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봉, «한글 민주주의», 책과함께, 2012.
최경봉, «한글 민주주의», 책과함께, 2012.
언어의 간명화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마추다’와 ‘맞추다’를 ‘맞추다’로 통합시켜 표준어로 삼은 것은 간명화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 그렇다면 ‘윗도리’와 ‘웃어른’으로 구분하여 쓰는 ‘윗-’과 ‘웃-’도 하나로 통합하여 쓸 수 있을 것이다. ‘대장장이’나 ‘개구쟁이’에서 ‘-장이’와 ‘-쟁이’도 마찬가지다. ‘세 마리’, ‘석 돌’, ‘서 말’ 등으로 구분해온 수의 표현이 복잡하기만 할 뿐 현실적인 의미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세’로 통합하는 것 또한 간명화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인위적 규볌범이라 할지라도 현실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하고, 현실 언어와 공존할 때 간명화한 규범의 실용서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 p. 67
표음주의 표기법에 비해 형태주의 표기법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어려운 표기법을 배우고 지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던 것이다. – p. 79
국어 순화라는 말은 국어를 순수한 말과 불순한 말로 분리해 보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말들이 여러 가지 요소가 뒤섞인 불순한 상태에 있다. – p. 97
한국식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으로 이분한 후, 정체가 모호한 한국식 문체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표현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다. [···] 난해한 법률문은 법을 매개로 기생하는 권력 집단의 독점권을 강화시켜주는 수단이 될 뿐이고,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정 서류와 서식은 정보의 공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관료 집단의 권위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이를 바로잡는 정책적 접근은 외래 요소를 정리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의사소통을 민주화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p. 115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고유어와 외래어는 그 단어를 이해하는 토대가 다르다는 것이다. 즉 고유어는 어근을 통해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어휘라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지만, 외래어는 해당 외국어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 이러한 가능성이 차단된다. – p. 123
“그 틀사진은 주민등록증에 붙어 있던 흑백 증명사진을 부랴사랴 확대하여 마련한지라 전체적으로 우중충한 기분을 줄 뿐 아니라 윤곽마저 희미하게 어룽거려 마치 급조된 몽타주 속의 인물을 연상시켰다. 조붓한 공간 속에 갇혀 겅성드뭇한 대머리를 인 채 움펑 꺼져 대꾼한 눈자위로 방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는 무엇에 놀랐는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어깨까지 한껏 곱송그리고 있어 방금 열병을 앓고 난 이 같았다.” – 김소진, <쥐잡기>, <<경향신문>>
김소진의 소설 속 한 단락이다. [···] 그는 일반 사람들이 국어사전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형용사와 부사들을 소설의 한 단락에 모아 이야기 속 상황을 꼼꼼히 전달하고 있다. 처음 본 어휘지만 상황이 생생하게 와닿는 걸 볼 때, 작가는 이들 어휘를 생활 속 언어로 재탄생시켰다고 할 것이다. [···] 김소진은 어휘를 발견하는 소설가였다. 작가는 모국어의 창조자라는 말을 어쭙잖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기억 저편에 있는 그러나 우리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어휘를 발견해냈다. 그래서일까? 그가 발견해낸 어휘는 낯설었지만, 그의 소설 안에서 독자와 어휘는 스스럼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 p. 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