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느 질송(Etienne Gilson), 김태규 옮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이해», 성균관대출판부, 2011.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대화편 <<호르텐시우스>>를 읽음으로써 철학적 삶에 눈뜨게 된다. 그는 이때부터 지혜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었고, 그 후 그는 지혜의 발견을 신에게로 인도되는 고통의 여정 중 첫 번째 단계로 생각하게 된다. [···] 중요한 점은 지혜 즉 철학의 대상이 항상 행복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 그에게 중요한 것은 보다 더 바람직한 존재 그리고 가능하다면 행복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을 터득하기 위해 자기 인식의 확립에 힘쓰는 것이었다. – p. 13
어떤 이들은 신을 점유한다는 것은 신이 의지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선한 삶을 영위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신은 불결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들 속에 현존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의견들을 주의 깊게 숙고한다면 우리는 그것들 모두가 동일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신이 의지한 바를 행하는 사람은 선한 삶을 사는 것이고,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은 신이 의지한 바를 향하기 때문이다. – p. 17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체험은 알기 위해서는 믿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그 자신을 가르쳤고, 그는 또한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우리를 설득하기를 원한다. [···] 믿음이란 동의가 수반되는 사유다. [···] 믿는다는 것은 어느 경우든지 간에 인식하는 방식이고, 어느 지식과 같이 정신의 인식이다. 그것은 단지 그것의 기원에 있어서만 지식과 구별된다. – p. 60
지성은 신앙의 보상이다. 게다가 신은 자기를 믿는 것이 인간의 마지막 목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니고 신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 p. 71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 없이 이성이 어떻게 되는지를 자기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회의주의로 인도되는 반복된 절망에 의한 진리에 대한 무기력한 거만함이다. – p. 73
우리가 감각적 인식을 단순한 현상으로 생각한다면 오류가 없다. [···] 만약 감각적 인식이 자신과는 다른 정신적인 진리의 척도로서 사용된다면 그것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오류로 인도하게 된다. [···] 노가 물속에 있다면 나는 이것이 구부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본다. 이것보다 더 참된 것은 없다. [···] 그러나 만약 눈이 노를 똑바른 것으로 본다면 그 눈은 나를 기만하게 될 것이다. – p. 88