 아님을 알게 되더라도 친부모를 찾을 수 없는 경우와 같다. 진리가 아닌 줄 알아도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실을 모르는 동안에는 부모를 존중하고 중대한 일에 불복하는 일이 드물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존중과 열의는 떨어지고 아첨꾼들이 하자는 대로 살게 된다. 이 비유는 논변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우리에게는 올바름과 아름다움에 대한 신념이 있기에 어버이를 따르듯 이에 복종한다. 이와 반대되는 생활 습관도 있으나 이 습관들이 전래 풍습을 따르는 절도 있는 사람을 설득하진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입법자에게 들은 대로 대답할 텐데, 이에 대해 논변과 논박이 되풀이되면 결국 어떤 것도 아름다운 게 아니며 어떤 것도 추한 게 아니라는 모호한 의견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가 그동안 존중했던 것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친근한 것들을 믿지 않게 되면 자기 비위가 당기는 대로 살게 되며, 준법적이던 사람이 범법적인 사람으로 바뀐 듯 보일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모든 면에서 조심하여 논변에 관여해야 한다. 청년들이 한번 논변의 맛을 보게 되면 재미삼아 [남을 물어뜯고] 반박하게 될 것이다. 또 논박을 당하기도 하면서 자신이 믿었던 것을 믿지 않게 되고 철학과 관련한 모든 것을 비방의 대상으로 삼게 될 것이다. 나이가 더 든 사람은 이런 광기에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놀이가 아니라 참된 것을 고찰하는 자를 닮으려 할 것이다. 논변에 참여하는 이들은 예절 바르고 견실해야 하며 적합치 않은 자들은 여기에 접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년 정도 수련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이들은 다시 동굴 속으로 내려가야만 하고 전쟁 관련 일을 지휘하며 젊은이에게 알맞는 관직을 맡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지 시험받게 된다. 15년이 지나 50세가 넘은 자들 중 실무나 학식에서 두루 가장 훌륭한 자들을 최종 목표로 인도해야 한다. 혼의 눈으로 좋음 자체를 보면 이들은 그것을 본으로 삼아 나라와 개인, 그리고 자신을 다스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들은 주로 철학으로 여생을 소일하지만 자신의 차례가 오면 나라일로 수고를 하며 통치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나라일이나 통치가 훌륭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들과 같은 다른 이들을 교육시켜 수호자들로 남긴 다음 ‘축복받은 자들의 섬’으로 떠나가 살게 되는데 우리는 이들을 신처럼 모셔야 한다.

자질이 충분하다면 여성 통치자들도 가능하다. 우리가 말 한 정체가 실현 가능하려면 이제껏 말한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이 나라에서 열 살 이상 된 사람들을 모두 [이상적 정체와 격리된] 시골로 보내야 하며 이들이 나중에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들만 데려와서 이 정체의 법률 안에서 양육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말한 정체는 이런 식으로 가장 쉽고 빠르게 번영할 것이며 그 안의 민족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줄 것이다. 이 나라를 닮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이제 분명해졌다.


제8권

완벽하게 경영될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의 것이어야 한다. 이로써 이 문제를 일단락한다. 나머지 정체 중 살필 가치가 있는 네 종류에 관해 언급하다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다시 그 논의로 돌아가자. 정체에는 크레테(라코니케식) 정체, 과두 정체, 민주 정체, 참주 정체 등 네 종류가 있는데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에서 기인한다. 나라 형태가 다섯 가지이면 개인들 혼의 상태도 다섯 가지일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 최선자 정체를 닮은 이는 훌륭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다음으로 한결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할 텐데 성격은 개인보다 정체에서 더 뚜렷이 드러나므로 각 정체를 먼저 고찰하겠다.

최선자 정체에서 명예 지상 정체가 생기는 것 집단 안에 내분이 일어나기 때문인데, [최선자 정체는 이론상 타락하지 않으므로] 이런 변혁을 설명하는 건 무사 여신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는 자연의 완전한 주기와 순환이 깨지는 탓이다. 출생에 완전한 시기가 아닌 때에 아이들이 태어나면 훌륭한 성향을 갖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통치자들 중에도 좋은 자질과 나쁜 자질을 지닌 이들이 뒤섞임으로써 조화롭지 않은 불규칙성이 생기고 그것이 어디건 전쟁과 적대심이 생길 것이다. 내분이 생기면 통치자들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돈벌이와 토지에 관심을 갖고, 한쪽은 정신적으로 부유하기에 훌륭함과 옛날 체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들은 서로 격렬하게 다투다가 중간선에서 합의를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유화다.

명예정은 최선자 정체와 과두 정체의 중간에 있다. 이 정체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관직에 앉히기를 두려워하는데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들보다는 성향상 평화보다는 전쟁 취향인 사람들쪽으로 기운다. 또 이 사람들은 재물에 대해 욕심을 내며 비밀스럽게 재물을 쌓아두는 사사로운 창고를 갖고 있다. 이들은 시가보다 체육을 더 높이 사는데 설득 아닌 강제에 의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쁜 것과 좋은 것이 혼합된 이런 정체에서는 격정적인 것이 우세한 탓에 승리에 대한 사랑과 명예에 대한 사랑만이 뚜렷이 드러난다.

