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맥널 번즈(Edward McNall Burns)·로버트 러너(Robert E. Lerner)·스탠디시 미첨(Standish Meacham), 손세호 옮김, «서양 문명의 역사(하)», 소나무, 2011.

원제: Western Civilization

파리 대학살

1572년 8월 성 바돌로매 축제 전날 밤. 프랑스의 카톨릭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때마침 결혼식 참석차 파리에 머물고 있는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에 대한 기습을 윤허하였다. 한밤중에 영문도 모른 채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바로 잠자던 침대에서 난자당하거나 창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이 사건은 성 바돌로메 축일의 대학살로 명명되었다. … 그러나 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종교 폭동과 더불어 발생한 경제적 곤경과 계속되는 전쟁으로 유럽 문명은 한 세기에 걸쳐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 1560년에서 1660년까지 서유럽은 … 엄청난 혼란과 심각한 시련의 시대를 맞게 된다.

치솟는 가격

유럽의 고난 시기는 그 시대 사람들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찾아왔다. … 1560년경에 이르면 가공할 폭풍우를 몰고올 암운이 당시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이 폭풍우의 원인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원인은 따로따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엄청난 가격 폭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1551년에서 1600년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서유럽에 휘몰아친 가격 상승 추세는 일찍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플랑드르의 밀 가격은 1550년에서 1600년 사이에 세 배나 올랐다. 파리의 곡물 가격은 네 배로 뛰었으며, 같은 기간 영국의 전체 생활비는 100퍼센트 이상 앙등하였다. …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가격 혁명”이라 부른다. … 하지만 가격 혁명을 초래한 조건들을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 그렇지만 엄청난 인플레이션의 원인에 대한 다음의 두 가지 설명만은 자신 있게 제시할 수 있다.

(1) 인구 증가: 첫번째 원인은 인구학적인 것이다. 15세기 말부터 유럽 인구는 페스트로 인한 인구 감소 이후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유럽 인구는 1450년경 대략 5천만명 가량이었다. 하지만 1600년경에는 약 9천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하지만 농업 기술상으로는 현저한 발달을 이루지 못했다. … 식량 공급은 이전과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식량 수요의 증가는 불가피하게 식량 가격 급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2) 은의 유입: …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부터 엄청난 양의 은이 유입되었다는 사실을 드는 것이다. 1560년경 은광석에서 은을 채취하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로써 멕시코와 볼리비아의 새로 발견된 은광에서의 채광 작업은 매우 능률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곧 유럽 경제에 소량씩 유입되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됨을 의미했다. … 은의 대부분은 에스파냐 왕실이 외국의 채권자와 휘하 군대에 지불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개인들도 외국산 수입품에 대한 대가로 은을 지불하였다. 에스파냐의 은은 빠른 속도로 전유럽에 유통되면서 그중 상당량이 화폐로 주조되었다. 통화량의 급격한 증가는 가격 상승의 소용돌이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정치적 파장

16세기 후반의 가격 상승은 … 정치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인플레이션이 화폐의 실질 가치를 하락시켰기 때문에, 각종 세금으로부터 들어오는 고정 수입이 실제로는 점점 더 줄어들었던 것이다. 정부가 수입을 계속 유지하려면 강제로 세금을 올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 당연히 신민들의 격심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인플레이션으로 주머니에 남은 것이라고는 먼지뿐인 극빈자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저항하였다. 이제 정부는 계속적인 도전의 위협과 잠재적인 무력 항거의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종교 전쟁

소위 철의 세기의 유럽은 종교 전쟁의 도가니였다. … 간단히 말하면, 대부분의 카톨릭 교도와 프로테스탄트 교도는 서로를 살아 있어서는 안 될 사탄의 앞잡이로 보았다. … 설상가상으로 군주 국가들은 종교적 통일성을 강요하였다. 이는 “왕관과 제단”이 서로에게 상호 지원을 제공해 준다는 근거에서, 또 다양한 신앙이 만연하는 곳에서는 정부가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호전적인 칼뱅주의자와 예수회원들은, 그들이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기득 세력권을 전복하는 데 주력했다. … 그 과정에서 때때로 내란이 야기되고, 양측은 상대편이 박멸될 때까지 승리는 없다는 듯이 처절하게 싸웠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네덜란드 지배

