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안인희 옮김, «위로하는 정신», 유유, 2012.

몇몇 작가들은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생애의 모든 시기에 활짝 열려 있다. [···] 그 밖에 특정한 순간에야 비로소 그 완전한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지는 작가들도 있다. 몽테뉴는 후자에 속한다. 아직은 젊어서 경험이 부족하거나 좌절을 겪은 적이 없는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거나 존중하기가 어렵다. – p. 21

젊음의 본질에는 온건함과 회의를 품으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소가 있다. 어떤 의심이든 젊음에는 방해가 될 뿐이다. 내면의 격정을 쏟아내기 위해 젊음은 믿음과 이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p. 23

[···] 이미 빼앗긴 다음에야 비로소 그 귀함을 안다는 것이 인생의 비밀스러운 법칙이다. – p. 25

우리 시대에 새로운 성과와 기술의 기적, 완벽한 조직 등이 가장 끔찍한 파괴의 공장으로 바뀌었듯이, 인류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던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의 요소들이 치명적인 독으로 변했다. [···] 인문주의에서 야만성으로의 추락을 – 우리가 오늘날 다시 겪고 있는 것 같은 인류의 광증의 폭발을 – 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던 것, 흔들림 없는 정신의 각성과 누구보다도 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인해 영혼이 깊은 충격을 받고 있는데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몽테뉴의 삶에서 근원적인 비극이었다. – p. 27

이런 야만성 한가운데서 어떻게 마음속 휴머니즘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 몽테뉴는 자신의 삶과 힘과 노력과 기술과 지혜를 몽땅 동원해서 이 질문에 열중했다. [···] 우리가 예술가인 그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존경한다면, 그 까닭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삶의 최고 기술을 위해 자신을 바쳤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킨다는 가장 높은 기술’에 말이다. – p. 32

“분별력이 있는 인간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시대의 사건들은 네가 거기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한 네게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 네가 스스로 명료함을 지닌다면 시대의 광증은 진짜 곤궁이 아니다. [···] 너 자신 말고는 그 무엇도 너의 자아를 귀하거나 비천하게 만들지 못한다. [···] 패거리 짓기와 혼란의 시대에 정직함과 인간성 말고 그 무엇이 우리를 더 잘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 – p. 39

그에게는 가장 작은 일화가 세계 체계보다 더 중요했다. 최고의 예술, 아니면 아예 예술성이 없는 것이 중요했다. 시인 아니면 그냥 단순한 연대기 기록자. 베를렌의 말처럼 “그 밖에 나머지는 그냥 문헌”··· – p. 93

몽테뉴가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형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표어를 메달에 새겨넣고 다닌 이 사람은 무엇보다 경직된 주장을 싫어했고, 자신에게 정확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 p. 110

인간을 가르칠 수는 없으며 오로지 인간이 스스로를 탐색하도록, 자기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안내할 수 있을 뿐이다. – p. 111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 p.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