잘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에 사는 훌륭한 아버지의 어린 아들이 이런 명예 지상적인 청년이 되기 쉽다. 아버지는 골칫거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제 권리를 줄이고자 한다. 다른 여인들에게 얕보인다며 남편에게 화를 내는 아내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남자답지도 않다고 불평하며 아버지보다 한결 남자답게 크기를 권유한다. 혼을 헤아리는 이성적인 부분을 조장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들은 천성이 나쁜 편이 아니지만, 욕구적인 부분과 격정적인 부분을 조장하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에 그 양쪽의 중간에 서게 되어 도도하고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과두 정체는 평가 재산에 근거를 둔 정체로 부자들만 통치할 뿐 가난한 자는 통치에 관여하지 못한다. 황금으로 가득한 각자의 금고가 명예정을 무너뜨리고 과두정으로 이행하게 한다. 쌓아둔 재산을 소비할 길을 찾다보니 법률을 왜곡하고 따르지 않게 된다. 이들이 돈벌이를 귀하게 여길수록 훌륭함은 덜 귀하게 여긴다. 훌륭함과 부는 상반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조타수를 뽑으면서 평가 재산을 근거로 삼는다면 조타술에 능한 가난뱅이는 배제될 것이며 이들은 형편없는 항해를 하게 될 것이다. 통치도 마찬가지다.

이 나라는 필연적으로 하나가 아닌 두 나라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에 대해 음모를 꾸밀 것이다. 이 나라는 어떤 전쟁도 수행하지 못한다. 부자들은 무장한 대중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을 이용하지 않으면 소수인 자신들만 남게 될 것이다. 또 재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라에 돈을 기부하려 하지도 않는다. 앞서 우리는 참견하는 것을 비난했는데 [각자 제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임에도] 이 정체에서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곧 돈벌이하는 사람들이며 또한 전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자신의 소유물을 팔아치우고 가난뱅이가 되어 나라에 거주하게 되는 일을 과두정은 용인한다. 이들은 나라에 유익한 편이기보다 탕진한 자에 불과하므로 봉방의 수벌처럼 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다. 침이 없으면 거지로 살고, 침을 가진 못된 자들은 통치자들을 힘으로 제압하려 할 것이다. 이들이 생긴 건 교육 부족과 나쁜 양육, 나쁜 정치 체제 탓이다. 이 정체를 닮은 사람이 어찌 생기며 어떤 사람인지 살피자. 명예 지상 정체적 인간에서 과두 정체적 인간으로 바뀌는 건 다음과 같은 식이다.

아버지를 좇아가며 살던 아들이 나라에 맞서 재산과 인생을 허비하는 아버지를 목격하거나, 한때 높은 관직에 있었다가 사형, 추방, 시민권 박탈 등을 목격할 때, 이런 일을 보고 겪은 아들은 명예에 대한 사랑이나 격정적 부분을 혼에서 몰아내며 탐욕스럽게 돈벌이로 전향하여 재물을 축적하고 치장하게 된다. 혼의 격정적인 부분으로 하여금 부 외에는 어떤 것도 존중하지 않도록 만든다. 과두 정체적 인간은 재물을 가장 귀히 여기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만 부지런하다. 이들이 장님(부의 신)을 무리의 선도자로 앞세우는 걸 보면 교양에 유의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교육이 부족하여 수벌 같은 욕망이 생기더라도 힘으로 제압할 수는 있다.

이들의 못된 짓을 보게 되는 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아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는 경우다. 나쁜 욕망들이 제압되는 건 강제나 공포감에 의한 것이거나 재산을 잃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그런데 남의 재산을 쓰게 되면 수벌 같은 욕망을 일으키니 그는 한 사람이 아닌 이중적 인간으로서, 조화된 혼의 훌륭함은 그에게서 멀리 달아난다. 과두정에서 민주정으로 바뀌는 건 최대한 부유해지려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때문이다. 통치자들은 젊은이의 무절제와 재물 탕진을 방치하며 오히려 그 재산을 거둬들여 더 부유해진다. 부를 귀히 여기며 동시에 시민들이 절제를 갖게끔 하는 건 불가능하다. 빚을 지거나 시민권을 박탈당한 자들은 음모나 혁명을 열망할 것이다. 돈벌이만 일삼는 부자들은 계속 수벌과 거지를 양산할 뿐, 훌륭함에 마음을 쓰게끔 하는 법으로 규제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할 의지가 없다. 이런 나라에는 외부 동맹 세력이 끼어들어 내란이 일어나거나, 외부 영향이 없어도 이미 분쟁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가난한 자들이 싸움에서 이겨 다른 편을 죽이거나 추방한 다음, 시민들에게 시민권과 관직을 평등하게 배정하고 관직을 추첨으로 할당하면서 민주 정체가 생긴다. 이에 따라 온갖 부류의 인간이 생긴다. 다채롭게 수놓인 외투처럼 얼핏 가장 아름다워 보일지 모른다. 아무 강요도 없다는 사실이 당장은 놀랍고도 신나는 일 같다. 어떤 자가 어떤 일을 하다가 정치 활동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대중의 호감을 잘 얻는 사람이 높이 평가받는다.