프랑스의 종교 전쟁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발생한 인접국 네덜란드에서의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종교 전쟁도 마찬가지로 참혹한 것이었다. … 오늘날의 홀란드와 벨기에로 구성된 당시의 네덜란드(혹은 저지대 지방)는 거의 1세기 동안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아 왔다. 당시 네덜란드 남부(벨기에쪽)는 무역과 제조업으로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남부 네덜란드인들은 전 유럽을 통해 일인당 가장 큰 부를 누리고 있었다. 또 중심 도시인 안트베르펜은 북유럽의 상업 및 금융 중심지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1506~1556)의 반세기에 걸친 통치는 평판이 좋았다. 벨기에 도시 겐트에서 출생한 카를 5세는 자신의 신민들에게 친밀감을 느꼈고, 주민들에게 상당한 정도의 지방 자치를 허용해 주었기 때문이다.

펠리페 2세와 임박한 위기

1560년경부터 네덜란드의 행운은 기울기 시작했다. 카를 5세는 사망 2년 전인 1556년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왕좌에서 물러났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과 헝가리를 제외한 광대한 모든 영토 – 네덜란드뿐 아니라 에스파냐,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그리고 이탈리아의 거의 절반 – 를 아들인 펠리페 2세(1556~1598)에게 물려주었다.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와 달리 에스파냐에서 태어나 스스로를 에스파냐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그는 네덜란드를 우선 에스파냐 중심의 정책을 펴는 데 필요한 풍요로운 잠재 수입원으로 보았을 뿐이다. … 네덜란드의 부를 빼내기 위해서는 펠리페 2세는 부왕보다 한층 더 직접적인 통치를 해야 했다. 그러한 시도는 당연히 그때까지 네덜란드 정부를 장악해 오던 지방 유력자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종교 폭풍마저 불어닥치고 있었다. 1559년의 조약으로 프랑스와 에스파냐 간의 장구한 전쟁이 끝난 이후 프랑스 칼뱅주의자들은 가는 곳마다 개종자들을 만들면서 네덜란드 국경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내 안트베르펜에는 주네브보다 더 많은 칼뱅주의자들이 살게 되었다. 이는 반동 종교 개혁을 진심으로 지지하는 열렬한 카톨릭 교도인 펠리페 2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과 에스파냐 간의 적대감

카톨릭을 신봉하는 메리 여왕과 그녀의 부군인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가까스로 탈출한 이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58~1603)의 통치를 환영했다. 따라서 펠리페 2세와 반동 종교 개혁에 대해 큰 적대감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영국의 경제적 이해 관계는 에스파냐의 그것과도 직접 대립하였다. 해상 활동과 무역에 종사하는 민족인 영국인들은 16세기 후반에 에스파냐의 해군 및 상업적 지배를 점차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 타고난 약탈자 드레이크는 세계 일주를 하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일년 수입의 두 배 가치에 달하는 에스파냐의 보물을 약탈해 가지고 귀환했다.

에스파냐 무적 함대의 패배

이러한 모든 일들은 분노한 펠리페 2세로 하여금 영국을 응징하게끔 만든 충분한 원인이 되었다. … 1588년에 그는 무례한 브리타니아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무적 함대”라고 부르는 자신 만만한 대함대를 파견했다. … 무적 함대의 패배는 서양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 결과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날은 구원을 받았고, 이후 머지않아 에스파냐의 세력은 기울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영국과 네덜란드의 선박들은 해상에서 이전보다도 더 강력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더욱이 영국 내에서는 애국적 열정이 더욱 강렬해졌다. … 또한 영국은 문학적인 열정이 왕성한 황금기인 “엘리자베스 시대”를 열게 되었다.