모호하게 논의하지 않기 위해 먼저 필요한 욕구와 불필요한 욕구를 규정하고 넘어가자. 건강해지려는 마음이나 음식에 대한 욕구처럼, 충족되어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을 필요한 욕구라 규정하자. 우리 안에서 아무런 좋은 일도 하지 않거나 나쁘게 작용하는 요구로서 젊어서부터 단련하면 벗어날 수 있는 욕구를 불필요한 요구라 규정하자. 교육도 받지 못하고 인색한 환경에서 자란 젊은이가 수벌처럼 꿀을 맛보고 온갖 다채로운 쾌락을 즐기게끔 돕는 짐승들과 어울리면 내면의 과두 정체가 민주 정체로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혼의 수호자인 훌륭한 학문이 차 있지 않은 텅 빈 혼을 확인한 욕망이 혼을 가득 점령할 것이다. [마약 같은] 로토스를 먹으며 쾌락에 탐닉한 쓸모없는 욕구들과 같은 편이 되어 공경과 절도와 절제를 멀리 추방해 버릴 것이다. 이들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충고한들, 이들은 모든 즐거움은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 삶에 아무런 질서나 필연성도 없는데, 자기들은 스스로 즐겁고 자유로우며 축복받았다 여기며 평생을 산다. 이 사람을 민주 정체와 같은 사람이라 부르도록 하자.

제일 잘난 정체가 참주정이고 제일 잘난 사람이 참주다. 과두정에서 민주정이 생기는 방식과 민주정에서 참주정이 생기는 방식은 같다. 좋다고 내세운 부 때문에 과두정이 수립되고 부를 향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다른 것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 정체가 파멸하듯, 민주정에서 좋다고 내세운 자유 때문에 이 정체는 파멸한다.

자유를 갈망하는 민주 정체인 나라가 지도자를 잘못 두어, 자유라는 포도주를 지나치게 마셔 취하면 통치자들이 자유를 넉넉히 제공해주지 않으면 그들을 과두정의 지도자들이라고 비난한다. 민주 정체에서 칭찬받는 이들은 피통치자 같은 통치자와 통치자 같은 피통치자들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자유가 전면적으로 확장될 게 필연적이다. 그러면 무정부 상태가 온통 스며들 것이며 짐승들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아비가 자식과 같아지도록, 아들을 두려워하도록 버릇이 들고, 아들은 부모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버릇이 든다. 거류민과 시민과 외국인 또한 마찬가지다. 선생은 학생을 두려워하고 학생은 선생을 경시한다. 젊은이는 연장자를 흉내내고 노인들은 젊은이를 흉내낸다. 극단적으로는 노예들이 주인들만큼 자유로워진다. 개들도 그들의 주인들처럼 되고 말과 당나귀는 당당하게 길에 나돌아 다닌다. 이 모든 걸 요약하면, 자유가 시민들의 혼을 민감하게 만들어서 누가 어떤 형태로 굴종을 요구해도 참지 않으며 법률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게 참주정이 자라는 활기찬 시작 같다.

지나침은 반대쪽으로 큰 변화를 일으킨다. 개인이나 나라에서도 지나친 자유는 지나친 예속으로 바뀐다. 민주정의 극단적인 자유에서 가장 야만스러운 예속이 조성된다. 그런데 과두정이나 민주정에서 어떤 병이 도져서 민주정을 예속화했는지 살펴보자. 수벌처럼 저 게으르고 낭비적인 부류 중에서 용감한 무리가 인도하면 덜 사내다운 무리가 그들을 따라간다. 이들 무리는 가래와 쓸개즙이 몸에 그러하듯 나라에 혼란을 일으키므로 신속히 도려내야 한다.

민주 정체인 나라에 속한 세 부류를 나눠 보자.

1) 방금 말한 수벌 같은 부류로 앞장서 대중을 선동하는 부류
2) 대중과 언제나 따로 떨어진 부자들로서 수벌의 먹잇감이 되는 부류
3) 손수 일을 하나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재산은 적은 민중들로서 꿀의 한 몫을 얻지 못하면 집회에 나가는 않는 부류

재산을 뺏긴 자들은 자신을 방어하다가 원하든 원치 않든 과두 정치로 향하게 된다. 탄핵과 재판과 소송이 이어진다. 민중은 한 사람을 앞장세워서 그를 보살피고 키워주려는 버릇이 있다. 민중의 선도자 격인 이런 뿌리에서 참주가 자란다. 선도자가 참주로 바뀌는 계기는 무엇인가? 아르카디아의 제우스 신전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의 행동처럼, 인간의 내장 한 조각을 맛본 자는 반드시 늑대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민중의 선봉에 선 자도 마찬가지로 동족의 피를 보는 일도 삼가지 않는다. 이들은 적들에게 살해되거나 참주가 되어 사람에서 늑대로 변하는 운명을 지녔다.

바로 이 사람이 재산 가진 자들에 대해 분쟁을 일으키는 자다. 이 자는 추방되더라도 완벽한 참주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적들은 그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며, 참주는 자신을 경호할 군대를 요구한다. 민중은 자기들에게 미칠 일은 생각하지 않은 채 경호대를 허용한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거나 재물을 가져서 민중에게 고발을 받는 사람은 그곳에서 달아나려 할 것이다. 이제 민중의 선도자는 완벽한 참주가 되었다.