30년 전쟁

1609년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간의 휴전으로 종교 전쟁은 점차 뜸해지더니 마침내 17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1618년 또 다시 중요한 새로운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번에는 독일이 그 무대엿다. 이 전쟁은 1648년까지 거의 중단 없이 계속됐기 때문에 30년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발발한 30년 전쟁은 … 종교적 열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했지만, 독일 헌정상의 기본 쟁점들이 제기되면서 애초의 종교적 문제는 거의 배제되고 국제적인 전쟁으로 탈바꿈한 채 끝을 맺었다. … 1648년까지 전쟁은 사실상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에 대항한 프랑스와 스웨덴의 전쟁이었고, 이와 더불어 독일의 대부분 지역은 얖날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터가 되었다.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

1648년에 30년 전쟁을 마침내 끝내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다. … 국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가 에스파냐를 대신해 유럽 대륙이란 무대에 유력한 지배 세력으로 재등장하도록 했다. … 프랑스는 알자스의 상당 부분을 인계받음으로써 동쪽 국경을 독일 영토쪽으로 확장시켰다. 독일의 내부 문제로 엄격하게 한정시킬 때 가장 큰 패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었다. … 신성 로마 황제의 지위를 이용하여 중부 유럽을 지배하려던 희망을 포기해야만 했다. … 독일은 너무도 절망적으로 산산조각 나뉘어져서 19세기까지 유럽사에서 아무런 주도적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카스티야 정부에 대항한 국내 반란

이 반란들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세기에 실질적인 “에스파냐 국가”는 카스티야뿐이었다는 사실과 그 밖의 모든 지역은 정복된 영토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디난트의 결혼 이후,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한 카스티야는 1492년에는 남부 에스파냐의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를 정복하였다. 1580년에는 포르투갈까지 병합하여 더욱 막강해짐으로써 에스파냐 연합 내에서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에스파냐와 프랑스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영토의 크기가 거의 같았고 똑같은 확대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카스티야 왕실이 북부의 아라곤과 남부의 그라나다 그리고 나서 포르투갈을 획득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왕국도 랑그도크, 도피네, 프로방스, 부르고뉴, 브르타뉴와 같은 여러 영토를 하나씩 추가하면서 성장했던 것이다. 이 모든 영토의 주민들은 포르투갈 인만큼이나 자신들의 지역적 독립 전통을 소중히 여겼다. … 30년 전쟁으로 인한 절박한 재정 압박이 무자비한 세금 징수를 강요했을 때 – 에스파냐처럼 프랑스에서도 중앙 정부와 지방 간의 직접적인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에스파냐가 이겨내지 못했던 그 폭풍우를 무사히 넘겼다. 그 결과 프랑스는 더 많은 부와 더 강력해진 왕실의 위용을 누리게 되었다.

절대주의의 정의

루이 14세의 직접적인 지배권 장악으로부터 프랑스 혁명까지의 시기를 일컬어 우리는 절대주의 시대라고 한다. … 우리는 1500년경 이래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국가에 전권을 부여한느 경향이 전반적으로 등장했음을 이미 주목한 바 있다. 16세기의 군주들은 프로테스탄티즘 속에서 하나의 길을 보았다. 교황 및 귀족 세력에 대항해 국가의 주권을 주장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보댕 같은 정치 사상가들은 루이 14세가 프랑스에서 지배권을 장악하기 오래 전에 저술을 통해 절대주의의 이론을 옹호하고 있었다. … 프랑스의 종교 전쟁, 독일의 30년 전쟁, 그리고 영국 혁명은 모두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절대주의자들은 강력하고도 중앙 집권화된 정부에 의해서만 국내 질서가 바로잡힐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상주의자들이 통제에 의해 경제 안정이 올 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 똑같이, 절대주의자들은 신민들이 그들의 신성한 지배자들에게 복종해야만 사회, 정치적 조화가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군주제 자체에 대해 일차적으로 충성심을 바치는 효율적인 관료 집단이 필요했다. … 정책의 뚜렷한 특징은 강력한 제도를 확립하려는 그 단호한 의지였다.