이 나라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참주는 초기 며칠간 민중에게 많은 걸 약속하고 빚도 탕감해주고 땅도 나눠준다며 모든 이에게 온유한 척한다. 망명한 정적들을 없애려고 전쟁을 일으킨다. 민중으로 하여금 지도자의 필요성을 각인시키려고 그러는 것이다. 세금은 높아지고 민중은 가난해진다. 민중은 생계에 매달리느라 모반을 꾸밀 겨를이 없다. 그래서 참주는 언제나 전쟁을 부추긴다. 참주는 자기를 도운 자들이 자기를 비판할 것을 미연에 막으려고 이들을 없앨 것이다. 그러면 나라에 쓸모있는 사람들이 사라진다. 참주는 누가 용감하고 누가 고상하고 누가 신중하고 누가 부유한지 감시한다. 자신의 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온 나라를 ‘정화’할 때까지 이 짓은 계속된다. 가장 나쁜 것을 없애고 좋은 것을 남겨두는 의사와 반대로 행동하는 참주는 축복받은 필연에 묶인 셈이다. 다중의 미움을 받으며 살아가든가 살아있지를 말거나 택일하는 수밖에 없다. 참주는 점점 더 많은 경호대를 요구한다. 시민들의 노예를 빼앗아 자유를 준 다음 경호원으로 삼는다.

훌륭한 사람들은 참주를 기피한다. 에우리피데스가 말했다. “참주들이 현명한 것은 현자들과 갖는 교제에 의해서이니라.” 이 현자들이란 비극 작가들일 텐데 이들은 참주 정체를 찬양한다. 비극 작가들은 현명하기에 우리처럼 올바른 정체를 가진 이들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우리를 용서할 것이다. 비극 시인들은 돌아다니며 군중을 모으고 설득력 지닌 사람을 내세워 우리의 정체를 참주정과 민주정으로 선동한다. 참주들이나 민주 정체들에서 보수와 존경을 받지만 이 정체들의 가파른 경사를 오를수록 명예는 추락할 것이다.

주제에서 잠시 벗어났으니 다시 논의로 돌아가, 무슨 재원으로 참주정이 유지될지 살피자. 신전의 재화나 세금이 부족하면 그 패거리들은 자기를 낳은 아비의 재화로 지탱한다. 참주를 낳은 민중이 참주와 그 패거리들을 먹여살리는 셈이다. 민중이 이를 못마땅히 여겨 아들을 성가시게 대하며 패거리들을 내몰려 하면 참주는 아비의 무기를 뺏고 때리려 한다. 참주는 친부 살해자처럼 된다. 연기를 피해 불에 뛰어든다는 속담처럼 민중은 철 이른 자유 대신 노예나 다름없는 가장 가혹한 종살이라는 새옷을 갈아입은 꼴이다.


제9권

남은 것은 참주 정체를 닮은 사람이 어떻게 민주 정체를 닮은 사람에서 바뀌고 그렇게 된 다음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피는 일이다. 욕구에 관해 충분히 다루지 않아 아쉬우므로 언급하고 넘어가자. 이성적인 부분이 잠들면 부끄러움과 분별에서 풀려난 욕구가 일어난다. 스스로 건전하고 절제 있게 처신하는 사람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이성적인 부분을 깨워서 욕구적인 부분이 모자람도 충족도 느끼지 않도록 해줌으로써 이 부분이 잠들게 한다. 또 같은 방식으로 격정적인 부분을 진정시켜 격앙된 상태로 잠들지 않도록 한다. 욕구와 격정을 안정시키고 지혜로움이 깃든 부류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안식을 얻는다면 진리를 더 잘 파악하게 될 것이며 꿈속에서도 가장 ‘덜 비정상인’ 환영이 나타날 것이다. 절도 있는 사람에게도 무섭고 사나우며 무법적인 욕구가 있다. [없애진 못하므로 조화시키는 것이다.] 민주적인 사람은 오로지 돈벌이 욕구만 중시할 뿐 불필요한 욕구나 놀이 또는 과시 때문에 생기는 욕구를 멸시하는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을 것이다. 그가 욕구들로 충만한 사람과 어울리면 아버지의 인색함에 대한 미움과 반발로 갖은 오만함으로 치닫는다. 그렇지만 자기를 타락시키려는 사람들보다는 나은 성향을 지녔기에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고 부자유한 삶도 불법한 삶도 살지 않으니 그는 과두 정체적인 사람에서 민주적인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그 사람이 나이를 먹어 낳은 아들이 어떤 품행을 지닐지 상상해 보자. 아버지에게 일어난 일과 같은 일이 아들에게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그는 자기를 이끄는 자들에 의해 완전한 자유라 불리는 불법으로 향하게끔 인도될 것이다. 그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아버지와 친척들은 중간 상태인 욕구를 지원할 것인데 비해, 그쪽 사람들은 자기들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젊은이에게 욕정을 심어줄 것이다. 그러면 결국 혼은 온갖 쾌락으로 충만하게 되고 광기의 경호를 받으며 미쳐 날뛴다. 아직 남아있는 유익한 의견이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욕구들을 찾아내 죽여버리며 절제를 숙청해 버린다. 참주적 인간이 탄생한다.