영국의 예외적인 발전

영국의 17세기 말 정치사는 대륙의 절대주의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 찰스 2세는 … 전제 군주로서 통치하지 않을 것이며, 의회를 존중하고 대헌장 및 권리 장전을 준수하겠노라고 서약했다. … 1670년대 말에 이르러 영국은 정치적으로 국왕 지지파(반대파에 의해 “토리당”Tories으로 불렸는데, 이 말은 아일랜드 카톨릭 산적들을 일컫는 널리 알려진 별명이었다)와 국왕 반대파(그들 역시 반대파에 의해 “휘그당”Whigs으로 불렸는데, 이 말 역시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반도들을 일컫는 별명이었다)로 양분되었다.

“명예” 혁명?

영국인들은 1688년과 1689년의 사건을 곧 “명예 혁명”이라고 불렀다. 영국인들이 이렇듯 이 사건을 명예롭게 생각한 것은 아무런 유혈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1688년 이후 어떤 왕이나 여왕도 의회 없이 통치하려 들지 않았고, 그 후로 의회는 매년 소집되었다. “명예 혁명”은 … 또한 보댕, 홉즈, 보쉬에 등의 사상에 도전하기 위해 17세기 말에 등장한 반절대주의 이론을 반영해 주는 것이었다. … 대표적 인물은 존 로크(1632~1704)였다. … 자연 상태에서 유일한 법은 자연법이며, 모든 개인은 자신의 생명, 자유, 재산의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법을 스스로 집행했다. … 사람들은 시민 사회를 만들고 정부를 수립하여 정부에 일정한 권리를 양도하기도 동의했다. … 만일 정부가 정치 계약에서 명백하게 허용된 권력을 초과하거나 남용할 경우에 그것은 전제 정부가 되었다. 그때 인민은 정부를 해산시킬 권리를, 또는 정부에 대한 반란을 기도하여 그것을 전복시킬 권리를 갖게 되었다. … 로크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이론적 옹호는 18세기 말에 프랑스 혁명의 지적 배경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위트레흐트 조약

1713년에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은 일종의 진지한 시도였다. 영토와 세력을 공평한 몫으로 재분해하는 선에서 갈등을 해결하자는 것이 그 목표였다. 어느 세력도 승자 또는 패자로 등장하지 않았다. 루이의 손자인 필립은 에스파냐의 왕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루이는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결코 같은 지배자로 통합되지 않으리라는 데 동의했다.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영토를 획득했다. 영국은 지브롤터와 메노르카 및 아메리카의 영토를 획득하였다. 아메리카 영토에는 뉴펀들랜드, 아카디아, 허드슨만, 그리고 카리브 해의 세인트 키츠 등이 포함되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이 에스파냐로부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아프리카 노예를 공급할 수 있는 공급권assiento을 얻어냈다는 사실을 것이다.

“계몽” 절대주의

18세기의 절대주의는 앞선 세기의 루이 14세가 창작해 낸 주제에 대한 일련의 변주곡이었다. 하지만 18세기의 절대주의가 “계몽” 절대주의라는 역사적 호칭을 부여받은 것은, 그러한 변주가 상당한 중요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8세기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통치권을 왕권 신수설로서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선언한 바와 같이, “국가의 첫번째 공복”으로서 행동하겠다는 결의로서 뒷받침했다. 계몽 절대 군주들은, 적어도 이론상, 국가 공동체 전체의 복리를 위한 개혁적인 입법과 행정을 도입함으로써 신민들에게 봉사하였다. … 예를 들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대부분의 카톨릭 국가들로부터 예수회가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 농노제는 폐지되거나 독일의 일부 국가들에 국한되었다. 조세, 경제 발전, 교육 등의 분야에서 혁신적인 정책이 수립되었다. … 이러한 합리적인 계획은 베카리아Beccaria, 디드로Diderot, 볼테르Voltaire 같은 사상가들의 저술에서 천명된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었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었다.