예로부터 에로스가 참주라고 말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술 취한 사람이나 착란 상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든 에로스가 참주로서 혼 안에 거주하면 축제나 주연에서 기녀들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 돈을 탕진하고 돈을 빌리며 자신을 빼앗기는 일이 잇달아 일어난다. 자기 몫을 다 쓰면 아버지 자산을 빼앗으려고 폭력까지 쓸 것이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 정인을 위해 오래도록 사랑한 어머니를 버리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친구를 위해 오래도록 사랑한 친구를 때리게 된다. 이런 사람은 남의 집 담도 넘고 신전까지 털게 될 것이다. 올바른 것들이라고 간주되던 것들을 에로스가 지배한다. 이렇게 되면 드물게 꿈에서나 그렇게 될 법하던 사람이 깨어있어도 언제나 그런 성향을 띤다. 살인도 삼가지 않게 되며, 에로스는 이 사람의 지배자로서 완전한 무법 상태에서 참주처럼 군림한다. 이런 사람은 나라 안에 있기가 여의치 않으면 다른 나라에 가서 참주를 옹호하는 역할을 하거나 용병 노릇을 할 것이다. 평화 시대에는 국내에 살면서 온갖 나쁜 짓을 일삼을 것이다. 나쁜 짓이 상대적으로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데, 이건 참주의 나쁜 짓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들의 추종자가 많아지면 민주의 어리석음이 여기에 더해져 참주를 탄생시킨다. 그 참주는 그들 중에서도 자신의 혼에 최강인 극단적 참주를 지닌 것이다. 자신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면 외국에서 용병을 들여와서라도 조국을 자기 노예처럼 만들어 버릴 것인데, 이건 인간 욕구의 종말이나 다름없다.

참주 자신과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필요한 것을 얻으려 아첨하는 사람들이면서 얻고자 하는 걸 얻고 나면 남이 돼 버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온 생애를 거치도록 자유나 참된 우정을 맛보지 못한다. 으뜸으로 참주 노릇을 하는 자가 가장 오래도록 비참해지는 게 진리다. 참주 정체인 나라는 왕도 정체적인 나라와 모든 것이 정반대다. 그러니 이 모든 유형을 두루 경험한 사람의 말을 잘 들어 보아야 한다. 참주 정체인 나라에서 선량한 다수가 노예 노릇을 하고 사악하고 광적인 소수가 주인 노릇을 한다. 이 나라는 가난해지는 게 필연적이다. 이런 나라와 이런 나라를 닮은 사람의 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찰 것이다. 가장 비참한 경우는 참주 정체적인 인간이 실제로 참주가 되는 일이다. 노예를 많이 거느린 부자는 참주와 비슷해 보인다. 나라가 자기들을 보호해주므로 부자들은 두려움을 별로 갖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이들을 나라의 보호 손길이 미치지 않는 외진 곳에 노예들과 함께 살도록 한다면 부자들은 혹시 살해될까 싶어 커다란 두려움을 품을 것이다. 살기 위해 노예들 중 일부 소수에게 알랑거리며 여러 약속을 할 것이다. 참주는 이런 상황에 처한 비슷한 운명이다. 진짜 참주는 진짜 노예나 다름없으며 그의 일생은 온통 두려움과 고통뿐이다.

나라가 세 부분으로 나뉘듯 혼도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즐거움도 세 가지가 있으며 욕구와 그 다스리는 방식도 세 가지다. 첫째, 배움을 좋아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이 있다. 둘째, 이기기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 셋째, 이익을 탐하여 돈을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인간을 일차적으로 나누면 그 셋 중 하나에 분류된다. 이들에게 각각 어느 것이 가장 즐거울지 물어보면 자신이 속한 부류의 즐거움이 최고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것이 가장 진실한지 판정하려면 경험과 사려 분별과 이성적 추론에 맡겨야 할 것이다. 세 부류 사람 중에서 우리가 말한 즐거움에 대해 누가 경험이 가장 많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익을 탐하는 자가 지닌 지혜 경험과 지혜를 추구하는 자가 지닌 이익에 대한 경험을 비교하면 후자가 더 낫다. [이익을 추구하는 자는 지혜를 갖추기 어려우나, 지혜를 아는 자는 이익 추구에 관해서도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이 판단의 기준이라면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가장 훌륭하게 판정할 것이다. 이성적 추론을 판단 기준으로 삼자면, 이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의 주된 수단이므로 그들이 찬양하는 것이 가장 참될 것이다. 이로써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자를 두 번이나 이긴 셈이다.

(3번 치르는) 올림피아 경기 방식대로 구원자 제우스를 위해 [논의의 절정인] 셋째 논의를 해 보자. 분별 있는 자의 즐거움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즐거움은 참되지도 순수하지도 않으며 환영적이다. 우리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반대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중간 상태인 평온도 있을 것이다. 환자들은 아프기 전인 건강한 상태를 가장 즐겁다 말하는데, 정작 아프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아프니까 드는 생각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난 평온이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에서 벗어난 평온은 괴로움에 가까워야 한다. 혼이 즐겁게 되거나 괴로워지는 건 그러므로 운동[변화]의 일종이다. 고통스워하지 않는다 하여 즐거움이 아니요, 기뻐하지 않는다 하여 슬픔이 아니다. 비교하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므로 이는 속임수다.