로버트 월폴과 영국 정치의 본질

당시 정치는 제1원리도 아니었고 국가적인 입법 활동 또한 아니었다. 그것은 “이권”과 “영향력”, 즉 얽히고 설킨 신세를 갚기 위해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청탁을 들어줄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파당을 엮는 일이었다. 한 명의 장관이 외무부 관료의 1/3을 교체한 경우와 의회가 인클로우저법을 제정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정치 게임의 최고수는 1720년대 초부터 1742년까지 영국의 주도적 장관이던 로버트 월폴(1676~1745)이었다. 월폴은 영국 최초의 수상으로 일컬어지지만, 이는 정확한 호칭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수상이란 직위는 19세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상이든 아니든 그는 거대한 정치 세력을 주조해 냈다. 그는 왕이 고향인 하노버로 자주 내려가자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해, 나라의 그날 그날의 지배권을 자기 손안에서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정치가들의 소집단인 내각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였다. 내각cabinet이란 이름은 그들이 만나던 조그만 방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내각은 영국의 정치 체제에서 정책을 입안하는 행정부로 발전하게 되었다. … 그는 말년에 풍자 만화가와 민요 가수에 의해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도둑으로 묘사되었다. … 월폴은 정치적 파벌을 약 20년 동안이나 지속된 하나의 연합체로 결합시켰다. 그 기간에 그는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어떠한 입법 행위도 거부하였다. 그것은 국내 안정을 확고히하기 위해서였다. … 영국의 절대주의는 1688년에 종말을 고했다.

18세기 중엽의 외교: “외교 혁명”

1715년 이후 유럽의 외교 및 전쟁사를 보면, 국제적 안정과 경제적 팽창이라는 이중의 목표가 여전히 가장 중요했다. 그러한 목적들은 종종 사호 충돌하였고 더 많은 전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승패의 결정적 요인은 대륙의 군사력이 아니라 영국의 해군력임이 판명되곤 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큰 전쟁(유럽에서는 7년 전쟁으로, 북아메리카에서는 프랑스인 및 인디언의 전쟁이라 불렀다)을 보면, 세력 균형과 상업적 이득이라는 이해 관계가 어떻게 복합적으로 작용했는가를 잘 나타내 준다. … 7년 전쟁을 종식시킨 1763년의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캐나다와 인도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영국은 상업적 성취를 위한 가공할 만한 터전을 갖추게 되었다. “대표 없는 과세는…”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7년 전쟁에서 영국이 거둔 승리가 1775년 본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에 발발한 전쟁의 주요인이었다. 영국은 광대해진 식민지 영토를 지키는 데 필수적인 대규모 군대의 봉급을 지불하기 위해 식민지인들에게 달갑지 않은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북아메리카인들은 대표를 보내지 않았는데도 과세된 데 대해 저항했다. 본국 정부는 이에 대해, 영국의 모든 신민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영국 하원의 현직 의원이 식민지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실상” 대표한다고 대응하였다. 식민지인들은 영국 정치는 너무도 부패해서 휘그 과두정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의 이해 관계를 돌볼 수 없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아메리카 혁명

영국은 식민지인들의 반역 행위에 대해 가혹하게 보복했다. 유리한 가격으로 팔기 위해 실려온 동인도 회사의 차는 보스턴 항구에서 바다에 던져졌다. 이후로 보스턴 항구는 폐쇄되었고,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민주적 정부는 권한을 박탈당했다. 영국의 수비대는 식민지의 민간인과 충돌하였다. 식민지의 민병대는 저항 세력을 형성하였다. 1775년 전쟁이 발발할 무렵 대부분의 아메리카인들은 영국과의 유대 관계를 끊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다음해 그들 스스로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세상이 뒤집어졌네”라는 노래 제목에 걸맞게, 요크타운에서 식민지인들에게 영국인이 항복한 1781년까지 전쟁은 계속되었다.

프랑스에 뒤이어 에스파냐와 네덜란드도 영국의 식민 제국이 더 이상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고, 1778년에 신생 독립국인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1783년에 파리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 신생국의 주권이 인정되었다. 영국은 비록 이전의 식민지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력은 상실했지만, 1780년대에 미국과 대서양을 넘나드는 상업적 유대 관계를 재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