괴로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 즐거움을 생각해 보자. 가령 갑작스레 좋은 냄새를 맡으면 즐거움이 커지는데 그 향이 사라진다 해서 괴로움을 남기진 않는다. 육신을 거쳐 혼에 미치는 이른바 쾌락들은 대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들로 순수한 즐거움이 아니다. 닥쳐 올 즐거움도 순수하지 않고 괴로움에 앞서 생기는 앞선 괴로움도 순수하지 않다. 자연에는 위, 아래, 중간이 있다. 아래에서 중간으로 온 사람은 정작 위를 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이 위로 이동되었다고 생각한다. 위, 아래, 중간을 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실을 경험하지 못하고 많은 것들에 건전하지 못한 의견을 지닌다면, 백색을 모른 상태에서 흑색과 대비된 회색을 흰색처럼 받아들이듯, 괴로움에서 중간 상태로 옮겨지면 충족과 즐거움에 다 이른 것으로 여길 것이다.

배고픔이나 목마름은 적극적 상태에 비하면 빈 상태다. 무지나 무분별도 적극적인 혼의 상태에 비해 비어 있는 상태다. 순수한 존재에 더 많이 관여하려면 언제나 같고 불멸하며 참된 것과 관계해야지,같지 않으며 사멸하는 것과 관계하지는 않을 것이다. 육신을 보살피는 것과 관련한 부류들은 덜 미덥거나 덜 진실한 즐거움에 관여하기에, 혼을 보살피는 부류보다 진리와 존재에 훨씬 덜 관여할 것이다. 사리 분별과 훌륭함에 대해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아래와 중간을 헤매며 일생을 보내기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과 순수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다. 이들은 가축들처럼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서로 죽이기까지 하고, 채워지지도 않을 자기 욕망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채우려 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난 상태가 즐거움이 아닌데도, 참된 즐거움을 흉내낸 가짜 즐거움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격정적인 부분도 비슷하다. 헤아림과 지성이 결여된 상태로 명예나 승리를 추구한다면 즐겁게 보이기만 할 뿐 참되지 않은 그런 일들이 생길 게 필연적이다. 이익을 탐하는 욕구와 이기기를 좋아하는 요구가 지식과 이성적 추론을 따르고 함께 즐거움을 추구하면 가장 진실될 것이다. 혼 전체가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을 따르면 혼의 각 부분은 제 일을 하며 각각 자신의 즐거움을 가장 참되게 누릴 것이다. 그렇지만 나머지 부분들 중 하나가 지배하면 참되지 않은 즐거움을 추구하게 된다. 철학과 이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들이 이런 일을 빚을 것이며 법과 질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야말로 이성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이다. 애욕적이며 참주적인 욕구들이 법과 질서에서 가장 멀며 왕도적이고 절도 있는 욕구는 가장 가깝다.

즐거움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적자[왕도 정체적 인간]이고 나머지[과두 정체적 인간, 참주]는 서자다. 참주는 서출들의 즐거움을 누리려고 저편으로 넘어가 있다. 과두 정체적 인간에서 세 번째쯤에 떨어져 있는 셈이다. 이 사람이 진실을 누리는 즐거움도 이와 마찬가지도 과두 정체적 인간의 즐거움에서 세 번째인 [허깨비나 다름없는] 영상과 함께 사는 셈이다. 과두 정체는 왕도 정체적 인간에서 세 번째이니 따져보면 참주는 참된 즐거움에서 세 배의 세 배만큼 떨어져 있다.

처음에 언급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철저히 올바르지 못한데도 올바르다 간주되는 자에게는 올바르지 못한 짓이 이익이 된다고 했다.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는 것과 올바름을 행하는 것이 각각 어떤 힘을 지니는지 우리가 합의했으니, 혼의 상을 말로 형상화하여 설명해 보기로 한다. 옛날에 있었다고 하는 생물인 키마이라[사자+염소+뱀], 스킬레[개+여인], 케르베로스[개+뱀]는 여러 동물 형태가 합쳐진 생물이다. 이것과 비슷하게 머리가 여럿인 짐승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자 모습을 띤 생명체도 하나 있고, 사람 같은 생명체도 하나 있다. 머리가 여럿인 짐승이 가장 크고 사자가 그 다음으로 크며 사람은 셋 중에 가장 작다. 이 세 생명체를 인간의 거죽으로 감싸서 겉으로 보면 인간처럼 보이게 만든다.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은, 짐승과 사자만 잘 먹여 강하게 만들되 자기 안의 사람은 쇠약하게 만드는 꼴이다. 반면에 올바른 것이 이롭다는 주장은 인간이 내부를 최대로 장악하여 짐승을 유순하게 하고 사자를 협력자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모든 면에서, 올바름을 찬양하는 자는 진실을 말하지만 올바르지 않음을 찬양하는 자는 거짓을 말하는 셈이다. 즐거움이나 명성이나 유익함도 마찬가지여서 올바름을 향한 비난은 스스로 무엇을 비난하는지도 모르고서 비난하는 격이다.

자의가 아니라 모르기에 실수한 그를 부드럽게 설득해 보자. 우리 성향 안의 야수적인 것이 인간적이거나 어쩌면 신적인 것에 종속되면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하고, 온순하던 것이 사나운 것에 굴종하면 이를 추하다 말한다. 가령 누구든 황금을 올바르지 않게 갖게 되어, 자신의 가장 훌륭한 부분이 가장 사악한 부분에 종살이한다면 황금은 파멸의 대가일 뿐이니 자신에게 결코 이롭지 않은 것이다. 저 무섭고 거대한 짐승을 필요 이상으로 풀어주기 때문에 무절제가 비난 받아온 것이다. 사치와 나약이 비난 받는 건 격정적인 부분이 풀어져서 생기는 비겁 때문이다. 아첨과 비굴이 비난 받는 건 격정적인 부분을 광포한 짐승에게 종속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적이며 분별 있는 것에 지배되어야 한다. 나라의 모든 이에게 협력자인 법의 취지가 그렇다. 올바르지 않은 짓을 저지르고도 처벌 받지 않는 건 혼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 교양 있는 이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안의 통치 체제를 응시하며 혼이 무너지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이 나라는 지상에 없지만 그걸 보고자 하는 자를 위해 본으로서 하늘에 바쳐져 있다. 그 본이 어디에 있든 그는 그 나라 같은 정치만 실현하고자 할 것이다.


제10권

하늘에 본으로 바쳐진 나라에서는 시의 모방적인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호메로스를 비롯한 비극 시인들이 훌륭한 스승이며 지도자처럼 보인다 해도 진리 앞에 사람이 더 존중되어선 안 되기에 비판하고자 한다. 침상의 이데아가 있다고 하자. 가구 장인은 이것을 본따고자 노력하며 침상을 만든다. 그것은 실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실재와 비슷한 것을 만드는 일이다. 침상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아마도 본질 창조자인 신이 만든 침상 2) 장인이자 제작자인 목수가 만든 침상 3) 모방자인 화가가 그린 침상. 비극 작가는 모방자인 화가에 해당한다. 진리에서 세번째에 있는 자다. 보이는 현상을 모방하므로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비극과 비극의 선구자인 호메로스를 검토한다. 어떤 이들은 이 자가 모든 인간사와 신들의 일까지 아는 위인이라 여긴다. 그렇지만 전쟁, 나라 경영, 교육처럼 가장 중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들과 관련하여 어떤 식으로든 더 낫게 하거나 더 못하게 하는 법에 대해 우리에게 말한 적이 없다. 공적인 발언이 없다면 사적인 것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가령 좋은 교육을 펼쳤는지 궁금하다. 그는 자기 시대에 그런 일들에 철저히 무관심했던 인물이라고 알려진다. 호메로스를 비롯한 모든 시인은 훌륭함의 영상을 모방하는 자들이다. 실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현상에 대해서만 안다. 고삐와 재갈에 대한 지식은 대장장이나 재단사보다 말타는 사람이 더 잘 갖고 있다.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한 것들을 옳게 판단하지도 못한다. 모방은 기껏해야 놀이의 일종이다. 모방은 진리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크기가 같은 것이라도 가까운 건 커 보이고 멀면 작아 보인다.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혼 안에도 이런 게 있다. 측정과 계산이 구원자로 등장하는데 혼에서 이성이 하는 일이 이것이다. 동일한 것을 두고 동시에 상반된 판단이 성립할 순 없으므로, 이성이 측정한 것과 달리 판단하는 혼의 부분은 이성과 같지 않은 변변찮은 부분일 것이다. 일체 모방술은 변변찮은 것과 어울리어 변변찮은 것들을 낳는 변변찮은 것이다. 시의 모방술에 관계되는 사고가 변변찮은 것인지 중요한 건지 살펴 보자.

이성과 법은 괴로움에 저항하도록 지시하지만, 감정은 그 쪽으로 이끌리도록 한다. 이성과 법은 괴로움에 빠지지 않고 일어난 일에 대해 결단을 내리어 혼을 바로잡고 버릇들이도록 처리하며 언제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반면에 감정은 비탄으로 인도하며 비이성적이고 비겁과 친근하다. 화를 잘 내는 성격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 못하여 다채로운 여러 모방을 수용한다. 감정에 관계하는 시의 모방술도 그러하니 진실에서 아주 먼 허상들을 만들어 개인의 혼 안에 나쁜 통치 체제가 생기게 한다. 호메로스나 비극 시인들이 영웅의 비탄을 모방하면, 우리는 동정을 품게 하고 그런 상태에 되도록 오래 있게 하는 시인을 훌륭하다 칭찬한다. 그러나 슬픈 일이 생기면 침착성을 유지하며 그걸 견뎌낼 때 이를 남자답다고 칭찬한다. 그런데 저런 시인을 칭찬한다면 잘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불운에 처해 억제된 울고싶은 부분을 비극 시인들이 충족해 주고, 희극 시인들은 이성에 의해 억제된 저급한 즐거움을 충족해 준다. 시작이 모방하는 이런 것들이 조장되면 혼의 지배자로 들어앉게 된다. 우리가 더 낫게 살고 더 행복하게 되려면 이것들은 지배받는 것들이 되어야 한다.

호메로스에게 교육이나 인간사의 경영과 관련하여 배웠기에 받들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호메로스가 으뜸 간다는 데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찬양만 받아들여야지 즐겁게 하려고 쓴 시가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 우리가 시를 추방했던 건 그 때문이다. 철학과 시의 오랜 불화를 나타내는 무수한 표현들이 있다 해도, 시와 모방이 훌륭한 나라에 있어야 하는 논거를 말할 수 있으면 우리는 반가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아직 훌륭함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있다면 굉장히 큰 것일 텐데 일생이라는 짧은 시간에 그게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혼은 죽지 않으며 결코 파멸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걸 보고 좋다 하거나 나쁘다 말한다. 파멸시키고 몰락시키는 것은 나쁜 것이나, 보전해 주고 이롭게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눈에 염증이 나고 쇠가 녹슬듯 거의 모든 것에는 나쁜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혼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올바르지 못함이거나 방종, 비겁, 무지 들일 것이다.

곡식의 나쁜 상태가 병을 유발하여 육신이 파멸한다면 병이 파멸의 원인이라 해야지 곡식이 원인이라 해서는 안 된다. 혼의 특유한 나쁜 상태가 아닌 다른 것에 속하는 나쁨으로 혼이 파멸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혼 밖에 있는 나쁜 것이 혼을 파멸시킬 순 없다. 그리고 혼 안에 있으면서 달라붙은 나쁨이 혼을 타락시키고 쇠약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결국 육신에게서 떼어놓게 하는 것도 아니다. 혼 안의 올바르지 못함이 혼을 파멸시키지도 못한다. 그러니 혼은 그 어떤 나쁜 것에 의해서도 파멸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필연적으로 ‘언제나 있는 것’임이 명백하다. 혼은 죽지 않으므로 같은 혼들이 언제나 있을 것이며 적어지거나 많아지지도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많은 것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은 영원히 존속하기 어렵다. 육신과 복합적으로 결합한 나쁜 것들도 인해 영혼이 훼손된 모습을 볼 것이 아니라,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의 원래 모습을 애써 알아 보려는 것처럼, 혼의 순수한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 추론으로 검토해야 한다.

올바름이 가져다주는 보수나 평판을 칭송하지 않고서도 올바름이 그 자체로 혼을 위해 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권력을 갖든 갖지 않든 상관없이 올바른 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올바름과 그 밖의 훌륭함으로 신들이 혼에게 이득을 준다 하여 이를 나무랄 까닭은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동안 논의에서 대화 상대자들이 빌려간 것을 자기에게 되돌려달라고 요청한다.]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지 않게 보이거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올바로 보인다는 점을 예전에 인정했던 것은 더 발전된 논의를 위해 잠시 양보했던 것이다. 그러니 빌려주었던 양해를 이제 거두고자 한다. 실제로 올바름은 올바르기에 좋은 것을 주기도 하고 올바르게 보이기에 또 보상을 받기도 한다. 올바른 사람은 가능한 한 신을 닮고자 한다. 영리하기만 하고 올바르지 못한 자들은 출발점에서는 잘 달리나 반환점부터는 그러지 못하는 달리기 선수처럼 처음에는 날쌔게 출발하나 결국엔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달리기를 진짜 잘 하는 사람은 생의 끝에 이르러 좋은 평판과 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제껏 이야기한 이런 것들은 죽음 다음 우리를 기다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전투에서 죽었다 살아난 용감한 남자 에르는 육신을 벗어난 혼이 많은 다른 혼과 여행을 하다가 신비한 곳에 도착하여 본 이야기를 전한다. 심판자들이 있는 이곳에는 아래위로 네 갈래 길이 있다. 오른쪽 윗길은 올바른 혼이 올라가는 길이다. 왼쪽 아랫길은 올바르지 못한 혼들이 내려가는 길이다. 왼쪽 윗길은 순수한 혼들이 내려오는 길이며 오른쪽 아랫길은 더러운 혼들이 땅에서 오는 길이다. 앞으로 이승의 열 배에 해당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이곳을 뛰어넘어 천구와 지구를 통과한 빛 끝에는 여신이 방추를 돌리고 있는데 이것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렇지만 최종 선택은 혼 스스로 해야 한다. 운명을 지키는 수호신인 다이몬이 인간의 혼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혼이 다이몬을 선택한다. 훌륭함에는 따로 주인이 정해져있지 않으므로 귀하게 여기는 자는 더 갖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는 덜 갖는 것이 이치다. 그건 신 탓이 아니라 선택한 자의 몫이다.

유익한 삶과 무익한 삶을 구별하여 언제 어디서든 최선인 것을 선택할 수 있게끔 하는 학문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학문에 되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혼의 본성에 유의하면서 여러 가지를 뒤섞는 선택을 해 주는 그런 학문 말이다. 그렇게 배워서 얻은 소신을 저승에 가져간다 해도 금강석처럼 굳게 지니고 꺾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언제나 중용인 삶을 선택하여 극단을 피하면 인간은 가장 행복해진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는 힘든 일로 단련을 받은 일이 없기에 안일하게 선택하기 쉽다. 땅에서 온 자는 자기도 고생하고 남들의 고생도 목격했기에 신중하게 선택한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이렇게 엇갈리기도 한다. 이승에서 건전하게 철학을 공부했다면 이승에서도 행복할 것이며 하늘을 향해 난 부드러운 길을 따라 올라갈 것이다. 대부분 혼들은 전생의 습관을 따라 익숙한 대로 선택한다. 다이몬의 안내로 여신 아래에서 그 운명을 확인 받는다. 망각의 평야로 나가는데, 분별 없는 자는 망각의 냇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탓에 모든 걸 잊는다. 냇물을 마시지 않은 에르가 다시 살아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했다.

혼이 불사하여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모두 견뎌낼 수 있는 것이라 믿으면, 우리는 언제나 그 윗길로 가며 올바름을 수행할 것이니, 이는 우리가 자신과도 그렇고 신들과도 잘 어울리기 위함이니라. 그러면 이승에서도 그리고 천 년에 걸친 여정에서도 우리는 잘 지내게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